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고도를 기다리며’ 와 ‘생명의 나무
’인생이 숙제가 아닌 '축제'인 이유
고도를 기다리며(2024)/ hankyung
“어느 저녁, 두 명의 떠돌이 남자가 시골길 나무 근처에서 만난다.” (One evening, two vagrant men meet on a country road near a tree.)
아일랜드 작가 사뮈엘 베켓 (Samuel Beckett, 1906-1989) 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1953)> 첫 문장이다.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는 하염없이 고도(Godot)라는 이를 기다린다.
간간히 노예 럭키와 잔인한 주인이자 지주 포조, 고도의 소식을 전하는 양치기 소년도 등장하지만 이들 모두 의미없는 ‘아무말 대잔치’를 장장 150분 동안 벌인다. 20분의 휴식 후 2막에서도 인물의 정체성이나 이야기의 맥락은 도무지 알수가 없다.
80년대 중반 한 예민한 중학생은 ‘고도’를 ‘높이’로 이해하고 산악인의 의지와 극복 등을 예상하다 뒷통수를 맞는다. ‘이게 다 뭐(였)지?’
이후 더 궁금했던 건, 노벨상까지 받은 작가와 작품의 의미, 수많은 평론과 관객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예술과 세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이가 드니 ‘이게 다 뭐(였)지?’ 했던 부조리한 순간들이 삶 곳곳에 숨어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는 베켓이 1939년 2차대전 참전 중 프랑스 농가에 숨어지내며 집필한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의 대명사이다. 제목 그대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는다.
소통의 부재와 존재의 불안 외에 연극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 베켓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냐 묻자 그의 답은 "그걸 알았으면 작품에 썼겠죠".
연극의 관례를 파괴하는 부조리극의 출현은 실존주의와 맞닿아 있다. 확실한 것은 태어남과 죽음뿐이요, 본래 우리의 삶은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표류한다. 인간은 자유라는 이름의 형을 선고받고 끊임없이 존재의 불안을 잠재울 무언가 - 종교, 물질, 사회참여, 사랑 등- 를 찾아 헤맨다.
실존주의는 이성과 과학의 발달 끝에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하였으나 단순히 특정 시대 유럽 철학자들만의 비관론은 아니다.
어느 아침 강의실, 항상 맨 앞에 앉는 학생이 읽는 책 표지가 눈에 띈다. <내 생일날의 고독(원제: 태어남의 불편함, 1973)>, 실존주의를 넘어 염세주의의 ‘끝판왕’인 에밀 시오랑 (Emil Mihai Cioran, 1911–1995) 의 책이다.
모국어 루마니아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아름답게 표현된 그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 이라는 생각은 2024년 소위 MZ 세대들의 삶을 통해 한국에서 실천되고 있다. 팍팍한 세상의 힘든 삶을 자식에게 겪게하는 것은 ‘무책임한 폭력’이라는 비결혼,무출산에 대한 그들의 입장.
21세기 한국 젊은이들은 어느새 합리적 허무주의자들이 되어버렸다. 전후의 폐허에서 찬란한 발전 뒤 급속하게 소멸되는 인구도 지금 한국이 겪는 대표적인 부조리함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선 다양한 평론과 해석이 존재하나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그것은 무대 위 한 그루의 나무이다. 해외평단에선 이 나무에 대한 관심도 많다.
이 버드나무는 1막에는 앙상한 가지로, 2막부터는 4-5개의 잎이 달려 등장한다. 무대에서 실종된 시간과 공간을 특정하는 유일한 존재 버드나무는 삶의 끝과 희망을 상징한다.
앙상한 나무는 인물들의 삶의 방향 상실과 허무함, 무목적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끝없는 기다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나무에선 싹이 트는데, 이는 기다림 속의 새로운 희망을 상징한다. 베켓의 진정한 의도는 뭐였을까?
‘키스 (The Kiss, 1907)’ 그림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는 화려한 금의 색채, 장식적인 초상화와 누드화로 잘 알려져있다.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너무 관능적이고 에로틱하다고 느꼈지만 성과 사랑,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전념한 그의 예술은 새시대를 연다.
클림트, 생명의 나무(1909)/wikimedia
클림트가 그린 <생명의 나무> (The Tree of Life ,1909) 는 그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유일한 대작 풍경화이다. 이 그림은 좌우의 <기다림> (The Waiting), <포옹>(The Embrace) 과 함께 스토클레트 프리즈(Stoclet Frieze) 모자이크 시리즈 중 하나이다.
생명의 나무는 전 세계 종교, 문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으로,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나무는 삶의 복잡함과 무한한 생명순환을 상징한다. 수많은 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나무의 뿌리는 땅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보여있다.
또한 나무는 땅과 하늘, 지하와 연결되어 있고 한 마리의 검은 찌르레기를 품으며 탄생과 삶,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태어나고 번성하여 땅으로 돌아가는 순환과정은 기다림, 생명의 나무, 그리고 포옹과 함께 통합된 상징으로 표현된다. 클림트에게 삶의 굴레는 알 수 없는 자연의 미스테리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신비로움이였다.
알 수 없는 일은 <고도를 기다리며>가 미국에 상륙했을때도 일어났다. 이 연극에 가장 열렬히 감응한 이들은 브로드웨이의 관객이 아니였다. 심드렁했던 뉴욕의 반응과 달리 1957년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산 쿠엔틴 (San Quentin)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 의해 연출되고 감상된 이 연극은 환호와 웃음, 눈물과 치유의 경험을 안겨준다.
남성만 출연하고 연출이 간단하단 이유로 선택된 이 부조리극은 사회와 격리되어 낙오된 이들에게 예술의 힘을 느끼게 했다. 그들이 ‘고도’를 자유로 보았던, 새로운 희망으로 보았건 이 연극은 이후 교도소와 전쟁터 같은 소외된 지역에서 꾸준히 상연된다.
의미없음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자유이고 상상에는 정답이 없다. 불확실함에 불안해하고 기다림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실존적 삶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 아닐까.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생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일 뿐이니 무의미함은 더이상 준엄하지 않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라는 TV 프로가 있다. 무작정 떠나는 즉흥적인 세계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새 예능 프로 대부분이 다큐같은 무대본, 무각본이 된지 오래다. 짜여진 것과 정해진 것에 우리는 이미 싫증이 난지도 모른다.
실제 감옥은 아니지만 스스로 짠 인생 각본에 짓눌려 사는 이들에게도 <고도를 기다리며>는 역설적으로 삶의 가벼움이란 위안을 선사한다. 인생은 원래 부조리하기에 비로소 숙제가 아닌 축제가 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을 것 같고 인구소멸의 해답도 당장 우리 머리로는 찾기 어렵다 한다. 그러나 연극 속 나무는 아랑곳없이 계속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며 잎은 풍성해질 것이다. 누가 몰라줘도 나무가 생을 지속하고 번창하며 순환하는 '생명의 나무'로 성장하는 상상을 해본다.
무대 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마음에서도 생명의 나무가 어딘가에서 튼튼히 자라고 있길 바란다. 그러면 자연스레 클림트의 그림처럼, 그 나무 아래 우리의 '기다림'은 '포옹'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꼭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