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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생물의 이상
겔 1:1-14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 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 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8 그 사방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 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12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 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14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
겔 1:1-14 . [네 생물과 하나님의 영광] 여호야긴왕이 포로로 끌려간 지 ㄱ) 5년째 되던 해 4월 5일에, 곧 ㄴ) 30년 4월 5일에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부시의 아들 에스겔 제사장에게 말씀하셨다.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에 주께서 에스겔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어 그를 종으로 삼으셨다. 에스겔이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전하였다. `내가 그발 강가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 (ㄱ. BC 593년. ㄴ. 에스겔이 30세였다는 뜻일 수 있다) 4) 내가 본 대로 말하면 많은 구름이 폭풍처럼 북쪽에서 몰려왔다. 그 구름은 밝은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속에서는 번갯불이 계속 튀어나왔다. 구름이 폭발하자 그 속에서 밝은 빛이 나타났는데, 마치 빛나는 백금의 광채와 같았다. 5) 그 빛 속에서 나는 네 생물의 모양을 보았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6-12 / 그렇지만 그 생물들에게는 날개가 네 개씩 달려 있었고 다리는 사람의 다리와 같았으나 그 발바닥에는 황소의 발굽이 달려 있었다. 그들의 온몸은 번쩍이는 금속처럼 빛이 났다. 그들의 날개마다에는 그 밑에 사람의 손이 하나씩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두 날개로는 자신의 몸을 가리우고 다른 두 날개는 펼쳐서 그 날개 끝을 서로 맞대고 있었다. 그 생물들은 각각 얼굴이 넷이었다. 앞에는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에는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에는 황소의 얼굴이요, 뒤에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들지 않고서도 사방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일제히 앞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13) 그 생물들 사이에는 숯불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고 14) 그 불속에서는 끊임없이 번갯불과 불꽃이 튀어나왔다.
갈대아 땅에 포로로 잡혀온 제사장 에스겔이 하나님과 그의 보좌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의 환상(1-3) 에스겔이 환상을 본 때는 서른째 해입니다. ‘서른째 해’는 에스겔의 나이를 가리킵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는 나이가 삼십 세이며(민 4:3, 30), 그 해에 에스겔은 제사장 사역과 동시에 선지자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사역을 시작한 곳은 이방 바벨론 땅입니다. 에스겔은 세 차례의 포로이송 중에(1차 B.C. 605년; 2차 B.C. 597년, 3차 B.C. 587년), 2차 때 유다 왕 여호야긴과 함께 끌려왔습니다(왕하 24:12-16). 포로생활은 언약을 어긴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신 4:25,26).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이십니다. 그발 강가의 환상은 유다 경계 밖, 곧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권능(히.‘야드’[손])’이 에스겔서에 7회 나오며(3; 3:14, 22; 8:1; 33:22; 37:1; 40:1), 에스겔의 환상도(하늘이 스스로 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열린 것; 1절) 유다 왕국의 멸망이나 회복도 모두 여호와의 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네 생물의 형상(4-9) 에스겔은 환상을 말로 형용할 수 없기에 ‘형상,’ ‘같은 것’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환상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폭풍과 큰 구름으로 시작됩니다. 북쪽(이스라엘의 적들이 있는 곳; 렘 1:14)에서부터 불어온 것은 유다의 포로생활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암시합니다. 폭풍 속의 불과 빛은 하나님의 임재 시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현상입니다(출 19:16-18). 폭풍 가운데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 생물의 형상은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의 모습입니다(사 6:2; 계 4:7-8). 천사들은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졌고, 사람의 모습도 가졌습니다. ‘넷’이란 숫자는 네 방위를 상징하며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동서남북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곧은 다리로 곧게 행함은 그들 가운데 혼돈이 전혀 없음을 암시합니다.
생물들의 모양과 움직임(10-14) 네 생물의 앞은 사람, 오른쪽은 사자, 왼쪽은 소, 뒤는 독수리의 얼굴을 하였습니다. 네 생물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합니다. 사람은 가장 뛰어난 피조물이며, 사자는 들짐승의 왕이며, 소는 가축의 왕이며, 새는 날짐승의 왕으로서 네 생물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심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얼굴을 가진 천사들을 부리시며 피조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네 생물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전방위적으로 움직이며 어느 곳으로든 곧게 행합니다. 생물들 가운데 있는 불은 하나님의 공의(심판)와 거룩의 이미지로 보입니다.
적용: 당신이 실패한 때, 실패한 곳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임할까요? 당신의 믿음을 말해 보세요.
益者三友 損者三友[익자삼우 손자삼우]]보탬이 되는 벗이 셋이고, 해가 되는 벗이 셋이다.<논어>. 어려움이나 걱정이 있을 때 힘이 되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친구는 미더울 따름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상황 때문에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자체가 절망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절망입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 설 교 >
무시된 선지자 에스겔
에스겔 1:1-3 / 피영민 목사
서 론
오늘 제목은 무시된 선지자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을 누가 무시하겠습니까? 우리 성도들과 설교자들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가장 설교 안하는 책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설교한다면 본문이 뻔합니다. 에스겔37장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뼈가 큰 군대가 되더라” 보통 그것만 하지 다른 본문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무시된 선지자 에스겔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전체가 4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서를 가리켜 대선지서라고 합니다. 소선지서 보다도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선지서라 하는 것이 아니고, 소선지는 분량이 적기 때문이고, 대선지서는 분량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함께 에스겔서는 대선지서에 속한 책입니다. 아마도 성경 가운데 설교자들이 가장 설교하지 않는 책은 에스겔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어느 한 구석이라도 우리 성도들이 등한시 해서는 안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은 에스겔서를 강해하기 전에 먼저 서론적인 말씀으로 에스겔 선지자의 삶과 사역에 관해서 다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에스겔 선지자가 사역을 했던 장소(location)와 그 때(time)는 언제입니까?
Ⅰ. 에스겔 선지자가 사역했던 장소
에스겔 1장 3절을 보면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 가 있습니다. 갈대아 땅은 어느 나라입니까? 바벨론을 말합니다. 갈대아와 바벨론은 정확하게 동의어는 아닙니다만, 갈대아 땅에 바벨론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대아 땅이라고 하면 바벨론 땅이요, 갈대아 인이라 하면 바벨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대아 땅, 바벨론 땅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서 에스겔은 지금 그발강가에 나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강가에 나갈 때는 기분 좋을 때 나가나요? 쓸쓸할 때 나가나요? 한강에 나간다고 하면 잘 봐야 합니다. 저는 설교 마치고 가서 수상한 삼형제를 시청합니다. 지난주에는 맏아들이 그만 한강으로 갔습니다. 가서 울부짖고, 자신의 고통을 부르짖었습니다. 사람이 강가에 나갔다고 하면 그 심령이 슬프고, 호소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로부터 40년 후에 솔로몬이 왕이 되었고, 또 40년 후에 주전 930년에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지만, 강력한 야당 여로보암이 일어나서 나라가 두 쪽 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 열지파가 여로보암을 따라서 야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에 왕국을 형성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차지했습니다.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유다라는 이름으로 유다왕국, 남왕국을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북쪽 왕국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과의 시내산 언약을 모두 어겼습니다. 주전 721년에 앗수르 왕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예언 할 때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남왕국 유다도 역시 우상숭배하고 언약을 어기고 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될 것을 앞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느그아부지는 갓 네 살이다! 외우기도 참 쉽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왕국 유다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멸망 당할 것을 앞두고 있는데 유다가 멸당 당하기 직전의 마지막 세 왕은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입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 시키는 것은 이 세 왕 시대를 거치면서 18년 동안 걸린 사건이었습니다. 바벨론 열여덟 해 동안에 세 번이나 유다를 침공 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왕은 주전 609년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의 패권은 애굽 왕 바롯느고가 장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야김은 주전 609년부터 4년동안 애굽의 속국 노릇을 했습니다. 애굽 왕 바롯느고에게 조공을 바친 것입니다. 주전 605년에 중동 지방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일어나서 애굽 왕 바롯느고와 전쟁을 해서 이겼습니다. 그 전쟁을 가리켜 갈그미스 전투라고 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중동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전 605년에 느부갓네살은 여새를 몰아 유다를 침공하고 당시에 왕이었던 여호야김 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의 속국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 했습니다. 주전 605년의 이 침공을 가리켜 바벨론의 1차 침공이라 말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청년들 가운데 아름답고, 재주에 통달한 젊은이들을 뽑아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왕궁에서 왕의 산의 진미를 먹이고 바벨론의 언어와 학문을 그들에게 가르치게 했습니다. 바벨론화 한 것입니다. 사람이 일본말 배우면 일본사람 같고, 영어만 하면 영국 사람같고, 중국말만 하면 중국 사람 같습니다. 언어는 사고구조와 문화를 굉장히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쳐서 유다의 지도자급 청년들을 세뇌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 된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였습니다. 주전 605년은 느부갓네살 왕의 1차 침공이요, 이 때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속국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한 것입니다. 주전 605년부터 여호야김 왕은 3년 동안 느부갓네살 왕에게 조공을 잘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김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바벨론에 반역을 하고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김을 향해서 끊임없이 예언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시오. 항복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 온 것은 유다백성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것이니깐 매를 순순히 맞으시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 두루마리를 소도(小刀)로 잘라서 화로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불 질러 버린 인간이 여호야김입니다. 여러분, 예수 안믿는다 해도 점잖게 안믿어야 합니다. 성경 내용을 안믿는 것 까지는 말릴 수 없지만 성경을 갖다가 찢어 버리고 학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야김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주전 602년에 반란을 일으켜서 598년까지 4년 동안은 독립은 했습니다만, 그 독립은 대단히 불안전한 독립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의 통치는 4년은 애굽의 속국이었고, 3년은 바벨론의 속국이었고, 4년 동안은 불안정한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11년을 통치 했습니다. 그런데 주전 598년 4년 동안 독립선언을 하던 여호야김을 향해 느부갓네살 왕이 2차 침공을 감행 한 것입니다.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 밖에 내어 던지고 나귀같이 매장을 당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2장 19절에 예언 되었습니다.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를, 밤에는 추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11년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서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 달 밖에는 왕노릇을 하지 못하고 느부갓네살 의해 포로되어 끌려 간 것입니다. 그 때에 느부갓네살은 용사 일만 명을 사로 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유다에 있는 모든 기술자들을 모두 사로 잡아 갔습니다. 유다에는 천민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에스겔 선지자도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느부갓네살 2차 침공 때에, 주전 598년에 일만 명 끌려 갈 때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 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는 11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웠습니다. 그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애굽과 동맹을 맺어서 느부갓네살 왕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은 주전 587년에 3차 침공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성전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신의 두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은 뽑혔습니다. 아들 죽는 것 보고, 눈 뽑히운 것입니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예레미야 52장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야김 11년, 여호야긴 3개월, 시드기야 11년 그리고 시드기야가 끌려간 후에 느부갓네살은 그달랴를 세워 통치하도록 했는데 그달랴도 3개월 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이스마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다 멸망 마지막에 4명의 통치자는 11년, 3개월, 11년, 3개월 이렇게 통치하다가 다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1장 1절을 보면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제 삼십년이라 하는 것은 대부분의 성서 주석가들이 동의 하고 있는 내용인데, 에스겔의 나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1장에 하나님의 이상을 받을 때에 삼십세 였습니다. 2절은 보면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지 오년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것이 느부갓네살의 2차 침공, 주전 598년입니다. 598년에서 5년이 지났으니간 주전 593년이 되는 것입니다. 주전 593년에 에스겔은 나이 삼십살이 되었습니다. 몇 살에 포로가 되었냐면 스물 다섯살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장가도 가야 되고, 연애도 해야 하고, 여행도 가야 되고, 인생의 구만리 같은 계획을 세워야 될 나이에 포로로 끌려가 인생의 쓴 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직업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민수기에 따르면 제사장은 스물 다섯살 때에 훈련을 시작합니다. 스물 다섯살 때에 훈련을 시작해서 삼십세에 성전 공사를 시작해서 오십세까지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이었지만 훈련 받을 기회도 없었고, 봉사할 기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삼십에 “너는 선지자가 되어라”라고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이 예언을 시작한 것은 주전 593년이요, 그 때 나이는 삼십살이요. 그 때는 이미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 온지 오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언했던 장소는 바벨론의 그발강가였다는 것이 첫 번재 대지의 답인 것입니다.
