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은 돌아보기도 싫은 날이다. 합천에서 생계가 너무 막막해 히로시마로 건너가 일자리를 구한 아버지가 나중에 식솔을 불러들여 히로시마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침을 먹고 형들과 학교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섬광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지붕이 와장창 무너지면서 눈을 뜰 수 없는 흙먼지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무너진 부엌 판자에 가슴이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다."(원폭피해자 박영표)
"태어난 지 2년 만에 피폭자가 되어, 해방 후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고향 합천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산에 있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나르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어린시절 합천시장에 가면 얼굴에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진물이 흐르는 사람, 원폭으로 화상을 입어 번쩍번쩍 빛나는 흉터 자국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두 원폭피해자였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끔찍스럽다."(원폭피해자 심진태)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생생한 경험담과 피폭 후의 삶에 대한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장내는 무섭도록 숙연해졌다. 기침조차 나오지 않고 숨소리도 멈춘 것만 같았다. 수없이 되뇌였던 이야기이며 이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었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을 뻔했던 그날, 혹은 내 가족과 친구, 이웃을 빼앗아 갔던 그날, 피폭 후 줄곧 부모님과 가족들의 가난과 질병, 후유증을 지켜봐야 했던 통한을 꺼내놓으면서도 시종 절제된 표현을 이어가던 피폭자들에게서 결국은 눈물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70여년 전 원폭피해 기억이 아직도 생생
▲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에서 열린 95주년 삼일절 맞이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
삼일절을 이틀 앞둔 27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에서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합천과 부산, 대구, 서울 등지의 원폭 피폭자와 원폭2세환우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국회의원과 청중들까지 포함해 좁은 대회장이 가득 채워졌다. 자리가 없어 서서 증언에 귀기울이는 참석자들까지 줄을 지어 출입문을 활짝 열어두고 행사를 진행해야 할 정도였다.
이날 증언대회는 국회에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 피해진상규명과 지원에 관한 법안을 발의한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 이재영 의원(비례), 민주당 이학영 의원, 정의당 김제남 의원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가 주관해 마련된 행사였다.
제일 먼저 증언에 나선 박영표(78)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히로시마로 갔다. 아버지는 농토를 빼앗기고 생계가 막막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로 일을 찾아 떠난 터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원자폭탄 피폭자가 된 그는 원자폭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원폭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고 자신도 크게 다쳐 가슴에 피가 철철 흘렀다.
어머니와 형들과 함께 방공호로 피신해 응급처치를 받고 이틀 동안을 방공호에서 지냈다. 귀국길에 오른 것은 그 해 12월 중순이었다. 시모노세키 항구는 귀국 인파로 인산인해였고 서로 먼저 연락선을 타려고 아비규환이었다. 귀국 후 아버지의 몸 전체에서 피부병이 생기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56세의 나이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형제자매들도 방사능 후유증으로 위암, 갑상선암, 전립선암 등의 수술을 하며 평생 고생했다.
박영표 회장은 "70년간 정부는 실태조사 한 번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배상 대상에서 원폭피해자는 빠져있었다면서도 일본정부에 대한 피해배상 협상은 하지 않고 있다. 원폭피해자들이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간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긴 세월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원폭피해자운동을 펼쳐온 심진태(72) 합천지부장은 "때리는 서방님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속담처럼, 우리 정부는 69년이 흐르는 동안 자국민 원폭피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 한 번 하지 않았다. 원폭을 투하한 미국도, 전범국 일본도 서로 피해자라 하니 가해자는 어디에도 없는 형국이다. 우리 정부는 무엇 때문에 일본 등에 한국피폭자를 대변하여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지 정말 분통이 터진다"며 당당하고 결연한 음성으로 정부를 꾸짖었다.
이어 그는 "우리 피폭자는 거지가 아니다. 1965년 한일수교 후 대일청구권자금을 일본에서 수령하여 한국의 경제발전에 썼다고 하는데 정부는 피폭자들에게 기민정책을 펼쳤다. 우리 경제도 세계 10위권에 이르렀다는데 경제부국이라도 소외된 국민을 돌보지 않는 국가는 후진국"이라면서, "구술 증언이라도 할 수 있는 피폭자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있을 때 하루 속히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증언자, 피해자 살아있을 때 대책 마련해야"
한편 원폭피해자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통한과 분노가 어린 슬픔도 있었다. 김봉대(77) 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의 아내 이곡지(75)씨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원폭 피폭자가 되었다. 세 자매 중 큰 언니와 아버지가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피폭자인 모친도 해방 후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살다가 병으로 고생하셨다. 이곡지씨 본인도 피부병, 등허리 종양, 골다공증 등 숱한 병마와 싸워야 했다.
