•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문학의 집
 
 
 
카페 게시글
…삶의 이야기…·· 스크랩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
에델바이스 추천 0 조회 140 09.06.03 10:08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미국은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고

이 세계를 주도하는 한 부류이기에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그 나라의 대통령인 오바마가

우리에겐 상당히 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오바마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입니다.

지은이는 <헤더 레어 와그너>입니다.

 

 

 

<프롤로그>

 

이 책의 주인공은 오바마입니다. 저는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는 평전 작가입니다.

그는 참 멋진 사람입니다. 옳은 일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강합니다.

정치인이 약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익힌 사람입니다.

그리고 담백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처럼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아마도 오랜 세월 부모 탓만 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쓴 것은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오바마가 살아 온 과정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텔레비젼을 통해 보이는 그의 미소가 자기와의 오랜 싸움을 극복한 이후에 나타난 무지개 같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국적을 가졌든, 피부색이 어떻든,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습니다.

특히,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세계의 많은 청소년들에게 오바마는 큰 위안을 주는 인물입니다.

복잡한 가정환경과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 오바마가 이렇듯 멋진 리더로

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에는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카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신은 오바마에게 불운보다는 행운을 더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아무에게나 행운을 주진 않습니다.

오바마는 방황하던 시절에도 부모 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재혼 실패 후 자신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맡겨두고

학업에만 몰두한 어머니를 마음에서 밀쳐놓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부모입장에 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그의 그런 삶의 태도가 행운을 가져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계의 청소년들이 현재 텔레비젼 속 자신감 넘치는 오바마의 모습에서

지난 날 그가 열등감 투성이의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자신의 열등감을 희망과 자신감으로 바꿔냈는지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모두 가능합니다. 오바마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떤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끝까지 끌고 가선 안 됩니다.

희망의 씨앗을 키워야 합니다.

상처는 희망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 씨앗이 잘 자라면 상처 많은 사람도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가 보여주는 희망의 미소를 좋아하고, 또 닮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오바마처럼 무지개 같은 멋진 미소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본문 내용>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이다.

케냐는 약 70여 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1963년 해방되었다.

오바마의 아버지가 청소년이었을때, 케냐에서는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때에,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가담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날, 아버지는 한 프로그램의 미국 유학생으로 뽑혀 장학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선진국의 기술을 배워 새롭고 현대적인 아프리카 건설에 앞장서게 한다는 취지로 케냐 지도자들과 미국 후원자들이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스물 세살에 하와이대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 곳에서 미국 캔자스 출신, 열여덟 살,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기존의 관습과 시선을 무시한 채 결혼했고, 1961년 8월 4일, 하와이에서 버락 오바마를 낳았다.

그러나 아버지 오바마는 야망이 너무 컸다.

그는 아프리카의 미래를 이끌어 갈, 리더가 되고 싶었다.

결국 하버드에서 공부를 마친 아버지는 아내와 2살짜리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조국 케냐로 돌아갔다.

 

인도네시아인으로서 유학생으로 하와이대학교에서 공부중인 한 남자와 어머니가 교제하게 되었고

2년 후,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바마는 새아버지가 있는 인도네시아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친구들의 따돌림도 견뎌야 했다.

따돌림 당한 이유는 다른 점이 많아서였다.

동네에서 유일한 외국아이였고, 주로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가톨릭 학교에 다녔으며

새아버지, 어머니, 오바마의 피부색이 다 다르다는 것도 친구들이 그를 멀리 하는 이유였다.

새 아버지는 처음엔 오바마에게 잘해주었으나, 갈수록 냉담해져갔다.

스무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깊은 상처에도, 늦었으니 일단 자자고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어머니는 오바마가 상처받을까봐 항상 노심초사하며 돌보다가

오바마를 그가 10살 되던 해에, 혼자 미국에 살고계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로 보냈다.

그리고 후에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못 견디고 이혼을 했다.

 

미국에서의 학교생활도 힘들었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하와이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였다.

주로 하와이의 부잣집 백인 아이들과 아시아계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오바마 같은 흑인 아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인도네시아의 갈색 피부의 아이들 틈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적응해야 했던 것처럼

백인 아이들 틈에서 다시 한 번 그런 과정을 겪어내야 했다.

또한 다른 주변아이들이 부유한 집안과 부모 밑에서 자기의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즐기고 살고 있음을 보면서 자라는 동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빠진 경제형편가운데서 오바마를 양육했고, 나이가 들어서 오바마와 함께

그가 즐기는 운동은 물론, 등산을 하거나, 해변에 놀러가는 일 등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들로, 오바마의 어린 시절은 소외감으로 어둡게 얼룩져 있었다.