Ⅱ. 에스겔 선지자가 사역했던 기간(적어도 22년)
에스겔 29장 17절을 보게 되면 포로된지 27년까지 정월 초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다라고 했습니다. 포로된지 5년에 예언을 시작해서 27년까지 계속 했으니깐 적어도 22년이상 선지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얼마나 더 살고, 예언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에스겔8장 1절을 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기로”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집을 사가지고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은 애굽 포로생활 같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포로생활 할 때는 일시키고, 때리고 했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집도 사가지고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출세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70년이 지나서 돌아오라고 하니깐 안돌아온 사람이 98%인 것을 보면 바벨론은 포로가 되어도 살기는 괜찮은 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집을 사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에스겔과 같은 시대에 예언하던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29장의 내용입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라고 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쉽게 돌아 올 수 없고, 70년이 차야 돌아 올 것이니 거기 가서 집도 사고, 집도 짓고, 결혼도 하고, 애들도 결혼을 시키고, 정착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 앞에 앉었다고 하는 말은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이요, 하나님의 손이 임하여 있는 선지자로써 존경했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14장 1절로 2절에서도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와 내 앞에 앉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로들은 에스겔 발 앞에 앉아서 말씀도 듣고 존경하는 것 같지만 그 존경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습니다. 에스겔 33장 31절에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유다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아도 마음으로는 이욕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깐 에스겔은 최소한 22년은 집 사가지고 피상적이지만 존경을 받으면서 사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Ⅲ. 에스겔 선지자의 초기사역의 특징(애곡과 애통)
에스겔은 몇 장이라고 했습니까? 에스겔서는 48장입니다. 48장을 둘로 나누면 24장입니다. 에스겔서는 구조는 반으로 나누어집니다. 1-24장, 25-48장입니다. 앞의 스물네 장은 에스겔 선지자의 초기 사역이고, 뒤의 스물네 장은 25-48은 에스겔의 후기사역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초기사역은 한 마디로 애곡과 애통과 재앙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에스겔 2장 8절로 10절에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1장부터 24장까지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을 증거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왔어도 그것은 주전 598년에 사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아직도 완전히 멸망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되어 11년동안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일어났습니다.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거짓된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릴 것이고 유다 백성들은 두 해가 지나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거짓 예언에 속지마라. 속지마라 바벨론에서 70년은 살아야 된다” 그 이유를 역대하 36장 2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여러분 하나님의 법은 농사를 지어도 육년은 짓고 일년은 쉬라는 것입니다. 땅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토지가 산성화 되어 못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년간 농사 지으면 일년간 반드시 토지 안식년을 갖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90년 역사 가운데 단 일년도 안식년을 안지켰습니다. 490년 동안 안식년을 70번을 떼어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내 것을 다 뺏어 먹었느뇨? 내가 강제로 찾겠다. 네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있는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옮기고 70년 동안 이 땅을 쉬게 하겠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안드려도 하나님께서 다 찾아 가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100% 십일조를 다 합니다.” 어떻게 목회를 그렇게 잘 하십니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어떤 분은 교회에다가 십일조 내고, 어떤 분은 병원에대가, 사기꾼한테 낸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것은 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십일조는 100% 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것을 떼어 잡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도로 찾아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서는 1장부터 24장까지 예루살렘의 심판이 오고 재앙이 오고 결국은 망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에스겔서 24장을 보게 되면 심판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4장 2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오는 날이 예루살렘이 멸망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48장 가운데 예루살렘 완전 멸망의 날이 예언 된 장은 24장입니다. 에스겔은 그 날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그 날 저녁에 아내를 잃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24장 16절에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 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가 죽은 기일이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의 아내를 잃어도 울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 잃었다고 슬퍼하냐? 나라가 망했는데,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날인데, 민족적인 대슬픔 앞에 개인의 문제 가지고 울면 되겠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 슬퍼서, 그 슬픔에 압도 당하면 눈물도 안나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비운과 고통의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Ⅳ. 에스겔 선지자의 후기사역의 특징(구원과 소망)
에스겔 24장에서 예루살렘이 완전 멸망을 당하더니 그 다음부터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유다 백성들에게 소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감옥살이 10년을 했다면, 10년 할 때는 괴롭겠지만 마치고 나면 감옥에서 나옵니다. 나오면 두부도 먹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고. 이제는 과거에 죄로 인해서 경찰을 봐도 두려워 떨 것도 없습니다. 25장부터 32장까지는 유다 백성들을 괴롭힌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3장-48장까지는 구원과 소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4장 11절로 12절을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내 흩어진 양을 찾아 다 모으겠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회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8절에는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의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땅도 70년 안식년을 다 지켰으니 가지를 내고, 과실을 내고, 이제는 영양가 있는 산물을 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절에는 영혼의 회복, 국가의 회복, 땅의 회복 그리고 성전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스겔 후반부에는 회복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Ⅴ. 에스겔서의 교훈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무궁합니다. 영원전부터 사랑해서 영원후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해도 사랑하고 잘못해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 충성해도 사랑하고 불충성해도 하나님이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표현을 받는게 틀려 집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사랑하면 땅의 기름진 것을 먹게 되고, 불충성하고 하나님을 배역하면 하나님의 매를 맞아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표현이 다릅니다. 우리가 자식이 있어도 잘하면 상주고, 잘못하면 때립니다. 때린다고 미워합니까? 표현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랑을 경험하시겠습니까? 매로 경험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알아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15절입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사람 막대기, 인생 채찍! 이것으로 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당근과 채찍이 있습니다. 둘 다 우리를 사랑해서 갖고 계신 것입니다. 올해는 채찍 맞지 마시고, 하나님의 당근을 받고 축복을 받고 하나님이 미소 짓는 얼굴을 뵙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파숫꾼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땅, 포로의 땅, 고난의 땅, 바벨론에 있는 선지자 에스겔을 일으켜서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에스겔아, 바벨론 땅에서 70년 포로가 된다. 그러나 70년이 지나면 회복된다는 것을 믿어라!” 시편107편 20절에도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10년도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에도 말씀을 보내시길 원합니다. “김정일아 너는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느냐?”라고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화폐개혁해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냐? 화폐개혁으로 북한의 고위 간부를 돈 다 잃어 버려서 속으로 꿍시렁 꿍시렁 합니다. 아버지 때에는 먹고 살만 했는데 아들이 와서 다 뺏어 간다고 꿍시렁 꿍시렁 한다고 합니다. 이제 김정일이도 살 길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독재자의 최후는 자기 개인 목숨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과 자기 자식을 지키는 것이 중국이냐 한국이냐 이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북한을 중국에 주지 말고 남한에 주어라” 그렇게 보내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또 “북한이 1907년 평양 장대현에 대부흥을 경험 했던 부흥의 진원지가 아니냐?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내려와 얼마나 교회를 일으키고 큰 부흥을 일으킨지 내가 알고 있느니라 북한 사람들아 이제는 공산 독재에서 해방 될 지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보내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내셔서 위경에서 건지시고, 나라를 통일하시고, 우리가 또 다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 세계 선교를 하는 선교대국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올해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과 북한에게 좋은 말씀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셋째는, 에스겔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은 어려운 시대에 자기 아내를 잃었습니다. 심지어는 인분으로 떡을 해서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그걸 어떻게 먹습니까?” 다른 재료로 바꿔 달라고 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고약하겠다해서 쇠똥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어렸을 때에 길가다가 개똥 밟는 것 보다는 쇠똥 밟는 것이 정결하고 깨끗합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강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 론
2010년도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여러분 모두에게 강하게 하시는 은혜, 말씀을 보내셔서 위경에서 건지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이상(Vision)
에스겔 1:4-14 / 피영민 목사
서 론
에스겔서는 유다 백성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암울한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되어서 끌려온 유다 백성들은 슬펐을 것입니다. 그리고 좌절되고 기가 죽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포로로 삼고 괴롭히는 바벨론의 문명이 너무 찬란하고 강대한 것을 보고 미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신 벨(Bel)과 므로닥(Marduk)이 휘황찬란한 신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신앙의 큰 혼돈도 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를 이렇게 포로되게 하셨는데, 바벨론의 신 벨과 므로닥은 바벨론을 이렇게 융성하게 하지 않았느냐 하는 혼돈도 왔을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가 자체가 포로가 되는 것을 큰 비극으로 이미 경험 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70년을 겪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일본 사람들에게 36년이나 겪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때에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환상 하나만 보아도 우리 신앙이 얼마나 격려를 받습니까? 기도하다가 환상이 보이고, 하나님의 이상이 보였다 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됩니까? 하물며 에스겔은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으니 얼마나 놀랍고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에스겔서 1장 1절을 보면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서의 1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이상"인 것입니다. 옛날에 이화여대에 미국의 유명한 가수 클리프 리챠드(Cliff Richard)가 왔었습니다. 그때에 "Visions of you"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나는 가만히 누워도 너의 이상이 보인다"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1장의 내용은 읽어도 복잡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주석가인 존 칼빈 선생이 "누구든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고백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빈 선생이 어렵다고 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놀라운 이상을 주신 목적은 에스겔을 헷갈리게 하고 혼동을 주려한 것이 아니고 유익을 주려 했던 것입니다. 2차 대전이 언제 있었습니까? 우리가 1945년에 해방 되었는데, 6년전인 1939년에 2차 대전이 일어나서 1945년에 끝난것입니다. 2차 대전 끝날때에 대한민국은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님은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설교자의 사명은 전쟁으로 좌절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일깨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Comfort and Awaken)"라고 말했습니다. 에스겔 1장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상하고 놀라운 이상을 보여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로된 그들을 위로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고, 일깨워 주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포로된 유다백성들에게 공허한 위로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괜찮아 질거야, 염려마라" 이런 말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경 안정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로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바벨론 신 벨과 므로닥에게 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기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이시오.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를 징벌하시고 노예되게 하셨지만 능히 이 바벨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확신을 줄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1장 1절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Ⅰ. 복잡한 이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분들은 에스겔 1장을 읽으면서 "UFO 또는 신형 헬리콥터다"라고 말합니다. 바퀴도 달리고 날아다니니 신형 헬리콥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장에 나타난 UFO'라는 책도 있습니다. 이것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요, 말도 안 되는 망상입니다. 에스겔 1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이상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을 비젼으로만, 이상으로만 보여 주십니까? 지금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지붕을 뚫고 내려오셔서 저보고 가서 앉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이 자리에 서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시원하게 보여 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요한복음 1장 18절에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도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에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고, 본 사람도 없는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았다 해도 하나님의 등만 본 것입니다. 전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면을 보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는 즉시 소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상으로만 보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이상은 장소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1. 4-14절 천상의 장면입니다.
