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서>
강경애-어머니와 딸(4)
"내 생각에는 그것만은 잘 생각했다고 하였네. 이곳에 박혀 앉아 있다가는 결국은 자네만 속을 일일세."
옥이도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자기까지 공부시킬 마음을 먹었을까? 여기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붙었다. 그러나 점점 패하여 들어갈 자기네 가세 형편이 무엇보다도 감감하여졌다.
"하나 공부하기도 어려운 판에 저까지 올라가면 아주 못살게 되게요."
"하여간 가는 데까지 가보세구만. 몇 해 후에 제가 졸업을 할 터이니 그때에는 무슨 수가 나겠지."
선생도 이렇게 쓸어치고 말았으나 역시 걱정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옥이를 이곳에서 살림살이나 맡아 가지고 엄벙덤벙 지나가다 공부 없다고 차던지든지 하면 그 역시 난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선 두를 다 내세워 가지고 공부를 시킨 후 나중 문제는 자기네들끼리 해결하더라도 우선은 옥이로 하여금 여한이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일어섰다.
"자네의 한 번 생각에 달린 것일세. 몇 달 동안 꾸준히 생각해 두게."
그도 따라 문밖까지 나왔다. 높았다 낮아지는 잠자리 지처귀 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밤이 되면 옥이는 한잠도 못 잤다. 전에는 남편이 오면 낫겠거니 하고 기다렸더니, 남편이 막상 오고 보니 말 못할 새 설움이 한 가락 더해졌다.
남편 역시 번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오래오래 쏘다니다 가는 얼근히 취하여 벼락치듯 다락으로 기어 올라가서는 목을 놓고 종종 우는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옥이는 까닭도 모르고 다락 주위로 빙빙 다니다가는,
"어째 우시우?"
떨리는 손으로 다락문을 열었다.
그는 문을 쿡 닫으며,
"당신 참견할 일 아니오!"
그는 부끄러움과 노여움이 일시에 폭발이 되어 가슴을 짓 모으는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이나 발길을 돌렸다가도,
"에라! 아직 철없어 그리는 것이겠지.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고 참자!"
이렇게 중얼거리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뒷문 사이로 흐르는 차디찬 달빛은 옥의 얼굴을 한층 더 새하얗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애꿏은 뒷문을 발길로 차 던지고 발을 늘였다.
울바자 울짱과 울짱 사이로 걸린 거미줄은 달빛에 빛났다. 길같이 들어선 감탕나무, 칡넝쿨같이 엉킨 호박 줄기, 별같이 빛나는 박꽃, 이 모든 것이 고요히 잠든 듯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마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보다 훨씬 시원한 맛이 있었다.
몇 시간 후에 다락문이 열리자 남편이 셔츠 바람으로 기어 나왔다. 그는 전신에 냉수를 끼얹은 듯한 쾌감을 느끼며 부끄러움이 앞을 칵 막아쳤다.
나막신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향하여 오는 것만 같았다. 한참 후에 또 신발소리는 났다. 뒤이어 다락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최후 용기를 다하여 바라보는 순간 남편의 흰 발목이 천천히 다락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결에 우뚝 일어섰다. 미친 듯이 마루 기둥을 얼싸안고 돌아갔다.
한참이나 정신없이 돌아가던 그는 나중에는 기운이 진하여 마룻바닥에 쿵 하고 엎어졌다. 갈갈이 흩어진 삼단 같은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빛나는 그의 흰 볼이 아담스러웠다.
잠꼬대에 낑낑하던 복술이는 쿵 소리에 놀라 툭툭 털고 일어났다.
한참 후에 선뜩선뜩함을 느끼자 가만히 정신을 차려 보니 복술이가 자기 얼굴을 내려핥고 치핥으며 낑낑하였다. 순간에 흰 발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고 일어났다. 그래 복술이를 껴안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이 포플러나무 가지에 비스듬히 걸려 샐쪽샐쪽 웃는 듯하였다.
그는 머리를 푹 숙이고 복술이를 놓아주었다. 산뜻한 바람이 그의 볼을 스치자 전신이 산뜻함을 느꼈다. 그는 일어서 방으로 들어서자 매시하니 잠이 푹 들었다.
