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팔찌
함영연
리아의 팔목에 있는 오색팔찌는 공부를 마치고 가방을 챙기는 리아가 대견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보니 더욱 그랬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엄마는 팔찌를 주면서 엄마 보듯이 하라고 했다. 그 말에 리아는 덤덤했지만, 팔찌는 엄마의 마음으로 대했다.
“오늘 올 거지? 그 팔찌 갖고 싶다아.”
며칠 전에 생일초대장을 준 가희가 말했다.
“이, 이건…….”
리아가 손을 뒤로 했다. 가희는 생일파티에 꼭 오라는 말을 하고 교실을 나갔다.
‘어쩌지? 이걸 선물로 줄까?’
리아는 가방을 메며 혼잣말을 했다.
“안 돼!”
팔찌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은 리아에게 마음을 쓰고 있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홀로 리아를 키우는 딸을 보며 한숨짓곤 했다. 미혼모가 된다 해도 아기는 꼭 낳을 거라는 말에, 안쓰러워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리아 엄마는 할머니의 걱정을 아는 터라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런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과로로 쓰러져 입원하게 된 것이다.
“와, 오색팔찌네. 예쁘다. 어디서 샀니?”
가희는 리아가 팔찌를 하고 온 첫날부터 관심을 보였다.
“이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거야.”
리아는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고 하니 정말 갖고 싶은걸.”
가희는 더욱 눈길을 떼지 못했다. 팔찌는 세월이 흐를수록 은은한 멋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어와서 눈길이 새로울 건 없었다. 그런데 관심을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는 건 안 될 일이었다.
팔찌는 10년 전 공방에서 가죽 끈을 엮어 자신을 만들던 소년이 생각났다. 소년은 오색팔찌를 만들어 소녀에게 주며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을 이어주는 끈이라는 말과 함께. 그날 소녀는 집으로 오면서 팔찌를 어루만졌다. 소년의 사랑을 믿는다는 말도 했다.
그랬는데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한 며칠 뒤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르던 소녀는 직접 찾아 나섰다. 사는 집에 가보고, 같이 다녔던 장소도 가보았다. 만날 수 없었다. 지쳐서 돌아온 소녀는 팔찌를 벗어 바닥에 던지며 울부짖었다.
“사랑을 이어주는 끈이라고?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으흐흑…….:
팔찌는 소녀의 슬픔이 절절히 스몄다. 자신을 만들 때 심어진 소년의 마음은 진실인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팔찌는 소년의 진실한 사랑을 꼭 이어주고 싶었다.
“이것아, 그래서 함부로 연을 맺는 게 아녀. 진짜 인연과 스쳐가는 바람은 구분해야 하는 겨. 일가친척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라 알아볼 데도 없으니, 쯧쯧…….”
소녀의 엄마인 할머니도 애통해 했다.
“다 잊을 거예요. 잊을 거예요. 아예 콱 죽어버리고 싶어요!”
소녀가 몸부림을 쳤다.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마라.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야지. 우여곡절을 겪어도 만날 인연은 만난다더라. 기다려보자.”
할머니가 소녀를 안고 다독였다. 팔찌는 소녀가 나쁜 결정을 내릴까 봐 걱정되었다.
‘소년의 사랑은 진심이에요. 내가, 내가 그 사랑을 이어줄게요.’
그 순간 팔찌는 소녀를 향해 다짐했다. 소녀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런 날이 얼마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가만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더니 팽개쳐놓은 팔찌를 다시 팔목에 찼다.
‘그래, 꼭 잡고 가는 거야. 사랑을 이어주는 끈이라고 했잖아. 꼭 만날 거라고 믿고 기다릴래.’
그렇게 팔찌는 소녀가 리아 엄마가 되는 삶을 같이 했다.
리아 엄마는 생활비가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초대받으면 집에 일이 있다고 핑계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마음이 편치 않은지 서성거릴 때가 많았다. 그러더니 언제부터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 결혼식에는 친구의 소지품 가방을 들어주고 신경 쓸 일을 찾아서 했다. 또 친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에 조문 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르며 정성을 다했다.
그런 엄마의 성격을 닮았다면 생일파티에 빈손으로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리아는 현관문을 들어서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집은 조용했다. 리아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생일선물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았다. 팔찌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안타까웠다. 잠시 뒤에 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팔찌를 천천히 만졌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팔찌의 우려는 금세 현실이 되었다.
“미안, 난 생일파티에 가고 싶어. 엄마도 이해할 거지?”
리아는 팔찌를 벗어 주섬주섬 포장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팔찌의 외침에도 리아는 집을 나섰다.