하늘의 장면입니다.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네 생물의 얼굴이 각각 네 개라고 했습니다. 앞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뒷면은 독수리의 얼굴이요,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좌편은 소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날개는 네 개인데 두 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둘로는 몸을 가리웠다고 했고, 날개 밑에는 손이 있다고 했습니다. 손은 일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일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생물의 모양은 횃불같고, 왕래가 빠르다고 했습니다. 번개같이 갔다가, 번개같이 옵니다. 그런데 네 생물이 누구입니까? 에스겔 10장 20절을 보면 에스겔이 알았습니다. 네 생물들은 "그룹천사들"이었습니다. 하늘에 가서 천상의 장면을 보니깐 천사들이 왕래하고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천사들을 처음 보았을 때 전체적인 인상은 "사람처럼 보였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들도 사람처럼 생긴 것입니다. 짐승처럼 나타나는 것은 사탄 악령들입니다. 뱀, 돼지, 호랑이는 모두 악령의 상징입니다. 이 천사들은 하나님을 수종드는 피조물들인 것입니다. 생물(creature)은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들도 피조물들입니다. 천상에 가보니깐, 하늘이 열려 보니깐 수많은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넷'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의 넷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본 것이 넷에 국한되었는지 아니면 상징적인 숫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천사들의 숫자는 천천만만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7장 10절에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하는 자는 만만이라"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천사들에 이상을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벨론의 군대가 몇 십만, 몇 백만인지 몰라도 하나님이 "까불지 마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상의 군대 천천만만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천천만만 군대 가운데 가장 능력 없는 천사가 내려와도 인간 군대 2,300만 군대 하루 아침에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아 너희 군대가 몇 백만 이라고 까부느냐? 까불지 마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천천만만의 천사가 수종드는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15-21절 지상의 장면입니다.
에스겔 1장 15절을 보면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땅 위로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땅에는 바퀴가 있다고 했습니다. 생물들이 번개같은 속도로 하늘에서 내려와 땅위에 섰습니다. 네 생물은 얼굴이 넷인데 얼굴마다 큰 바퀴가 다 있더라는 것입니다. 앞,뒤,좌,우에 큰 바퀴가 있는 것입니다. 바퀴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 주석가들은 일치합니다. 바퀴는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시는 원리가 바퀴와 같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6절에도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바퀴입니다. 우리 나라에 어떤 가수가 인생은 바퀴라고 했습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본 바퀴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생물과 함께 행한다는 것입니다. 생물이 가면 바퀴도 가고, 바퀴가 가면 생물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다스시리실 때에는 천사들을 사용해서 다스리신다라는 것입니다. 인간 가운데 하나님이 복을 주실 사람은 천사를 보내어 "저 사람 사업을 축복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혼을 내라고 하면 천사를 보내어 혼을 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헤롯 아그립바 1세라는 왕이 백성들을 모아 놓고, 번쩍번쩍한 옷을 입고 연설을 했습니다. 햇빛을 받으니 옷이 번쩍번쩍 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사람이 아니라 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왕은 신인척 폼 잡다가 하나님이 고약히 여기셔서 천사를 내려 보내어 "천사가 치니 충히 먹어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섭리하실 때는 천사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바퀴가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손바닥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바퀴는 온 둘레에 눈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눈이 두 개 있습니다. 그런데 뒤통수에 한 개만 더 달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시험공부 할 것 없습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 앞에 앉아서 보고 시험치면 됩니다. 눈이 뒤에만 한 개만 더 달려도 교통사고 날일 별로 없습니다. 앞에 가는 차도 보이고, 뒤에 가는 차도 보여 안전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이렇게 눈이 한 개만 더 있어도 사람이 지혜롭게 되는데, 이 바퀴는 온 둘레가 눈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는 그 만큼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하는 것은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섭리는 지혜로운 섭리입니다. 넷째, 바깥에 바퀴가 하나 있고, 가운데 하나가 더 있습니다.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이중 바퀴입니다. 바깥이 바퀴가 아무리 돌아도 그 가운데 있는 축은 일정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것이 대단히 복잡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는 변치 않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역사가 존재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 역사의 중심축에 요동치 않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3. 22-28절 보좌위의 장면입니다
네 생물들이 있는데 머리 위에는 궁창이 있고, 궁창 위에는 보좌가 있습니다. 그 보좌 위에는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입니다. 에스겔 1장 26절에서 28절에는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라고 했습니다. 궁창에서는 천사들이 날개 소리를 냅니다. 24절에는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날개 소리가 물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 어머니 고향인 모도에 가면 밤에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이 파도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시원하게 오면 얼마나 빗소리가 듣기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위에 보좌가 있고 보좌위에 앉으신 사람 같은 분이 여호와의 형상이신데 그 분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형상은 성육신 하기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은 에스겔이 본 이상을 신약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습니다.
에스겔 1장은 하늘에 있는 네 생물, 땅에는 바퀴, 네 생물 위의 보좌 이 세가지 이상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Ⅱ. 이 이상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라고 증거하는 것인가?