옥이가 며칠 전에 빨래질한 남편의 셔츠, 칼라, 넥타이, 양말들을 차곡차곡 얌전히 꿰맬 것을 꿰매고 하여 고리에 개어 넣었다.
"언니, 무얼 하시우?"
발을 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라보니 기순이었다.
"올라오너라. 용히 우리 집에를 오는구나. 어서 올라와."
"아무도 없지?"
"그래, 누가 우리 집에 있겠니?"
"그런데 다락은 언제 지었소?"
"요즘 지었다. 좋지?
빙긋이 웃었다. 기순이는 마루로 올라앉았다.
"언니, 숙제 다 했소?"
방으로 들어가자 책상 밑으로 갔다.
"야, 숙제가 다 무어냐, 넌 다 했겠구나."
"언니두…… 나 같은 것이 벌써 숙제를 다 했으면…… 정말 공부 잘한다고 하게? 언니 신랑도 쉬이 가겠구려?"
"글쎄 가겠지."
옥이는 밖으로 나가더니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어제 십 전어치 산 것인데 퍽 달더라."
"이제 점심 먹고 왔어요."
노란 참외를 들고 껍질을 벗긴다. 기순이는 혼자서 상긋상긋 웃더니,
"언니, 이번 숙희라는 여자 자세히 보았지?"
옥이 주는 참외 쪽을 받아든다.
"보았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선뜻하였다.
"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 들은 것 있는데 말할까 말까."
남편에 관한 것임을 직감하자 호기심에 간질간질하였다.
"말하렴."
"언니, 골 안 낼 테야?"
"왜, 무슨 말이기 그러니?"
"그만두겠소."
그리고 참외를 깨물었다. 옥이는 바짝 대어들었다.
"어서 하려무나. 조롱만 하고 마니? 내 언제 골내는 것 보았니?"
"그래두……"
그를 똑똑히 쏘아보았다. 그리고 자주 자주 밖을 내어다보았다.
"이따 저녁에나 온다. 마음 놓고 놀라우."
"언니야 뭐, 미리 알겠지."
"무슨 말인지 하려무나."
그는 음성을 낮추었다.
"숙희라는 여자의 뒤를 늘 따라다니며 매일 편지하다시피 한대. 그래서 이번도 동경서 오기는 벌써인데 서울서 따라다니느라고 그렇게 늦게 왔다두만."
말끄러미 옥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예측한 바와 비슷이 들어맞았다.
"누가 그러던?"
"언니두, 누가 그러던 것까지 내가 말할 것 같애?"
"말하면 어떠냐?"
"그래, 숙희가 이리로 왔더니 분주히 따라왔다지."
이 말에는 그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는 약간 미소를 띠워 언짢은 빛을 가리려 하였다.
"알 수 없지. 아내인 내가 눈치를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어찌 알꼬."
"그래 어느 날 몰래 떠나겠다는 소리를 들었어. 너무 따라다니는 게 귀치 않아서."
싸고 도는 옥이가 미웠다.
"숙희란 여자가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우리 그가 그렇게까지는 아니할 게다. 그건 다 너희들 수작이지."
남편을 깎아 누르는 것이 곧 싫어졌다. 기순이는 웃으며,
"보아, 저렇게 성을 내니까 내가 얼른 말할 수가 있나."
그도 따라 웃으며,
"성이 아니라 글쎄, 들을세 짐작이 아니냐."
"무얼 언니두, 너무 싸고 돌지 말아요."
그는 참외꼭지를 바구니에 던지고 나서 수건으로 입을 씻는다.
"에, 배불러."
책상을 뒤적거려 과제장을 내어놓고 벌컥벌컥 뒤져본 후 일어섰다.
"어째서 일어나니?"
"내일 과제장 가지고 와. 어디 가던 길이야."
기순이를 보낸 그는 기운 없이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생각하니 남편이 그지없이 불쌍하여졌다.
저녁을 먹고 나간 남편은 아홉시쯤 하여 뛰어 들어오자 휘휘 둘러보더니,
"기성이!"
찾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부엌으로 나가더니 새끼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서 구석구석에 놓인 고리를 끌어당겨 꽁꽁 매었다.