 

그 후, 어머니는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로운 결심을 한다.

오바마와 어머니, 마야(새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난 여동생) 이렇게 세 식구가  작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는데,

경제적인 생활은 어려웠고 어머니는 인류학 석사과정을 밟기위해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집안은 정리가 안 돼 엉망이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 현실이 오바마를 주눅들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항상 오바마의 정신세계에서만큼은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꿈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항상 마음 써 주신 분이었다.

 

청소년기의 오바마는 겉으로는 활발한 성격과 리더십있는 모습으로 보여졌지만

내적으로 혼자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부터 백인 중심인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으면서

어렵고 복잡하게 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풀기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의 혼란과 고민은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답을 찾지 못한 오바마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와 마리화나를 피우며

그런 고민들로부터 잠시나마 탈출하려고 했다.

가끔 코카인에도 손을 댔다. 마약중독자, 술고래.. 그것이 그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 방황하는 오바마를 붙잡아 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 당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자주 편지를 보내 마음을 위로하고, 미래에 대한 조언을 해 주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오바마에게 채찍이자,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였다.

오바마는 기로에 섰다. 불량 청소년이 되어 혼돈의 나락으로 빠지느냐, 세상을 상대로 자신을 단련하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느냐, 선택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선택했다.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워나가기로 했다.

오바마가 방황과 혼돈의 시기를 잘 헤쳐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어머니 말고,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농구다.

경기장에서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않았고,

백인 친구와도 어울릴 수 있었다.

농구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외톨이나 이방인이 아니며, 어떤 곳에 소속됐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공동체에서 자신의 기운을 마음껏 뿜어내며 자신감도 찾았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 무렵 오바마는 대학 내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오바마에게 어떤 집회사건 연설을 제안했다.

그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는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 투쟁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흑인 편이냐 백인 편이냐, 부자 편이냐  가난한 사람 편이냐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존엄성이냐 굴종이냐, 실천이냐 외면이냐, 정의냐 불의냐 !"

그것이 그의 생애 첫 연설이었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학업에 집중했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반 인종차별 시위와 흑인 학생단체  활동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피부색이나,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당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오바마는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려면

자신은 물론 나라에도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는 잘 조직된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길은 너무 어려웠다. 어떤 때는 6개월 동안이나 실업자로 지내야 했다.

생각보다 길어진 실업자 생활로 지쳐가고 지역사회 운동가로서의 꿈도 희미해져갈 무렵

한 후원자를 만나 다시금 힘찬 출발을 하게 되었다.

 

오바마는 법 공부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학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물일곱 살에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오바마는 하버드의 권위 있는 법률학술지<하버드 로 리뷰>의 촉망받는 40인 중 한명이었고

하버드대학교 최초의 흑인편집장이 되었다.

그 무렵, 그는 학비마련을 위해 법률회사를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변호사로 활동중인 미셸 로빈슨이란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하게 되었다.

 

1996년, 오바마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그때 나이 35세로서,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흑인을 포함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뭔가 더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설득력있는 말로써 당선 되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입법과정에 참여했다.

그가 해 낸 일 중 가장 혁신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일은

'범죄자 취조과정에서의 비디오 녹화 필수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심문 녹화는 결백한 사람을 구할 뿐아니라 유죄를 선고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법안의 기본 목적은 자백이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거센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오바마에게도 몇 번의 큰 좌절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좌절은 2000년 민주당 하원의원 경선에서 패배한 것이었다.

정치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빚을 안고 한마디로 파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소중한 교훈을 준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주 의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미 연방 상원의원 출마에 도전했다.

그 무렵, 오바마는 시카고의 한 모임으로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연설을 부탁받았다.

"저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그리고, 경솔한 전쟁입니다.

또한 탁상공론에만 열중하는 행정부인사들이 인명피해나 국민이 겪을 괴로움에 대해서는

고려조차 해보지 않고 자기들의 이념을 위한 의제만을 국민들에게 강요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무지와 편협, 부패와 탐욕, 빈곤과 절망과의 싸움 말입니다."

이 연설은 주 의회의 강력한 지지세력들을 기반으로 이라크 침공을 계획했던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같았다. 연방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출마를 선언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확실한 명분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지 없이 이라크를 침공한다면,

중동지역 화약고에 불을 지르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것입니다.