1.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은 존재이시다 인간과는 구별되는 존재이시다
이 이상을 보고“나하고 똑같은 분이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나와 다른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50편 21절에 보면“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의 장면 중, 미시시피 남부에서 새우 잡는 모습이 나옵니다. 검프는 전쟁 중에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군대 상관이었던 댄 중위와 함께 새우잡이를 했습니다. 새우를 잡다가 폭풍을 만납니다. 검프는 배 머리에 서서“하나님이 저하고 맞짱 한번 뜹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같은 수준인 줄 압니다. 미국의 유명한 골프 선수 중에 토미 볼트(Tommy Bolt)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볼트는 골프 치다가 안맞으면 골프채 부러뜨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날 퍼팅을 하는데 여섯 번을 했습니다. 빗나가기를 6번이나 한 것입니다. 퍼터를 던지고서는“하나님 계시면 내려와 보십시오. 맞짱 한번 뜹시다”라고 했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맞먹는 존재인 줄 알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몰몬교의 교리 가운데는‘영원한 진보의 교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창시자의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후계자인 브리검영(Brigham Young)이 가르친 교리인데“하나님은 한때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으나 점점 진보하셔서 존귀케 되어 하나님이 되셨다.”곧 하나님은 높아지신 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몰몬교는 이단인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해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과 인간의 경계가 대단히 불투명한 사상인 것입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에덴 동산의 뱀입니다. 하와를 꼬일 때에“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못 먹게 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십니다. 이 진리를 가리켜“하나님의 거룩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깨끗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구별되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에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1장 28절에“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배해야 할 신이신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짓입니다. 이번 명절에는 우상숭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모든 이상들은 모두 일하고 있습니다. 쉬는 존재가 없습니다. 큰 폭풍도 북쪽에서 오고, 큰 구름도 움직이고, 네 생물도 왕래가 번개 같습니다. 바퀴도 네 생물과 함께 행합니다. 생물들은 큰 물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닙니다. 보좌 위의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의문을 갖었을 것입니다.‘하나님 우리가 포로되어 왔는데도 왜 잠잠하십니까?’하박국 선지자도 의문을 갖었습니다.‘하나님 악인들이 득세하는데도 잠잠하십니까? 아무말도 안하시고 아무일도 하지 않으십니까?’하나님의 답변은 동일합니다.“아니다. 내가 일하고 있다. 내 천사들이 부지런히 왕래하고 있다. 내 신이 움직이고 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일하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면서 놀면 안됩니다.“나는 직분이 없어서 못해요. 장로가 아니라서 못해요.”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식당에 설거지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청소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저는 집에서 설거지 자주 합니다. 어느날 손이 가려워서 병원에 갔더니 주부습진이랍니다. 설교 준비에 비하면 설거지는 일도 아닙니다. 즉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일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지역이나 상황에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유다 백성들이‘여기는 이스라엘 땅도 아니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나? 우리는 포로된 상황이니 하나님인들 어떻게 하시겠나? 우리가 이스라엘 땅을 잃었으니 하나님도 잃어 버린 것이 아니냐?’이렇게 생각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아니다. 내가 여기 있다 시간과 장소가 나를 제한 할 수 없느니라 너희가 바벨론에 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너희가 우상숭배해서 내가 벌 줄려고 데리고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떠난 것이 아니고 벌 받는 시간이 모두 차면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낼 것이다. 나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 전능한 여호와이니라.”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악한 사단이 막아 보지만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4.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에스겔이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발 강가에서 좌절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에스겔을 찾아 오셔서 하늘을 열어 주시고 이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세도 80세 나이로 좌절되어 양치기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하고 있을 때에 먼저 찾아 주셨습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 죽이려고 할 때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먼저 찾아 주시고 변화 시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 1서 4장 19절에도“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먼저 만나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예정하셔서 구원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정을 안 믿고, 선택을 안 믿는 것은 성경을 안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 하나님은 사람과 의사소통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Francis Shaeffer)가“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에스겔 1장에 생물도 보이고, 바퀴도 보이지만 이상의 클라이맥스(climax)는 보좌 위에 앉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은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어떻게 움직이던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퀴가 어디로 가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바퀴든, 천사든 말씀대로 움직이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도승인 마르틴 루터가 위대한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당신은 평범한 수도승인데 어떻게 위대한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까?”루터가“단순히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 했을 뿐입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을 가르치고 설교 했더니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우리보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셨으면 그 말이 맞는 겁니다. 또 죄인들이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영영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했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죄를 그대로 가지고 죽으면 영영한 지올불에 떨어 집니다. 그렇다면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했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우편 강도가 예수님 죽으실 때에“당신의 나라 갈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그 한 마디로 인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내 죄 값을 값으심을 믿습니다!”이 한마디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죽어도 천국가는 것입니다.
강도가 십자가에 죽으면 거기서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생각합니다. 도둑놈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죽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셔도 누가 죽으셨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자 이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말씀 하시고, 천군만만 천사를 모두 운행하시던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면 그것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그분 한 생명이 우리 모든 인간 모두를 합친 가치보다 더 큰 분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자가 영원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다고 했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하나님은 부지런히 일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1세기인 지금도 하나님은 지금도 보좌에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천사들은 바쁘게 왕래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 66권으로 말씀하고 계시고, 수많은 목사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우상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듣기만 하면 뭐합니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의 천천만만의 천사가 우리 편이 되고, 우리를 돕는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듣고도 거역하는 자는 하늘의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은 절대 성공 할 수 없고, 형통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성공을 해야 합니다.
사사기 5장 20절을 보면 드보라의 노래가 나옵니다.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온갖 큰 소리 치다가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라는 여자가 장막 말뚝을 가지고 잠들어 있는 시스라의 얼굴에 박아 버렸습니다. 그때에 드보라가 노래합니다.“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시스라는 하늘의 별들, 하늘의 천군천사와 싸워 결국 비참하게 죽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천군천사가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하늘의 천군천사와 천천만만의 도움과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천천만만의 천사와 싸우는 인생이 되시겠습니까? 천천만만, 천군천사의 도움을 받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이 열리면
겔 1:1~3, 행 7:54~60 / 이성희 목사
우리나라의 개국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개천절을 맞이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는 시점에서 중요한 기념일이라고 봅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교과서나 인터넷에 우리의 역사가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정부 뿐만 아니라 민간단체도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문자적으로 ‘개천절’(開天節)은 하늘이 열린 날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인 이곳에서 반만년 전에 하늘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가 길이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잘 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기업이 60나노 8기가비트 반도체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여 다시 한번 우리의 나노기술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황우석교수는 인간배아줄기세포를 배양에 성공하여 이름을 날렸습니다. 또 얼마 전 경북대학교에서는 세계 최초로 비만 유전자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저께 신문에는 우리나라의 갖가지 통계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세계 1위인 것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CDMA 휴대폰 판매, 반도체 생산, 초고속인터넷, 선박 건조량, TFT, LCD 출하 등입니다. 한반도 전쟁이 끝난 지 50년 만에 가난한 고아의 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것이 이렇게 많아졌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는 아직도 부정적인 데가 많습니다. 분단이 28%, 고도성장이 24%, 그리고 월드컵이나 IT 산업을 생각한답니다. 또 외국인의 눈에는 한국인의 패거리 문화가 가장 나쁘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패거리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이런 부정적 문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자살이 부쩍 늘었습니다. 특히 20대와 30대의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전체 자살률이 10년 전보다 2.3배 늘었다고 얼마 전 보도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이런 부정적 국가 이미지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국민의 마음에 하늘이 열리고 트인 하늘을 보고 숨통이 트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이 열리다”는 말은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납니다. 노아 시대에는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야곱은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하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계시록 4장에는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후에 될 일이보이리라고 합니다.
“열다”란 말은 헬라어로 ‘스키조’란 말입니다. 이 말은 ‘가르다’, ‘나누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하늘의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의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이 열리는 이유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님이 강림하십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늘의 비밀을 보이십니다. 우리나라가 ‘개천’하여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강하게 임재하시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비밀을 보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사도행전 7:55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려야 성령이 충만합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끝납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려면 하늘이 열려야 합니다. 성령충만하게 하늘을 여세요. 하늘 문을 두드리세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 하늘이 열려 우리 모두가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지만 성령의 씨앗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는데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갑니다. 그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신이었습니다. 무엇을 파느냐고 묻자 신은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팝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여인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 못 찾으신 것 같군요. 부인, 이 가게에선 열매를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충만하면 그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우리도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강림하시고,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개천하여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늘이 열렸을 때에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하늘을 열면 영광은 보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하늘에서 내여 비취는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얼마나 찬란한지 눈이 멀 정도였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늘이 열리고 영광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은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볼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에서 떨어지고 엎드려졌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눈이 다시 떠졌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눈으로 영광을 봅니다. 영광을 압니다. 영광을 노래합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의 신비한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도망가는 비굴하고 약싹 빠른 욕심쟁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깍쟁이에게 하나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의 비밀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기를 누설하신 것입니다. 그를 선택하고 간절히 복 받기를 원하는 그의 마음을 하나님은 받으시고 하늘을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늘이 열려야 보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은 하늘이 열려야 보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하늘을 열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여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은 포로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까지 포로로 잡혀가서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귀환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놀랍고 크신 신비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에스겔 1:1에는 이 그발 강가에서 포로민이었던 그에게 신비를 보이십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고, 앞일이 트이지 않고, 안개 속 같은 길을 갈 때에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이상을 보이실 것입니다. 하늘을 열면 문제가 열립니다. 하늘을 열면 경제가 열립니다. 하늘을 열면 세계가 열립니다. 하늘을 열면 내 마음도 열립니다.
솔로몬이 성전 공사를 마치고 봉헌합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가 끝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고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내려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내립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됩니다. 어디에나 하늘이 열리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온 세계가 우리나라에 영광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하늘이 열려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개천하여 영광이 가득하면 모든 세상사가 형통할 것입니다.