물끄러미 바라본 옥이는 내일이나 가려나 부다 하고 생각될 때 울음이 칵 쓸어 나왔다.
다 동인 고리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자 자전거 위에다 실어 놓았다. 그리고 다락으로 들어가 한참이나 버석버석하더니 얼른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옥씨, 난 갑니다."
뒤이어 자전거 소리가 들렸다.
옥이는 전신이 메스근해지며 정신이 까뭇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용기를 다하여 따랐다.
"어디, 어디 가셔요?"
"동경 가지요."
여름내 참았던 분이 바짝 치밀었다. 하여 남편에게 매달렸다.
"여보소, 당신 몸에 해롭습니다. 당신은 어머님의 외아들이 아닙니까."
봉준이는 사정없이 옥이를 밀쳐버리고 자전거에 올라 바퀴를 스르르 굴렸다.
옥이는 미친 듯이 그의 뒤를 따르다 기진하여 풀숲에 푹 고꾸라졌다.
4. 세 친구
재일은 늦게 일어났다. 하여 세수도 하기 전에 원선의 하숙을 찾았다. 그는 새로 깐 다다미 위에 비스듬히 책상켠을 의지하여 책을 보고 있었다. 아침 산뜻한 햇빛에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윤택해 보였다.
"여보게, 벌써 책인가?"
그는 빙긋이 웃으며 아까보다도 줄을 빨리 타내려갔다.
"그만두게, 밤낮 책만 들고……"
책을 뺏으려 하였다. 그는 책 든 손을 물리며,
"마자 보아야겠네. 잠깐만 기다리게."
재일은 후다닥 일어났다.
"가겠네."
그제야 책을 놓고 눈을 부비치고 바라보았다.
"놀다 가게나."
"아니, 나 밥 안 먹었어. 봉준 군과 놀러오게나. 재미있는 일이 있어."
어차피 잘되었다 하고 책을 들었다. 예정한 페이지까지 보고 난 그는 책을 덮고 기지개를 하였다. 그리고 어젯밤 봉준에게서 들은 말을 다시금 되풀이하여 보았다. 따라 자기의 막연한 장래가 새삼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난처한 노릇이지!"
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봉준의 처지에 있어서는 딱히 이혼하라고도 못하겠고 하지 말라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스스로 해결 짓기 전에는 제 삼자로서는 어림도 해보지 못할 것 같았다.
신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누구인지 뻔히 알고 이때껏 하던 생각은 치워버렸다.
"칩지 않은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문을 닫았다.
"앉게."
그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편지가 또 왔네그려."
팡팡한 누런 편지를 원선에게로 내쳤다. 그는 받아들었다.
"보았나?"
묻고 나서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다 보고 난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불쌍하지?
원선을 쳐다보았다. 그는 한참이나 묵묵히 있었다.
"난처하지, 세상 일이 왜 그런가?"
봉준이는 머리를 숙이며 눈물을 글썽글썽해졌다. 이런 편지를 받아쥘 때마다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옥이가 먼 발로 친족관계가 된다든지 하면 얼마나 다정할 사이일는지 몰랐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내 누님이라면 얼마나 좋겠나?"
외로운 것만큼 누님이라는 명사에 눈물이 날 만큼 감격되었다.
원선이는 봉준의 안타까워하는 모양을 바라보면서도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숙희, 오, 숙희 씨! 나는 숙희 씨가 없이는 못살 것만 같애!"
봉준의 눈은 불이 붙었다.
"너무 감상적으로 나가지 말고 이왕이면 좀 더 자네 마음을 기다려보게. 행여 나중에 사이좋은 부부가 될는지 누가 아나?"
그는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리 된다면 나는 좋겠네마는…… 어림도 없는 소리."
봉준이는 문켠을 향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네 숙희 씨와 친한 사이라지?"
"친하다는 것 보담두 그저 아는 사이지."
원선은 편지를 도로 돌렸다.
"불쌍하네, 옥씨가."
그저 아는 사이지. 이렇게 쓸어 치는 원선이가 능글능글해 보였다. 차라리 솔직히 말하여 주었으면 어떨는지 몰랐다.