그리고 아랍 국가들에게 최선이 아닌 최악의 충동을 불러일으켜 알카에다 전투부대의 신병모집을

부추기는 결과를 야기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연설로 오바마는 혜성같이 나타난 정치계의 샛별이 되었고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마침내 2004년 3월 예비선거에서 승리의 기쁨을 안았다. 그때 오바마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돈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선거를 치를 충분한 조직도 없었습니다.

버락 오바마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남부 출신 말라깽이 사나이가 이길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교외와 도시, 남부와 북부, 흑인과 백인, 라틴아메리카인과 아시아인, 일리노이주 전역의 민주당원들은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2004년 7월, 오바마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연설이 하나 탄생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존 케리를 위한 전당대회 기조연설이었다.

제목은 '담대한 희망'이었다.

 

<내용 중에서 - >

'저는 믿습니다. 중산층에게는 안정감을, 노동자 가족들에게는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자들에게는 일 할 수 있는 곳을, 살 곳이 없는 이들에게는 살 집을,

그리고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인종차별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을 폭력과 절망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직면한 도전들과 반드시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미국의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로 오바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에게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관심을 적극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오바마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2007년 2월 10일,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의회 의사당에 서서, 대선에 출마할 것을 공식발표했다.

그 곳은 링컨이 '분열된 집'이라는 연설을 한 곳이었다.

링컨은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로, 반은 자유인으로 나누어진 상태로는

영원히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며 남북단결을 호소했었다.

오바마는 그의 선거운동을 링컨의 유산과 연관시켜 연설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이 나라의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단결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며, 더욱 완벽하게 단결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라고 말하는 세대가 됩시다.'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위치와 영향력, 국가의 미래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미래계획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미국에 대한 믿음,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에 대한 갈망 때문에 그 곳에 모인 것이었다.

그를 통해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스프링필드에서의 연설을 시작으로 오바마는 제 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갈

민주당 후보 자리를 놓고 힐러리 클린턴과 경선을 시작했다.

 

 

 

 

<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수락 연설문(2008) >

 

미국의 약속 (내용 중 일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젊은 참전 군인들의 얼굴에서,

저는 제 할아버지를 봅니다.

그 분은 진주만 공습 이후 군에 자원하셨고, 패튼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 입대하셨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에서는 제대군인원호법에 의거하여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겨우 세 시간 자고 야간근무를 시작하는 어느 젊은 학생들의 얼굴에서

저는 제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제 어머니는 일을 하고 학위를 따는 동안 저와 여동생을 혼자 힘으로 키우셨습니다.

한때 생활이 여의치 못해 식량배급표에 의존하기도 했지만, 학자금 대출과 장학금을 지원받아

저희가 계속해서 이 나라 최고의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았다는 어느 근로자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20년 전 지역 철강공장이 문을 닫은 뒤, 저는 그 분들 편에 서서 그 분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어느 여성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그 분은 여성이기 때문에 몇 년간 승진에서 누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서연합에서 중간 관리까지 올라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열심히 일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더 나은 삶을 누리게 해 주시려고 새 차나 옷 구입을 자제하셨습니다.

할머니는 가진 것 모두를 제게 쏟아부으셨습니다. 비록 더 이상 여행하실 수는 없지만,

저는 오늘 밤 할머니께서 저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밤은 그 분을 위한 밤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바로 저의 삶입니다.

그 분들은 저의 영웅입니다. 그 분들의 인생 이야기가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을 대표하여 저는 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약속을 지속시키려 합니다.

그 약속은 무엇일까요?

그 약속은 우리가 각자의 뜻에 따라 고유한 삶을 꾸려나갈 자유가 있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책임지고 이라크 전쟁을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알 카에다 탈레반과의 싸움을 종결시키겠습니다.

저는 미래의 분쟁에 대비하여 우리 군을 재구축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러시아의 침공행위를 억제할 수 있도록, 그동안 거칠고 직접적이었던 외교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저는 21세기를 위협하는 요소인 테러리즘과 핵 확산, 빈곤과 대량학살, 기후변화와 질병을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구축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자유라는 대의에 부름을 받은 이들, 평화의 삶을 갈망하는 이들,

더 나은 미래를 열망하는 이들 모두를 위해 미국이 다시 한 번 최후의, 최고의 희망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도덕적 지위를 복구할 것입니다.

 

 

 

 

<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출마 연설문(2007) >


더 나은 미국을 위하여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에 대항하기 위해 군을 조직하여 전투태세를 갖췄을때,

누군가가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낯설고, 잘 맞지도 않으며,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에서 모여 든 우리는 군대를 조직하고 전투에서 끝까지 싸웠다."