셋째, 하늘이 열리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스데반은 하늘이 열렸을 때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예수님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셋째 하늘에도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보입니다. 하늘의 신비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미리 일러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는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재림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열고 친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열린 하늘을 통하여 재림하시는 영광스런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한 시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그에게 “안심하라 일어나라 주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께 다가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때 그는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좇아갔습니다. 눈이 열리고 볼 수 있게 되면 뭘 보게 됩니까?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각장애인은 보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눈이 열리면 예수님을 보고 따릅니다. 하늘이 열리면 눈이 열려 예수님이 보입니다. 하늘이 열려야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나라가 개천절, 하늘이 열린 날에 예수님을 보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이름이 온 땅에 퍼져가고, 예수님을 잘 믿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조금 지난 이야기이지만 김정일이 남한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남한 사람들은 점심으로 칼국수를 즐겨 먹기에 칼을 품고 다닐지 몰라 무서워 못 온답니다. 둘째, 남한 사람들은 급하다면 총알택시를 불러 타고 다닌다고 하니 총알이 무서워 올 수가 없답니다. 셋째, 저녁만 되면 남한의 남자들은 왕대포 집으로 몰려가니 대포 한 알이면 목숨도 끊어지는데, 왕대포로 맞을까 두려워 못 온답니다. 넷째, 2차로 몰려가는 곳이 폭탄주 마시는 곳이니 폭탄을 안고 사는 남한의 남자들이 무서워 올 수가 없지요. 다섯째, 핵가족만 선호하는 남한 사람들이 언제 핵으로 무장한 채 달려들지 몰라 이래저래 김정일이 남한에 올 엄두도 못 내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은 결정적으로 교회마다 전도특공대가 있어서 특공대가 겁이 나서 못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의 말은 너무 강해요. 무서운 말들을 많이 씁니다. 원래 순하디 순한 민족이었습니다. 흰 옷 입기를 좋아하고 서라벌은 연기를 내지 않겠다고 숱을 피웠답니다. 그러던 민족이 얼마나 시달렸는지 독해져서 무서운 민족이 되었어요. 그런데 서로 이념적으로 대치하고 분단되어 살고 있으니 얼마나 더 독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거룩한 영으로 새롭게 하셔서 어린이 같은 순전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라가 여러 가지로 혼란한 가운데 있습니다. 외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압력도 거셉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까지처럼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며칠 전 어느 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청해 왔습니다. 보안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립학교 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10월 4일 보안법 폐지 반대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어 있는데 혼란만 가중할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보안법 문제는 간단하게 말하면 국민들의 다수가 불안해하고 있는데 불안하지 않게 해주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재는 법이 있어도 불안한데 법이 없으면 얼마나 불안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체입법도 좋은데 국민들이 안보에 대하여 불안하지 않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사립학교 법에 대하여는 일부사학의 비리를 가지고 전체의 운영주체를 바꾸고, 건학이념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더구나 대광고등학교의 사태는 고등학교 평준화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실패한 평준화 정책을 바꾸는 것이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는 것에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규모 시위에 대해서도 정부가 대규모 시위를 하지 않도록 해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힘으로 국민의 정서를 무시하면 힘으로 대항합니다. 기차는 빠르고 정확하지만 항상 소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쇠와 쇠가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힘과 힘은 소리가 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항상 대화하며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난 주간 세계적 여행 가이드북인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기적이다. 중국은 한국의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고, 일본은 동쪽에서 한국을 찌르고 있다. 한국이 수 세기 동안 본의 아니게 전쟁 게임에 주역으로 참가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나 주변국이 아무리 한국을 삼키려 했어도 한국은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다”. 여러분, 그게 이상합니까? 저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닙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시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우리 스스로가 하늘을 열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 하늘을 열어주시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나라, 하늘의 비밀을 듣는 나라, 그리고 하늘이 열려 주의 영광이 머무는 복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인자를 보이신 하나님
겔 1:1-3, 행 7:55-58 / 이성희 목사
오랫동안 공직에 계시다가 은퇴하신 어떤 분이 자서전적 책을 쓰셨습니다. 그 내용 중에 특이한 것을 싣고 있습니다. 살면서 조심해야 될 사람이란 대한 대목인데 이런 유의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말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흉보는 이중인격자’, ‘매사에 반대만 하는 사람’, ‘큰소리만 치면서 책임지지 않는 사람’, ‘남의 직업을 우습게 보는 사람’, ‘의도적으로 일을 훼방하는 사람’, ‘남에게 대접은 않으면서도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 ‘세상에만 집착하는 사람’ 등입니다. 이 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세상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의 일을 알아야 세상도 압니다. 하늘의 이치는 세상을 사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알고, 하늘을 봐야 세상에서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수도 없이 하늘 문을 여시고, 보여주시고, “짠” 하시면서 신비한 것을 보여주시는데 둔한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늘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기를 누설하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절대로 감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알리라”고 하시며 모두가 다 알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3:11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하늘의 비밀은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1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비밀취급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면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미리 예고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인자를 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면 더 이상 보일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여실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실 최고의 볼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실 최상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로새서 2:2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가장 큰 선물이며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뜻입니다.
첫 순교의 은혜를 입은 스데반은 하나님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가장 큰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스데반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순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실 최대의 선물은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광경을 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 신비한 스데반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십니다.
오늘 본문 55절에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자를 보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인자를 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고 절대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인자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를 볼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그는 밤에 왔지만 밤손님이 아니라 정말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을 설명하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성령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만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67에는 “그 부친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이 훌륭한 선지자요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자가 된 것은 성령이 충만한 부친 덕이었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성령 충만이 여러분의 후손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후손들이 훌륭한 사회인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의 후손들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인자를 보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6:3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첫 직분자를 선택하는 자격은 성령이 충만한 자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교회의 일을 맡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직분자들이 성령 충만하고, 칭찬 받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인자를 보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4에는 120명의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여 방언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8에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4:31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17에는 다메섹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너로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13:9에는 바울이 구브로에서 마술사 엘루마를 만나 성령이 충만하여 엘루마를 향하여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라고 책망합니다. 아마 성령이 충만하지 못했으면 그렇게 책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1:24에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많은 사람을 더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늘의 명령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늘을 보고 삽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세상에 빠지기 않고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은 속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우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채워야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세상을 사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세상을 바꿉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기 위한 촉매제(bond)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순간순간 하늘 문을 여는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이신 인자가 보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고 인자를 보이십니다.
55절에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하늘을 봤더니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인자가 보였습니다. 하늘을 봐야 하늘 문이 보입니다. 하늘을 보는 자에게 하늘 문은 열립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보입니다.
사람은 하늘을 향한 존재입니다. 헬라어의 사람이란 말은 ‘안트로포스’입니다. 이 말은 하늘을 향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땅을 향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지어졌습니다. 하늘을 향해 살아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땅을 바라봤자 땅의 것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늘 하늘을 향해 살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죽음의 위험이 괴롭히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땅의 위험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땅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잠시도 두려움이 없어질 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두려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수도원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저녁이 되어 캄캄해지면 수도사들은 한 둘씩 나와 사막을 산책합니다. 저도 그들을 따라 사막으로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조심스럽고 무서워 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땅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막에 뱀도 있고 전갈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바라보니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땅은 두려움을 주고, 하늘은 용기를 줍니다.
아브라함은 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밖으로 나갑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창세기 15:5에 보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봐야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하늘을 봐야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늘을 봐야 희망이 보입니다. 하늘을 봐야 비로소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만 봐서는 세상을 알 수 없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란 소설에 보면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땅에 발을 디디고, 땅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장 안전할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땅에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만 땅에 살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땅만 바라보는 것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하늘을 바라보세요. 하늘을 우러러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세요. 이 때가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고, 희망이 있는 순간입니다.
에스겔 1:1에는 “서른 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니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사무친 포로의 억울함을 해소합니다. 마음의 답답함이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과의 미묘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과의 작전통제권과 그 외의 일들이 있습니다. 일본과의 야스꾸니 신사참배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가 우리를 화나게 합니다. 이런 모든 답답함이 하늘이 열리면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소됩니다.
유대 동화에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임금님께 탄원하였습니다. 일 년의 여유를 주신다면 임금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말을 하늘을 날도록 가르쳐 보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록 날지 못하면 사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의 동료 죄수가 “말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일년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일년 내에 임금님이 죽을지도 모르고, 혹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더욱이 그 말이 죽지 말라는 법도 없지. 그리고 일년 뒤에 말이 정말 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야”라고 하였답니다. 임금님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말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보다 말이 날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중요합니다. 죽음 앞에서의 희망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늘 문만 열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창세기 28:12에서 야곱은 하늘이 열려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향하는 자에게 하늘 문은 열리고, 하늘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이미 하늘에 있는 자인 하늘나라 사람들을 보세요. 계시록에는 하늘 문이 열리는 말씀이 많습니다. 4:1에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하늘의 사람이 되면 항상 열린 하늘 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 아름다운 광경과 그 안의 하나님의 보게 될 것입니다.
잘 아는 복음 성가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세요. 거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는 위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결 론
어느 글에서 톨스토이 마지막 기도를 발견했습니다. “마음에 슬픔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똑같은 슬픔을 느끼며 잠을 깬다. 나는 모든 걸 견딜 수 없다.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여, 생명의 원천이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주소서.” 얼마나 애절합니까? 주님을 바라보며, 열린 문을 보는 것은 최후의 소망입니다. 최후의 은총입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스데반은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최대의 봉사입니다. 최고의 예배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의 마지막 순간, 잠이 들기 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종말적 사건을 맞이할 때, 피곤하고 지친 어려움이 있을 때, 죽음 같은 고통이 엄습할 때, 이때가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를 보는 시간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한 하늘 문이 우리 앞에 열리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신비한 경험이 우리의 삶의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열림
겔 1:1-3 / 강용규 목사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면서 저 나름의 구약성경 39권을 머릿속에 정리하는 노하우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사건을 머릿속에 기억하면 되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사건이고, 또 하나의 사건은 바벨론 포로 70년 생활입니다. 그 두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기록된 책이 바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입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전개됩니다. 그 다음은 바벨론 포로 사건에 관련된 예언서를 기억하십시오. 예언서는 이사야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바벨론 포로 시기에는 에스겔이 예언을 했고,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에는 예레미야로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가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입니다. 이러면 구약 39권이 머릿속에 다 들어옵니다.
이 두 사건 중에 특히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은 제 개인적인 생각에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입니다.
애굽에서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애굽에 들어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는 주전 1250년경에 가나안 땅에 정착을 시작으로 다윗 왕 시대에 황홀한 전성기를 누리면서 나라를 이어가다가 결국 주전 587년에 바벨론한테 망해서 강제적으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에스겔은 여호와긴이라는 왕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 활동을 했던 예언자입니다.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 땅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서 발생한 문명입니다.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은 옥토입니다. 여기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홍수입니다. 건설한 도시가 홍수에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느브갓네살 왕이 홍수를 대비하려고 강바닥의 모래를 파내는 준설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힘든 일을 이스라엘 포로들을 시켰습니다. 그들의 고충이 시편 137편 1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도 그 작업하는 포로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힘든 일을 하면서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자신은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누군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힘든 현실을 이겨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에스겔은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입고 흙을 파내는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제사장 옷이 많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냐, 를 끊임없이 기억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습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 소비치의 하루”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반 데니 소비치’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죄수입니다. 솔제니친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반 데니 소비치는 돌을 다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반 데니 소비치가 자기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존엄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밥풀 하나를 먹겠다고 혀로 핥아먹지 맙시다. 우리가 배고프다고 밥풀 하나를 혀로 핥아먹는 그 순간 간수들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우리는 간수들이 던져주는 빵을 더 먹겠다고 서로 싸우면서 빼앗지 맙시다. 그것을 빼앗는 순간 간수들은 우리를 사람 아닌 짐승으로 취급합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반 데니 소비치는 우리가 존엄한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우리가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렵고, 힘들고, 병들었을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고,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이고,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에 빛을 전하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할 때 하늘이 열리는 겁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 에스겔을 통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정확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바알과 아세라도 섬겼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준설작업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세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❶ 저들 안에 있는 우상을 다 버리게 됩니다. 성경을 눈여겨보면 바벨론 포로 전인, 아모스, 미가, 호세아, 하박국에는 “너희 가운데 우상을 버려라.” 하는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가 끝난 후인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에는 이런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❷ 바벨론 포로기에 구약성경을 비로소 책으로 엮는 작업을 합니다.