"그렇게 진심으로 불쌍히 생각하나? 다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참으로 하여주게, 참으로!"
원선이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나가지 않았다.
"여러 소리 말고 재일 군한테나 가보세."
"흥! 혼자 가게나!"
그는 벌떡 일어났다. 원선이도 따라 일어났다.
"왜 또 그러나?"
봉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였다.
"자네 요새 바짝 더해졌네그려. 병원에라도 가보아야 하겠네."
근심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자네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구만. 그리 역정 낼 것이 무언가?"
봉준이도 실은 재일이를 찾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치밀리는 감정으로 인하여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하나 그의 따뜻한 손맛으로부터 절반 너머골이 풀렸던데다가 이렇게 다정스러이 말하는 것을 듣고 홱 풀리고 말았다.
"가세, 재일 군한테."
눈물 고인 눈에 웃음이 돌았다. 원선이도 따라 웃고 밖으로 나섰다.
골목을 돌아서는 봉준은,
"여보게! 저기 오는 것이 숙희 아닌가?"
손짓을 통하여 바라보았다. 조선 여학생 둘이서 가지런히 걸어갔다.
"아닐세, 원……"
숙희면서도 자기에게는 숨기는 것 같았다. 그는 분주히 앞서가서 알아보고야 안심이 되어 돌아왔다.
"아니데."
번번이 그를 의심하다가도 곧 돌리어 난처한 자기를 도리어 불쌍하게 보았다.
그들이 재일의 하숙 문을 열었을 때 첫눈에 책상 위에 놓인 파란 꽃봉투가 보였다.
그들이 앉자마자,
"편지 보게. 우리 숙희한테서 자네한테 한 것일세."
원선에게로 편지를 던졌다. 번연히 봉준이를 놀리려고 하는 줄 알면서도 다소 가슴이 울렁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정색을 하여 보였다. 재일은 슬쩍 웃으며 봉투 속으로부터 사진을 꺼냈다.
"편지 보기 싫으면 사진이나 보게."
원선에게로 내어주었다. 그는 사진을 받아 들고 한참이나 보더니,
"올해는 더 부해졌네그려."
봉준에게로 돌렸다. 그는 사진을 받아들자 얼굴이 빨개졌다.
"아내 있는 사람은 처녀의 사진이 필요치 않을걸?"
봉준은 못 들은 체하고 언제까지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숙희를 사모한 지 근 몇 해 동안에 사진이나마 이렇게 보게 되기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숙희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주시오’하고 애걸하다시피한 구절이 생각키우며 눈물이 핑 돌았다.
"허, 남의 처녀 사진을 보고 울면 쓰나, 이리 내게!"
봉준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았다. 원선이는 재일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까짓 사진이 무엇하는 건가, 자네도 그만해 두게!"
그는 사진을 빼앗아서 봉준에게로 던졌다.
"옛네! 실물은 마음대로 못 보나 그래 사진이나 못 가져 보겠나."
성이 날 줄 알았던 재일은 허허 웃었다.
"매우들 잘 논다. 상당한 극일세그려. 응 자네들도 배우 노릇 상당히 하겠네."
눈을 슴벅슴벅하였다. 그들도 따라 웃었다.
재일은 눈을 실쭉하니 뜨고,
"자네, 그 사진 가지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어. 중매를 해달라는 말이야. 중매하겠나, 못 하겠나? 말하게."
"나 같은 것이 중매자의 자격이 있는가?"
"어, 없다면 사진 도루 내게. 소용이 무어람. 자네가 총각이니 연애할 생각을 감히 먹어 보겠나, 어떤 이유하에서 가지느냐 말이야? 단단히 대답하게. 그렇지 않으면 사진 내놔!"
그는 눈을 딱 부릅뜨고 대들었다. 봉준이도 처음에는 웃는 소리거니 하고 사진 있는 것만 기뻐하였으나 그가 이유를 붙여 가며 대어드는 것을 보니 가슴이 멍청해졌다.
이 꼴을 본 원선이는,
"자네 누이가 그렇게 시집가고 싶어 등이 달았다면 내 중매하지."
그의 말문을 막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다.