결혼 후 부산에서 낳은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은 생후 22개월 만에 폐렴으로 죽었고, 다른 쌍둥이 아들인 김형률씨는 30년간 병치레를 하며 죽음의 그림자와 싸우다 지난 2005년 5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봉대씨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2명밖에 없다는 희귀난치병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었다.
원폭2세 피해자였던 고 김형률씨는 서른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3년 동안,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병마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국가의 진상규명과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원폭2세환우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계속해서 고 김형률씨는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설립하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건강실태조사를 이끌어내는가 하면,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환우 진상규명과 지원 특별법(일명 '김형률법')을 국회에 청원했다. 또 국내외를 종횡무진하며 법안 설명회, 입법토론회, 증언대회를 펼치고 직접 정책제안서를 작성하여 정부와 수많은 기관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 2005년에는 국내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이후 계류되다 자동폐기됨)되었고, 원폭2세환우의 현실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수명이 줄어들고 죽음이 가까워 오는 순간에도 다른 원폭2세 환우들의 삶을 계속되게 하는 이 처절하고 숭고한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고.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김봉대 고문은 "원폭2세환우들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폭력이며 인권침해"라면서, "형률이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나는 이 땅의 모든 원폭2세환우의 아버지다.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형률이의 뜻을 이어받아 원폭피해자 2세환우들의 가족과도 연대하여 끝까지 싸울 것이다. 형률이의 삶은 살아있는 원폭2세환우들을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절절하게 외쳤다.
6년 전부터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한정순(55) 회장은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전쟁이 끝났다고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날의 참혹함과 잔인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며, "원자폭탄 피해의 대물림으로 인해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와 후유증은 고스란히 우리 원폭2세환우들의 몫으로 남았다. 부모님이 피폭지에 계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햇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원폭2세환우들의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근이양증으로 고통받으며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모진 삶을 살다가 노모와 어린 딸을 두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B씨, 뇌성마비로 태어나 대소변조차 어머니가 갈아주어야 했던 40대 초반 여성의 죽음, 40대 중반에 간경화·폐암·위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병원비 때문에 금방 퇴원하곤 했던 A씨의 생활고와 각종 난치성 질환 등 젊은 나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질환으로 고통받는 원폭2세환우들의 사연을 소개하던 중 목이 매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병원비 걱정 없이 마음놓고 진료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말과 함께, "우리 원폭2세환우들은 핵폭탄 투하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것을 증언하는 증언자"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계류 중인 특별법안만 4개, 피폭자 가족 가슴은 타들어간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의해 70만 명이 피폭되고 이중 20여만 명이 조기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원폭의 지옥 속에서 희생된 이들 열 명 중 한 사람(총 7만 명 정도로 추정)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반도에서 생계기반을 잃거나 강제동원되어 어쩔 수 없이 일본까지 떠밀려 오게 된 당시의 '조선인' 동포였다.
이중 4만 명이 즉사하거나 2~4개월 급성장애기 안에 사망했고, 생존자 3만 명 중 2만3천 여 명이 한국으로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원폭투하로부터 69년 세월이 경과한 현재, 국내 원폭피해자의 평균연령은 약 80세에 달하며 등록생존자 수는 2600여 명에 불과하다. 한편 7500~1만 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국내 원폭피폭2세 생존자 중 약 2300여 명이 원폭의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이중 1300여명이 '한국원폭2세환우회'에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17대 국회, 18대 국회에 이어 19대 국회에도 이들 원폭피해자와 2세환우의 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 여야 3당의 의원들에 의해 4개나 발의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심의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라 원폭피해자와 2세환우, 그 가족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다.
한편, 지난 2003년부터 시작된 국내 특별법 제정운동은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주축으로 결성된 '원폭문제 공동대책위'의 활동을 이어받아, 2012년 국내 24개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피해자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확대 재결성된 '특별법추진연대회의'에 의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원폭피해자와 2세환우 지원법의 핵심은 원폭2세와 3세환우 등 후세대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지원이며, 이 법안은 당시 김형률씨의 원폭2세환우 운동에서 비롯된 결정체이기 때문에 일명 '김형률법'이라 부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