❸ 저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날 오늘 우리가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그 순간 우리가 초막에 살더라도, 궁궐에 살더라도 그 어디나 주님을 모신 하늘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생활 속에서 언제나 주님을 바라봤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 딸인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 속에 살고 있지 아니한가. 이런 음성을 성령을 통해서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대강절 첫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이며, 빛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문이 열린 사람
겔 1:1-3 / 피종진 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장 위대한 사람과 함 께 하는 순간인 줄로 믿습니다. 가 장 위대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 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약해도 힘있는 사람이 함께 할 때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고, 길을 잃어 버릴 때 길을 알려주고, 알지 못할 때는 알게 해주고, 또 위험할 때는 막아주고, 어려울 때는 어려움을 극 복할 수 있는 힘을 주어서 극복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를 들어서 콜 게이트 같은 사람 은 참 어렵게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머니가 그에게 늘 부탁했습니 다.
'콜 게이트야, 너는 항상 주머니 를 2개 가지라. 그런데 한 쪽 주머 니는 십일조를 담는 주머니로 사용 하고, 한 쪽에는 너의 쓸 것을 담는 주머니로 사용하라.' 이렇게 어려서 부터 그에게 십일조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어느날 콜 게이 트가 큰 회사 사장실에 취직을 했는 데 어느날 그 사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 회사가 전부 콜 게이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사장의 전 재 산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치약, 화장품, 비누 등 세계적인 콜 게이트 제품을 생산 했고, 또 회사 이름도 자기 이름을 따서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니까 사원으로 들어갔다가 세계 5대 재벌 안에 들어가는 이런 역사 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부자는 손 끝에 있고, 큰 부자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왕이 면 믿음도 부자가 되고, 물질에도 거부가 되어서 한 세상 사는 동안에 크게 높이 귀하게 되어지기를 예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 문 이 열리고 신령한 은혜가 에스겔에 게 임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 이 하늘 문을 열어주셔서 에스겔에 게 부어주신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 에게 임한 신령한 계시를 보여주시 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러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 주실까요? 첫째,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사 역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십 니다. "제 삼십 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 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 게 보이시니"(1절) 여기에서 '그발 강가'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포 로가 된 남유다 백성들을 한곳에 모 아 정착케 한 곳입니다. 그래서 에 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사로잡힌 자 중에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사역 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하 늘 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이상 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 님의 사명을 위해서 살 때에 하늘 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 세 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 하나 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사명자' 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 은 이 자체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 다. '사명'(mission)이라는 말은 '하 나님의 명령이 임했다. 하나님의 뜻 이 임했다. 성령의 파견자, 하나님의 대사'라는 뜻입니다.
대통령이 대사 를 각 나라로 보낼 때에 임명장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생활 할 수 있는 의식주와 모든 신변보호 에 대한 것, 또 각 나라 대통령과 고관을 만날 수 있는 신임장까지 다 부여해주고, 자녀들의 교육까지 다 책임을 져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 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사명자로 세웠는데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왜 하나님이 외면하시겠습니까? 한 국 가의 사명을 맡은 자에게도 반드시 국가에서 책임을 지거늘 우리 하나 님의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반 드시 책임을 져주실 줄 믿으시기 바 랍니다. 건강에 대한 책임도 져주시 고, 양식과 물의 책임도 져주시고, 신변 보호의 책임도 져주시고, 진정 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기 뻐하고, 감사히 생각하고, 일에 대해 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을 다한다면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영광도 받 으시고,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실 줄 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사명을 가진 사람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① 어 떤 일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후서 4:1에 보 면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 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했습니다. 낙심을 잘하는 사람은 사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않 고 그 사명에 대해서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 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하면 끝까지 지속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큰 일 을 맡을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 다.
② 감사한 마음으로 임해야 됩니 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에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 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 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직분을 맡게 됨을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는 정말 그 직분이 더 빛나게 하나님이 도와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한다 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일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바 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욱 좋아하 시기 바랍니다. 땀흘리고 수고할 때 더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남보다 더 큰 일을 많이 할 때 더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일에도 수고의 댓 가가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더 큰 하나님의 상이 있는 줄 믿으 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 을 맡아서 일하는 자는 감사한 마음 이 넘쳐야 됩니다.
③ 반드시 끝까지 맡은 직분을 이 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17에 보면 "주 안에서 받은 직분 을 삼가 이루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분이 일을 하다가 끝맺음도 없 고 결과도 없이 흐지부지하고, 자기 일에 권태를 느껴서 시험에 들거나 또는 낙심이 되어서 중도에 그만두 는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맡은 사명에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리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상급을 예비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건전한 신앙이라면 하나님의 일이 기뻐지고, 하나님의 일이 기다려집 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 내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자원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사명감이 있는 자는 자신에 대해서도 주인정신이 있게 되고, 긍지가 갖게 되고,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열의가 있게 됩니다. 열심을 품고 교회에 다니고, 주를 섬기게 됩니다. 맡은 일이 없으면 열심이 식어지고, 나중에는 주님도 멀어지고, 교회도 멀어지게 됩니다. 둘째, 기도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에스겔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었 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늘 문 을 열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이 기도 중에 신령한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게 하니 살아 일어나 서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이었습니다. 또 에스겔 47장에 보면 기도하다가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사해 골짜기의 황무지를 기름진 땅 으로 변화시키는 환상을 보았습니 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게는 이 와 같이 신령한 문을 열어 주십니 다. 신령한 영안이 뜨여지게 합니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 십니다. 신령한 마음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참여하게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요구사항을
① 기도할 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 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 고, 더 큰 비밀한 일을 하나님께로 부터 보여줌을 받을 줄 믿으시기 바 랍니다.
② 기도할 때 환난에서 건짐을 받 습니다. 이 세상은 어느 곳에든지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없고, 환난 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 떤 환난이 있어도, 시편 50:15에 보 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난이 있어도 환난 자체에 대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 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우 리의 보호자시요, 응답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한복음 16:33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 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환난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그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이 계 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 에 기도하지 않으면 환난 날에 쓰러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 불같은 환난이 와도 어떤 시험이 와도 하나님의 건져주 심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 중에 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③ 기도할 때 성령의 불을 받게 됩 니다. 누가복음 11:13에 보면 "너희 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 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 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 령을 받기 원하시면 기도하세요. 이 세상을 개혁시키고, 이 세상을 바로 인도하고, 영계를 지배한 사람은 다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입니다. 불 받은 사람의 공통점은 다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 의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주님께 기도하고, 마 음을 합해서 주님을 잘 섬기게 되면 주께서 하늘 문을 열어서 신령한 은 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리빙스톤은 철야기도하다가 성령 의 불을 받았다고 고백했고, 스펄젼 은 무릎을 꿇고 땀방울이 나오기까 지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다 고 고백했습니다. 던컨 제임스는 하 루에 13시간씩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챨스 피니 는 시간만 있으면 숲속에 들어가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산 속에 들어 가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체험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을 받고 나니까 말에도 권세가 나타나고, 손 과 발에도 권세가 나타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늘의 불이 떨어 졌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가장 가까이 만나주시는 줄 믿으시 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큰 일을 맡겨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 랍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도를 기 뻐하시면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큰 성령을 선물로 주실까요?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기도의 무릎이 뻣뻣하 거나 기도의 입이 뻣뻣하거나 기도 의 혀가 아직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면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 도의 은사를 받고,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기도는 말을 잘 엮어나간다고 그 것이 응답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 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기 때 문에 차라리 기도가 안나오면 억지 로 인위적으로 사람의 귀를 의식해 서 하지 말고 '주여'하고 주님만 불 러도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줄 믿으 시기 바랍니다. '주여'하고 부르는 한마디 속에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 이고, 하늘 문이 열려질 줄 믿으시 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부를 때마다 응답해주 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 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 을 깨우치라."(겔 3:17) 하나님은 에 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주시 고, 그 말씀을 대언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 다.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복음을 받 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 서 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의 나팔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 입을 통해서 가장 나타내기를 원하 시는 말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 요. 예수님은 당신의 구주입니다. 예 수님은 당신의 생명입니다. 예수님 은 당신의 보호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치료자입니다.'라는 말입니 다. 이렇게 우리가 외칠 때 그 말에 책임을 져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 다. 바울은 빌립보 옥중에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고 말씀했습니다. 그 결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 다. 우리가 전도할 때 길고 아름다 운 말, 그리고 어려운 미사여구를 다 말하지 않아도 괜챦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한 마디 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줄 믿으 시기 바랍니다. 이 한 마디 속에 하 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전도자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 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예수를 증거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 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내 본업으로 삼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든지, 직장생활 을 하든지, 여러분들이 공무원이든, 학생이든, 군인이든 관계가 없습니 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때와 장소가 관계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2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누구에게든지 찾아갈 수가 있고, 누구에게든지 외 칠 수가 있고, 누구에게든지 예수를 나타내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든지 우리와 동행해주시고, 예수를 증거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 니다. 누가복음 10:19에 보면 "내가 너 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 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 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라는 것은 전도자를 가리킵니 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의 능력을 주는데 원수의 모든 능력 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 다.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하 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원 수 마귀를 정복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신앙의 등불이 준비된 자에 게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 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 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 25:1,2,10) 여기에 보면 슬기로운 다 섯 처녀에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열 처녀에게 모두 신랑을 맞이할 기 회를 주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 문에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올 경우를 생각하고 충 분한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이 왔을 때 등불을 들고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의 등불을 준비 하여 언제 주님이 오셔도, 언제 주 님이 우리 마음을 노크하셔도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환영할 수 있 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13 에 보면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 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에 도 낙심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끝까지 맡은 직분에 충성하며, 에스 겔과 같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을 전하며, 신앙의 등불을 잘 준비 하여 하늘 문이 활짝 열리는 체험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임하리라
겔 1:1-3 / 장준태 목사
에스겔 성경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시절에 바로 그 포로민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나라가 망하기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예언했다면 에스겔은 나라가 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속되는 관심과, 함께 하고 계심을 에스겔을 통해 알게 하는 예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언서의 첫장을 열었습니다.