"응 자네가 중매하겠어?"
봉준에게서 사진을 빼앗았다.
"옛네. 자네가 중매하겠다지? 이 사진 가지겠다는 말이야? 응, 옳지. 자네는 총각이니 만치 아조 가지고 말게나. 총각이 처녀의 사진 가지는 것만큼 떳떳한 일이지. 거리에 나가서 지나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말이야. 봉준 군도 잘 생각해 보게. 원선 군한테 온 사진을 왜 자네가 어림없이 가지겠다는 말이야? 그렇지 않아? 응?"
그는 돌아앉았다.
"살아가면 별꼴들 다 보겠네. 언제는 사진 청해 달라고 매일 조르다시피 하더니 막상 부쳐오니 시치미를 떼어! 이거 뭐 누구를 놀리는 셈인가, 어쩐 일이야!"
원선이를 노려보았다. 그는 웃으며,
"쓸데없는 소리 말아, 자네는 너무 허튼소리 해서 재미없데."
봉준이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가겠네."
벌컥 일어났다. 그의 가슴은 무섭게 떨렸다. 그리하여 벼락같이 문을 열었다.
"제 이막! 어때?"
원선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 왜 그 모양이야. 가뜩이나 요새는 신경병으로 고민하는 판에 위로는 못하나 그렇게 지나치게 놀린담. 아주 재미없어! 후일에는 그런 일 말게, 여보게!"
"아침에 내가 무어라든가? 재미나는 일이 있다고 했지? 그 좀 재미있나? 그래 심심한데 더러 농삼아 그리면 어떻다는 말인가?"
"아 글쎄. 성한 사람 같은면야 무슨 일 있겠나마는 봉준 군은 병자니만큼 삼가 달라는 말일세."
원선은 일어났다. 재일도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한참이나 말없이 섰던 원선이는 돌아보았다.
"봉준 군이 아모래도 이혼은 해놓을 것이니까 숙희 씨에게 권고하여 보게. 자네도 보는 바라 어디 되겠나? 점점 더하여 가니."
"글쎄 딱하기는 하지만 그 애가 말을 들어주어야지.’
"물어는 보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도 해볼 것 같이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낸 것이라,
"응, 한 번 붙여보았네."
재일은 어느덧 앞섰다. 그의 다리 마디는 길쭉길쭉하여 언제나 겅중겅중거려서 남보다 훨씬 앞서 걸었다.
"장래성 있는 청년일세, 봉준 군이. 두고 보면 자연 알 것이니까 어쨌든 힘써 보게."
"참말인가?"
"여보게, 자네처럼 극이나 꾸밀 줄은 모르네."
"응, 좋은 친구야, 봉준 군이."
아까 문 차고 나가던 꼴을 생각하고 빙글빙글 웃었다.
앞으로 지나가는 여학생을 보고,
"스타일 좋다!"
하고 웃었다.
5. 짝사랑
모 여학교 이년급 시험을 치르고 난 옥이는 낙제냐 급제냐의 두 의문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주인집 학생이 나왔다.
"어제 같이 오셨던 이가 누구야요?"
옥의 곁으로 앉았다. 입 속으로,
"남편이야요."
"네."
"그 학교서 낙제가 된다면 다른 학교에 가서 시험 쳐 볼 수도 있겠지요?"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붙으시겠지요. 염려 마세요."
"저 같은 것이 어찌 붙기를 바라겠습니까?"
문편을 향하여 바라보았다.
"왜 일학년 시험을 치루어 보시지요, 아무래도 좀……"
이 말을 듣자 더욱 안타까왔다. 차라리 이 학생의 말과 같이 일년급 시험을 보았더면 하는 후회가 났다.
"글쎄요."
만일 낙제가 되면 무엇보다도 남편 보기가 난처하였다.‘어쩔까?’낙제만 되었다면 두말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 해 더 배워 가지고 오지!’ 겨우 이렇게 가라앉혔다. 그러나 가슴이 울울하였다.
"일본 가서 공부하신다지요?"
"네."
"무슨 학교야요?"
그는 한참 생각하였다.
"와세다라든지요?"