이것이 바로 제가 대선에 뛰어든 이유입니다.

단지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조국을 변화시키려고 모인 것입니다.

저는 차기 선거전에서 승리하고 싶습니다. 정의와 기회를 위해서말입니다.

저는 차기 선거전에서 승리하고 싶습니다. 더 나은 학교, 더 나은 일자리,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을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완벽하게 일치단결해서 더 나은 미국을 건설하는 미완의 사업에 착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이 도전을 함께 한다면,

여러분이 운명의 부름을 느끼고, 제가 본 것과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끝없는 가능성의 미래를 보게 된다면,

여러분이 제가 인식한 것, 이제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과거에 진 빚과 다음 세대를 위해 앞장서 행동할 때라는 걸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저는 그 대의에 동참하여 여러분과 함께 행진하며,

여러분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함께, 오늘부터 시작합시다.

우리 모두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을 완성시켜,

이 지구상에서 자유가 새롭게 탄생되었음을 만방에 선포합시다.

 

 

 

 

 

지금 세계에는 오바마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바마 패밀리' 혹은 '오바마 마니아'로 불린다.

특이한 점으로, 그들 중에는

이른 바 사회에서 '비주류'라 불리는 소수자들과 이민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오바마를 사랑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꿈이 없던 그들에게 꿈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오바마가 지켜왔던 가장 큰 재산을 꿈이었다.

좌절과 고통과 방황을 극복해 나가면서 오바마는 가슴 깊은 곳에 꿈을 심었다.

꿈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오바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꿈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오바마의 힘은,

어쩌면 가장 밑바닥에 서 있는 작고 힘없는 이들의 열망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꿈의 결정체이자, 거기서 뿜어져나온 '꿈의 힘'일지도 모른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꿈을 사랑하고,

그 꿈이 단지 오바마만의 꿈이 아닌 모두의 꿈이라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2008년에 제가 쓴 버락 오바마의 이야기는 그가 대통령 후보 경선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오바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의 땅에서

'미국의 약속'을 다시 외쳤고, 잊고 있던 '미국의 정신'을 다시 흔들어 깨웠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는다."라며 화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그 약속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따뜻하고 희망적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그 희망을 다른 나라, 다른 세계 사람에게도 전해줄 수 있는 자긍심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열망의 한복판에 버락 오바마, 그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은 키가 크지만 비쩍 말랐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리'의 힘이 별로 세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다리'의 힘이 센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 앞의 모든 벽들을 하나씩 뛰어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뛰어넘어야 했던 벽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또 앞으로는 그가 가진 '다리'의 힘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사용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믿음으로 오래오래 그 사람을 지켜볼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그 사람을 지켜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다음검색
댓글
  • 09.06.03 16:35

    첫댓글 에델바이스님! 안녕하세요? 따님 혼사치르시고 몸살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이냐시오 성당 미사에 뒷모습만 뵈옵고 왔습니다. 강의가 있어서요,이세시리아 님 뵈옵고...... 큰 일하셨습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 작성자 09.06.03 18:01

    유스티나님 제가 인사를 못 드려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아그러셨군요 ..ㅎ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무사히 혼사를 치렀지요 회원에 알리지못하고 치러서 죄송~ 따듯한 사랑에 감사드려요

  • 09.06.04 06:22

    그동안 부군 돌보시느라 고생이 너무 많으셨어요! 늘 건강하세요!

  • 작성자 09.06.06 00:24

    유스티나님의 짐이 얼마나 크셨는지 미쳐 몰랐던것을 느낍니다..저가 많이 죄송했어요..얼마나 많이 혼자 힘드셨을까 가슴이 아프던걸 어찌 견디셨을까 하고요 ..늘 염려해주셔서 견디고 혼사까지 치를수 있었으니 정말 늘 고맙고 감사드려요 ..내일 신혼여행서 돌아옵니다 이바지를 보내고 살림을 내게 되네요 방배성당옆 경남A에 살게되어요 기쁘답니다 성당가까워서 ㅋ 뵈올때까지 건강하세요

  • 09.06.08 21:04

    에델바이스님! 따님께서 방배성당 옆 경남아파트에 오신다니 저도 기쁘네요! 늘 건강 조심하셔요!

  • 작성자 09.06.12 23:04

    그래요 유스티나님과의 인연으로 방배성당 근처로 가게하고 싶었죠 ㅎ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유스티나님도 건강하세요 제가 아직 잘 오진 못하고 있네요 곧 발자욱을 뗄것입니다..ㅎ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