우선, 에스겔 역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제자장중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특별히 에스겔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에스겔은 1장1절에서 자신의 나이 30세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나이 30이면 그야말로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시작하는 가장 좋은 나이입니다. 만약 여호야긴 이란 왕과 바벨론에 포로로 같이 끌려갔다면 에스겔은 25세에 포로로 잡힌 셈이 됩니다. 피가 끓는 나이에 적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제대로 활동한 연배에 그는 자신의 할 일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나라 바벨론에 끌려가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 미래가 없는 젊은이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기가막히게도 예레미야에게는 눈물을 쏟고 유다의 멸망을 목도해야 하는 시기와 거의 유사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조국 유다에서 나라가 망한다며 예언을 쏟아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 땅에 하나님의 계획을 들려주고, 나중을 준비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스겔은 자유가 없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미래가 암담해 보입니다. 버림받은 백성들중에 하나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버림받은 것 같지만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두고 보시기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퍼뜩 머리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내 삶의 자리 한쪽이 무너져 내려 가슴을 치고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하나님 믿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아우성 칠 때에 하나님은 이미 다른 계획을 가지고 나의 삶 다른 곳을 수보하고 계신다는 사실. 내가 무너질 때에 나의 아내를 통해 새로운 계획을 진행하시고, 내가 무너질 때 자식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머리에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들을 버림바 되게 두시지 않습니다. 그냥 끝나도록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나는 내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나와 관계된 모든 부분을 보십니다. 이 비유가 결코 하나님의 손길과 비길 수는 없겠지만, 바둑이나 장기 훈수 둬 보셨습니까? 본인이 시합을 할 때는 안보이던 것도 훈수 들라치면 보입니다. 하나만 보다가도 두개 세개가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천가지 만가지도 보고 진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 참 잘 오셨습니다. 이 예배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분명히 주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을 다시 보십시오.
에스겔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중에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향땅을 그리며 앉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성전을 그리며 자신의 제사장 직임을 할 수 없음에 탄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음에 탄식하고 있는지, 앞으로 바벨론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대한 걱정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이상을 보여주십니다. 에스겔에게 하늘을 여시고 이상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상에 대한 내용은 4절이하에 나오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이상입니다. 결코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에 편만해 계신 하나님, 사람이 생각하는 정도의 좁고 작은 하나님이 아니시라, 천지 만물을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여주십니다. 어쨌든 성경은 그 때에 에스겔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참으로 놀라운 일을 기록합니다. 이상을 본 에스겔도 놀랄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방 땅에서 그것도 나라가 망해서 처량하게 앉아 마음 둘 곳도 없이 탄식하고 있는 제사장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솔로몬처럼 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상중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발강가는 성별된 장소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한 장소가 아닙니다. 우상이 난무하는 땅입니다. 세상 문화가 첨단인 땅입니다. 또한 에스겔이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고향 예루살렘의 성전을 기억하고 거기서 단을 쌓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단을 쌓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처럼, 에스겔도 단을 쌓았다면 성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단을 쌓고 나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고개를 끄덕이겠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셨습니다. 제 짧은 성경지식으로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고 란 표현이 사용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동일한 내용이 있습니다. 또 한군데 제가 알기로,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며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11에서 베드로가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며 고넬료의 집에 가도록 하는 장면에 하늘이 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런데, 이미 구약의 시대에 그것도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포로민이 된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에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성경에서는 유일하게 딱 한번 여기에서만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신약의 예를 든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때니까, 집사 스데반이 주님을 믿다가 그리스도인중에 처음으로 순교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주의 사역을 제대로 감당해야 하니까 라고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말 그대로 사로잡힌 자입니다. 에스겔이 무슨 사역을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에스겔을 지목하셨습니다. 거기 사로잡힌 자 중에서 택하신 것입니다. 지명하여 부른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하늘문이 열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인가는 교회 표어가 하늘문이 열리는 교회 라고 정한 교회도 있습니다. 저는 이 아침에 하나님의 관심이 여기 이 자리에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주일을 성수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의 예배가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 드리는 자들마다 주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특별히 여기 이 자리에, 저와 여러분이 예배 드리는 이 자리에 주님의 특별한 관심이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욕심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룩한 욕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모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3절에 의하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라고 에스겔이 고백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제사장이 사실 에스겔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에스겔에게 임하였습니다. 1절의 표현처럼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중에 란 말은 혼자만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거기 분명히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했습니다. 제사장인 에스겔에게 특별한 주의 사랑과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에스겔을 은혜의 통로로 삼으신 하나님은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결코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았다는 주의 놀라운 사랑을 말씀을 통해 마음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배에 여기 이 자리가 그발강가의 에스겔에게처럼 특별하게 주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1. 주님의 특별한 관심의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십시오. 나에게 관심을 갖게 하십시오. 그럼 하늘이 열립니다. 예수님께 특별한 관심을 갖으셨던 아버지 하나님, 스데반의 죽음을 보시며 스데반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베드로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편견을 깨뜨려 주고 싶으셨던 사랑의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나에게 관심을 갖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열립니다. 보여줄 것이 있어서 열립니다. 순교자의 영광이 무엇인지 먼저 보여주시려고 하늘을 여십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명해집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통하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어떤 계획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이상을 본 사람이 에스겔이라면, 하늘이 열린 곳은 어디입니까? 하늘이 열린 곳은 그발강가입니다. 그발강가는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가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바로, 에스겔의 삶의 처소에서 하늘을 여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처소에서도 하늘을 열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로 관심을 갖게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 하늘이 열리리라는 기대를 갖으십시오. 우리 가정에 우리의 직장과 사업장에 하늘이 열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되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주님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고,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 길이 있음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사방이 막혔을 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온통 지붕을 뜯어낸 사람들에게 눈길이 쏠렸습니다. 특별한 관심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길을 연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지붕만 뜯어내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관심이 자신들에게 쏠리게 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리쳤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사람들이 꾸짖을 때에도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지붕을 뜯는 일이나 소리치는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다시 우리의 삶의 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참 힘들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듣습니다. 요즘 정말 살기 힘듭니다 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하늘이 열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온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경제문제다. 경제문제는 군대문제다. 군대문제는 정치문제다. 정치문제는 정치가의 양심문제다.
양심문제는 도덕의 문제다. 도덕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다. 종교의 문제는 신학의 문제다.”
이 시대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그 문제는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신학,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신앙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노터치!(No touch) 먼저 주의 얼굴을 구하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손대면 댈수록 덧날 뿐입니다. 조급하게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실 여지가 있도록 침묵하며 기도하십시오. 하늘문이 열리는 놀라운 일을 기대하십시오.
사실, 제자들끼리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문제였습니다. 풍랑이는 바다에서도 문제였고, 변화산 밑에 귀신들린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자마자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은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소망이 끊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직임은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말로 할일 곧 직업이 없어진 것입니다. 나이 스물다섯에 포로가 되고 서른에 타향살이 하며 무슨 생각엔가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지경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 있습니까? 그런 분은 손한번 들어보십시오. 설령 그런 분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면 그 삶의 자리, 힘들고 지치고 고난받고 고통스러운 그 자리에 하늘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심으로 새소망이 생기고, 힘이 나며, 상황이 180도 뒤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여기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관심이 특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 하나님 손에 붙잡혀라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절대로 1회성이 되면 안됩니다. 1회용은 그 때는 좋고 그 때는 뭔가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지만 그 때뿐입니다. 1회용 물건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회용 컵은 편리하지만 쓰고나면 버립니다. 1회용 밴드 역시 쓰고나면 버립니다. 1회용은 어떤 것이든지 그 호칭처럼 한번만 쓰면 용도 폐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는 은혜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 받는 은혜는 우리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일생을 살면서 늘 주의 은혜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뜻 가운데에 우리가 주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의하면 말씀3절에서,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라고 에스겔이 고백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야훼의 손에 잡혔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손에 붙잡히시기 바랍니다. 붙잡히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히면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일에 사용됩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혔던 위대한 인물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 2000년동안 수많은 성인들이 나왔고 지금도 주님께 붙잡혀 사역하는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명만 예를 들어볼까요?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는 동네에서 내놓은 망나니였습니다. 도둑질에 계집질에 그야말로 친구들과 갖은 못된 짓은 다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붙잡히니까 사람이 된 정도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사도가 되었고, 핍박자였던 사울은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모세는 세상을 호령했던 애굽왕 바로를 굴복시켰고, 구두가게에서 구두를 고치던 무디는 죽어가는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께 인도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혀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그런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그런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교회학교 어린이들로부터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주님께 붙잡히기를 기도합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춘천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디서 붙잡힐지 모릅니다. 꼭 기도할 때, 예배할 때만 붙잡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은 예수쟁이들 잡으러 가가다 붙잡혔고, 베드로는 생업터에서 고기잡이 하다가 붙잡혔고, 삭개오는 뽕나무위에서 예수님 구경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의 주인공인 에스겔은 포로로 생활하다가 하나님께 붙잡혔습니다.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붙잡히면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바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 왔다가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왔다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존경과 사랑가운데 기억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이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혔는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학력의 차이도 아니고, 가진 소유의 차이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를 만들어내겠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스가랴 8:13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손에 붙잡히면 축복이 되실줄로 믿으십니까? 아멘! 믿음대로 될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3. 말씀을 이식 받으라