옥의 얼굴은 빨개졌다. 얼마나 똑똑하면 남편 다니는 학교 이름도 자세히 모르나 할 것 같았다.
"네"
대답하는 소리를 듣자 안심되었다. 어쩐지 자기 입으로 학교명을 부르고 나니 별로 서투르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도 많두먼요."
"글쎄요."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세 분인가 네 분인가 욱욱 밀려왔더군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중에 내 동무 숙희 오빠도 오구요."
그는 가슴이 찌끈하였다. 벌써 우리 그가 숙희를 따라다니는 줄 이곳서도 아는가? 그리하여 내 속을 떠보느라고 저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는 다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지마는 이 말 끝에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숙희 아셔요?"
"몰라요."
"연희는 아시겠지요? 같은 고향이라지요?"
"네. 말은 못해 봤어도 낯만은 여러 번 보았지요."
"숙희도 늘 놀러가던데요, 방학 때면."
"글쎄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요리조리 묻는 것이 귀찮았다.
구둣소리가 나자 방문이 열렸다. 영실은 얼른 일어났다. 그리하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봉준이는 마루 구석에 피하여 섰다가 방으로 들어섰다. 옥이는 잠잠히 일어섰다.
"평안히 주무셨소?"
이렇게 묻고 나서 신문지 속에 들어 있는 노랑 구두를 꺼냈다.
"신어 보시오."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그리고 발 내놓을 것이 무엇보다도 난처하였다. 그는 포켓에서 살색 양말을 꺼냈다.
"이것 신고 신어 보시오."
그의 얼굴은 빨개졌다.
"어서 신어 봐요."
"후일 신지요."
"공연한 소리만 하는구려."
봉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속으로 ‘시골 여자는 할 수 없어’하였다.
그는 남편의 좋지 못한 기색을 보고는 그만 아무 말 없이 돌아앉아서 양말을 신었다. 봉준은 양말대님을 내어주었다.
"다 신었소? 자."
구두를 들어 옥의 발에다 신겨주었다.
"일어나 보시오"
그는 아찔해지며 방안이 휭 돌아 겨우 바람벽을 의지하여 일어났다. 한참이나 들여다본 그는 웃음을 띠우고,
"됐소이다. 제법 여학생이구려."
"그러고 학교에 갈 때에나 안 갈 때에나 저 분(粉) 발라요 크림도 베니도네, 그래야 합니다."
책상 위에 벌여 놓아 준 분병들을 가리켰다.
처음으로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는 그는 너무 지나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고 저녁에 우리 친구 몇몇을 데리고 올 테야요. 우물쭈물하지 말고 묻는 대답도 얼른얼른 해요, 네? 오늘 분 안 발랐구려. 저녁 먹고 세수하고 분 바르시오, 네."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옥은 확확 다는 그의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내 말대로 하시오."
이렇게 재삼 다지고 나서 일어섰다. 그는 따라 일어서서 그의 뒷맵시를 바라보며‘나도 남편이 있구나!’ 이렇게 부르짖었다.
뒤이어 영실이가 웃음을 띠우고 들어왔다.
"무얼 다 사오셌어요?"
책상 아래 놓인 구두를 들고 들여다보았다.
"구두 사오셌소, 벌써부터……"
요리조리 굽어보더니,
"꼭 맞아요?"
"네."
옥의 기뻐하는 것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영실 어머니도 웃으며 들어왔다.
"아이구머니, 곱구먼요."
딸이 주는 구두를 받아들고 보았다.
"얼마 주었대요?"
"글쎄요, 자세히 묻지 못했어요."
그들의 부러워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앞에 놓인 구두를 볼 때 눈물이 날 만큼 감격되었다.
그는 속으로 ‘어머니도 기뻐해 주세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남편의 말을 외우고 있던 그는 저녁 먹기 전에 새로 사온 향내 나는 비누로 말끔히 얼굴을 씻은 후 곱게 곱게 단장을 하고 저녁상을 받았다.
밥상을 들고 나온 영실이는 피어오르는 듯한 그의 맑고 웃는 듯한 얼굴에 도취되어 몇 번이나 그를 쳐다보고 마음속 깊이 부러워하였다. 과연 남편의 사랑을 받은 만하다 하는 것을 당장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부부의 짝은 기울지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부럽게 생각하였다.