“이럴 수는 없어. 난 할 일 있는 몸이야. 소년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걸 알려줘야 해. 그 사랑을 이어줘야 한다고! ”
팔찌는 포장지 속에서 계속 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서 와.”
가희가 반겼다. 이미 생일파티가 시작된 뒤였다. 선물 포장지가 보이고 상자도 보였다. 리아는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가희가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포장지를 열었다.
“어머나! 나 줘도 되니? 갖고 싶었는데.”
“그런 것 같아 주는 거야.”
리아가 말했다. 가희 방엔 가죽으로 만든 물건이 여럿 보였다.
“이거? 다 내가 만들었어. 가죽공예를 취미로 배우고 있거든. 그래서 오색 가죽 끈으로 만든 이 팔찌에 관심이 갔지. 특별한 느낌이 들더라.”
리아가 호기심을 보이자 설명해 주었다.
팔찌는 한순간에 바뀐 자신의 처지에 감정이 치밀었다.
“넌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애야. 엄마의 사랑을 한순간에 버리다니!”
그렇게 팔찌는 리아와 헤어졌다. 더 이상 사랑을 이어주는 끈이 될 수 없었다. 안타깝고 슬펐다. 가희는 관심을 보인 만큼 팔찌를 아끼지 않았다. 한두 번 팔목에 차더니 상자에 넣고 그만이었다. 팔찌는 상자 안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무료하게 보내는 나날에도 사랑의 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접을 수 없었다.
‘난 꼭 할 일이 있어.’
팔찌는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상자를 열고 가희가 팔찌를 꺼냈다.
“꼬임이 특별하단 말이야. 어떻게 만들었는지 봐야겠어.”
가희는 팔찌의 오색 끈을 풀려고 했다.
“어, 어어?”
팔찌는 당황스러웠다. 리아와 헤어져 할 일을 이루지 못한 것도 힘 빠지는데, 이젠 팔찌로 지낼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마. 이러지 마!”
팔찌는 애원을 했다. 그 소리를 들을 리 만무한 가희는 뾰족한 집게 핀으로 팔찌의 이음새를 뜯으려고 했다.
“어서 오게나. 잊을 만해야 찾아오고. 자네도 참 무심하네.”
그때 거실에서 가희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온 것 같았다.
“그러게 말이네. 오늘은 왠지 발길이 이리로 향했네.”
아저씨의 목소리도 들렸다.
“가희야, 뭐하니? 인사해야지.”
아빠가 가희 방문을 열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니? 많이 컸구나.”
애틋한 눈빛으로 보던 아저씨가 모자를 눌러쓰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나서 그러는구먼.”
“…….”
“그 당시 취업 준비하던 자네가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미안하네. 만날 수 있다면 속죄하며 살고 싶어.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건설현장으로 갔고. 그때 추락 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찾으려고 했어. 그런데 찾을 길이 없었네.”
바닥만 보고 말하던 아저씨가 서서히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이 커졌다.
“그거는…….”
“이거요?”
가희가 손에 들고 있던 팔찌를 가리켰다.
“그, 그래. 팔찌 말이야.”
“친구가 준 건데요,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려고 풀려던 참이었어요.”
가희가 자랑스레 말했다.
“허허, 우리 딸 솜씨가 더 늘겠구나. 우리 딸이 가죽공예에 취미가 있거든.”
가희 아빠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다.
“가희야, 그 팔찌 좀 볼 수 있니?”
아저씨는 아주 진지했다. 무슨 일인지 잠시 어리둥절하던 가희가 팔찌를 건넸다. 팔찌를 받아든 아저씨의 손이 마구 떨렸다.
“자네, 왜 그러는가?”
가희 아빠가 아저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저씨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가희야, 그 친구 말이야. 그 친구는 어떤…….”
“네, 리아라는 친군데요. 제가 갖고 싶어 하니 선물로 줬어요.”
아저씨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이 팔찌는, 이 팔찌는……. 내가 그녀에게 준 거라네.”
“이럴 수가!”
가희 아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팔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 소년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공방에서 한 소년의 말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난 우리의 삶이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 우리도 사랑 끈을 꼭 잡고 가자.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거야.”
아저씨는 팔찌를 가슴에 대고 연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럼요, 그럼요. 만날 인연은 만난다고 하잖아요. 인연의 끈을 꼭 잡고 가요.”
뜨끈한 전율이 팔찌를 오래도록 감쌌다.
출처 : 아동문예 7.8월
첫댓글 의미있는 원고 잘 읽었습니다~^^
인연은 끈끈한 끈이 되어 결국 만나게 해주었네요~~
아, 사랑이여....
진실한 사랑은 이루어지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사랑은 운명이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숙연해졌습니다.
인연에 대해서도.
아동문예에 발표한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팔찌가 들려주는 이야기, 감동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