이상중에 무엇으로 임합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3절 말씀은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고" 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이상중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소통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이 열리면 별난 것이 있나 생각합니다. 늘 우리 주변에서 접하는 말씀 말고 뭐 다른 것은 없나 하고 기웃기웃 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것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셨지 전혀 언어가 달라서 못알아듣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습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전혀 듣지 못했던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에스겔과 대화가 통할 수 있는 말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말씀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 되고,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내가 들을 때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에서 영으로, 즉 하나님의 영에서 우리의 영으로 전해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실제로 말씀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심장병 환자는 심장 이식을 받아야 하고,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신장 이식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 의학의 기적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식하기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2002년은 DNA 발견 50주년이 되는 해였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황우석 박사가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는 모두 DNA의 발견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중에서도 생명공학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여기서 잘못 말하면 큰일납니다. 그런데, DNA의 핵심은 정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생명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DNA 염색체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이 수없이 많은 세월을 보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생명공학에 대한 강의를 할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DNA의 발견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 말씀으로 영적 DNA를 심고 싶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DNA가 모든 육신의 구조를 형성하고 생명의 정체성을 내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내 생명의 근원과 정체성 그리고 나의 예정된 삶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을 심고자 하십니다. 에스겔에게 들려주시는 말씀 역시 말씀속에 주의 분명한 계획과 뜻이 담겨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을 심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똑같습니다.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불확정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머리에서 마음으로 말씀을 심으면 불안은 사라질 것입니다. 분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확신을 갖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겔에게 임한 특별한 말씀이 내게도 임하게 하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에스겔은 분명 특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말씀하시는 구약에서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특별하신 분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사로잡혀 여기 이 예배의 자리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대상이 되었고, 이제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말씀을 이식하셨습니다. 믿음을 갖고 기다리십시오. 이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다 에스겔과 같이 주의 영광에 거하는 특별한 은총을 덧입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발 강가에 선 에스겔처럼
에스겔 1:1-3 / 계강현 목사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와 혼란기에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한반도의 핵 폐기와 평화공존과 종전선언과 경제제재 해제 등의 난제와 더불어 여야의 극한 대치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미중무역 갈등에 이어 일본이 선거를 앞두고 한일 간 위안부 문제 등 인도적 정치적 문제를 반도체 원자재 수출 규제라는 경제조치로 보복함으로써 한일 간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양극화 현상으로 이 땅에 청년실업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정부는 최저임금제 1만원 시대를 공약하고 나섰지만, 현실적인 반대에 부딪쳐 8,590원으로 조정 결정되었다. 하지만 노조 측의 반대투쟁이 예상된다. 한국교회는 ‘개독교’라는 비난과 조롱을 사회로부터 받고 있다. 기윤실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가 17.8% 정도 밖에 못 미치고 있고, 시사저널 조사 결과, 직업 신뢰도 33개 중에서 목사가 25위로 나타났는데, 참고로 신부 11위, 스님 18위이다.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냉소는 이미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더구나 기독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무엇이 옳은가?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할까? 주체할 수 없는 역사적, 시대적, 교회적 책무 앞에 무력해진다. 당장 진로와 취업과 결혼 등 보장되거나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실이 힘들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과 사역에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고 계신가?’, ‘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혹시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라고 이것을 해결하실 수 있을까?’, 심지어 일부이겠지만 믿음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까지 회의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 겔 1장에서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정치 사회적으로 더 암울하고 신앙적으로 부패했던 시대에 살았던 청년 에스겔을 만난다. 그가 포로로 잡혀온 멀고먼 원수의 땅 바빌로니아 그발 강가에서 서성일 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겔 1:1,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가에 있었다.”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은 언제를 말하나?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나, 많은 학자들이 에스겔이 나이가 ‘30세 되던 때’라고 해석한다. v2에서 에스겔은 부연설명하기를,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온 지 오 년째가 되는 그 달 오 일에”라고 했다. 그러니까 25세의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올 때 같이 포로로 끌려와서 5년이 지나 지금 30세가 되던 때에 하나님을 만났다.
v3에서는 자신을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제사장은 25살부터 5년 정도 제사장을 보조하는 수습 기간을 거쳐서 30살이 될 때 제사장 직무를 정식으로 감당한다고 한다.(민 8:24; 4:3) 그렇다면 25살의 제사장 보조로 한참 일을 배워야 할 때 청년 에스겔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와서 비참한 포로민들과 함께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30살! 비로소 조국과 민족, 교회를 위해 제사장 직무를 감당할 나이가 되었는데, 그는 포로민으로 그발 강가에 절망감으로 서있는 것이다.
시 137편은 당시 유대 포로민들의 실상을 가슴 사무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부제가 ‘복수를 구하는 기도’이다. “1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2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3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4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 8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9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유대 포로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던 자신들의 수금으로 바빌론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시온의 노래, 찬양을 부르라고 강요받고 있다. 그 비참한 마음을 시로 쓰면서 그들을 복수해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추정해보건대, 그발 강가는 포로민들의 탄식의 기도처였을 것 같다. 조국은 여호야긴 왕 이후 그의 삼촌 시드기야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상숭배와 부정부패에 빠져 바빌론과 이집트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의 삶도 처참하기 이를 때 없다. 이런 시점에 청년 에스겔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 진로에 대한 두려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에 대한 염려, 포로 국가에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는 것에 대한 근심 등에 휩싸여,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미래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과 암울한 조국의 현실 앞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발 강가에서 서성이며 시온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청년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참고로 에스겔(יחזקאל)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이다.
1. 하나님은 비전을 보여주신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다.” 환상은 영어성경에 ‘vision’으로 나온다. 고뇌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비전을 보여주셨다. 그 환상은 세 가지였는데, 네 생물의 비전(vv4-14)과 수레바퀴의 비전(vv15-25)과 네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보좌의 비전(vv26-28)이었다.
에스겔은 자신의 섬겨야 할 하나님의 임재의 예루살렘 성전은 저 멀리 유대 땅에 있고, 자신은 하나님이 안 계신 이방 땅에 버려져 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생생하게 임하신 것이다. 네 생물의 비전은 그룹 천사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이 그룹 천사들을 부리셔서 역사 속에서 아직도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수레바퀴의 비전은 하나님은 지금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며 가득한 눈으로 사물을 꿰뚫어보고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또한 보좌의 비전은 그런 하나님이 영광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임하신 모습을 보여준다. v28,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비록 절망적인 포로지이지만, 바로 이곳에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고 역사하고 있고 역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시청각 메시지이다.
그렇다! 절망 가운데 고뇌하는 청년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임하여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신다. 바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신앙적으로 도무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지라도 이런 패역함 가운데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영국의 한 무신론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신론을 가르치려고 칠판에 이런 글을 썼다. "God is no where."(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안 계시다.) 그러자 한 학생이 나와서 글짜 w자를 지우고 앞 단어 뒤로 옮겨 적었다. 그러자 "God is now here."(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가 되었다. 하나님은 오늘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며 일하고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보고 용기를 내었듯이 여러분도 용기를 내라.
2.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v3,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며” 뭐라고 말씀하셨나? 2: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하고 말하여라.” 2:7,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오직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절망 가운데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그를 붙잡아 소명을 주고 계시다. 에스겔은 백성들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처럼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우상숭배와 강포와 불순종의 죄악을 회개하라.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더 바빌론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을 선포한다. 포로민들은 바빌론이 멸망하고 조속한 유다 귀환을 소망했는데, 전혀 반대의 말을 하는 에스겔을 바빌론의 앞잡이 정도로 취급하며 조롱하게 된다. 하나님은 패역한 포로민들이 이렇게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도록 명령하고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으라고 하신다. 그 두루마리는 입에서 달기는 꿀과 같았지만, 배에서 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었다.(2:10)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은 포로민들은 그 처참한 내용에 패역하게 거부했다. 그럼에도 말씀을 받은 에스겔은 순종하여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항상 우리 주위에서 일하고 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말씀하시며 우리를 자신의 일에 초청하시고 소명을 주신다. 딤후 4: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우리가 복음 전하려는 현장은 마음이 열려서 목장과 교회에 나오려고 준비하고 있지 않다. 말세가 될수록 더 어려워진다. 경계하고 배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지옥의 바다에서 물에 빠져 허덕이며 생명을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영혼들을 건져내어 천국백성 삼으러 우리는 가야 한다.
3. 하나님의 권능이 사로잡았다.
v3b, “거기에서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권능이란 히브리어로 ‘야드’로 영어성경에서는 ‘the hand’로 번역한다. ‘하나님의 손’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뜻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청년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비전과 사명(말씀)을 주시고 그 비전과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권능을 허락하신다. 여호와의 권능은 에스겔이 사역하는 동안 중요한 순간마다 임하였다.(3:14,22; 8:1; 37:1)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상 가운데서 부르시고(소명), 세상 가운데로 보내실 때(사명)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권능으로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러 구원해주시고, 사역자로 부르시고 영혼구원 제자 만들기의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마 28:18,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막 16:15-18,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이 약속은 복음전도에 소명을 받은 우리 사역자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신앙적으로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우리 개인의 진로와 방향, 결혼, 가정에 대한 책임감 등도 함께 짊어지고 살고 있다. 거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힘들 때가 있다. 우리 스스로의 무능함 때문에 절망에 빠지거나 시도하다가 좌절되기도 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더 한 상황 속에서 살았던 청년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서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와 비전과 소명과 권능으로 함께 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자신의 그발 강가에 서있던 때가 있었다.
나도 인생을 살면서 그발 강가에 섰던 경험들이 있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 청년 수련회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구원의 확신을 가진 후 재수하면서 새벽마다 진로를 놓고 기도했고, 마침내 기도원의 그발 강가에서 목사가 되기로 헌신하고 신학교를 갔다.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고 추진하고 있을 때 가기로 했던 교회에서 갑자기 계획을 틀어버리는 바람에 공중에 떴다. 그때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남 금광교회에 부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또한 부교역자로 나이는 차고 진로를 놓고 그발 강가에서 탄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광주 금광교회 개척으로 불러주셨다. 또 목회의 현장 속에서 교회당 화재라는 사건을 통해 그발 강가에서 고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가정교회를 전념하도록 사명을 주셨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싱글 청년 여러분, 조국과 민족의 현실이 불안하고 앞날이 걱정되는가? 정치판과 사회를 보면서 답답한가? 한국교회의 현실이 부끄럽고 울분이 생기는가? 그래서 깊은 절망감과 패배의식에 몸부림치고 있는가? 어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할까? 나의 미래는 무엇인가? 염려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때 내 생각과 시도를 멈추고 그발 강가에 서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자.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소명과 사명을 확인하고 무한하신 권능으로 인도하심을 받자. 다들 방황하고 절망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그의 권능에 붙잡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