"같이 잡숩시다."
밥깨를 여는 그는 영실이를 쳐다보았다.
"어서 먼저 자셔요."
밥상으로부터 가는 김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밥상을 물린 그는 어떤 불안에 잠긴 사람 모양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불이 반짝 커졌다. 그는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만히 일어나서 마루로 나왔다.
변소간으로 나오는 영실은,
"우리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옥이는 방문턱에서 기웃기웃하여 아무 거리낌 없을 것을 알고 들어섰다. 향하여 바른편 쪽으로 책상이 놓이고 왼편으로 고리짝 두 개가 겹놓였을 뿐 별다른 가구를 발견치 못하였다.
"앉으세요."
주인마누라는 웃음으로 대하여 주었다.
대문소리가 나자 구둣소리가 거푸 들렸다. 옥이는 숨을 죽이고 두 귀밑이 화끈 달았다. 무엇보다도 그들과 서로 인사할 것이 난처하였다.
가만히 듣던 영실은,
"여러 사람이 오나 봐요."
방문 여는 소리가 나자 이쪽으로 향하여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 안 들어왔나요?"
영실 어머니는 문을 열었다.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아니요, 좋습니다. 여보, 어서 나오시오."
옥이는 난처하였다. 봉준은 전등불 아래 부끄러움을 먹고 앉았는 그를 바라볼 때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쁨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어서 빨리 그들 앞에 보이어 자랑하고 싶었다. 언제나 아내인 옥이를 대할 때에는 친구나 같은 그런 느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서 나와요!"
그는 마지못하여 일어는 섰지만 건넌방까지 갈 것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맞방망이를 치고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하였다.
"학생도 같이 가면……"
영실을 내려다보았다. 영실 어머니는,
"그럼, 너도 동무해서 잠깐 갔다오너라."
말이 끝나자 영실은,
"그럼 먼저 나가세요."
옥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도로 앉았다.
"같이 가요."
이 꼴을 본 봉준이는,
"그럼, 같이 나오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건너방으로 갔다. 영실은 책상을 마주 안고 화장을 시작하였다
"부끄럽지요?"
옥이를 바라보며 영실 어머니는 웃었다.
"처음이니까요."
머리를 숙였다.
화장을 마친 영실은 새 옷을 갈아입고 앞장섰다. 옥이는 죽으러 가는 소 모양으로 안타깝게 떨렸다.
영실은 조심성스럽게 문을 열었다. 봉준은 벌컥 일어났다.
"들어오십시오."
"오셨습니까."
재일을 향하여 머리 숙여 보였다. 그들의 눈은 일시에 옥에게로 쏠렸다. 옥이는 가만히 영실 옆에 앉았다.
봉준이는 차례로 소개하였다. 옥이는 머리 숙여 그들에게 보였다.
"자네들, 왜 이리 점잖은가?"
이 방안의 인기가 옥에게로 쏠림을 알자 그는 견딜 수 없이 기뻤다. 그는 빙글빙글 웃었다.
"집 주인부터 점잖으니……"
재일은 봉준이를 보았다.
원선이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재일의 어깨로 한쪽 눈을 가리고 옥이를 뜯어보았다. 눈, 코, 입술, 살빛, 몸집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양미간을 약간 찡긴 것을 보아 그의 쓰라린 과거를 알리웠다.
몇 해를 두고 의문의 주인공인 옥이는 이름과 같은 옥(玉) 같은 여자였다. 그는 스르르 눈을 감고 옥이 쓴 편지 일절을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봉준이가 곧장 부러워졌다.
"숙희도 데리고 오시지요, 왜?"
봉준이와 옥이는 일시에 가슴이 찌르르하였다.
"왜 모시고 오지?"
봉준이는 동을 달았다.
"잊었습니다. 후일에는 같이 오지요. 옥씨도 사랑해 주십시오."
어느 좌석에서나 빈정대는 그가 갑자기 여기서만은 점잔을 빼었다.
"당신, 집에 온 손님들을 대접할 줄도 모르시오?"
봉준은 웃는 눈으로 옥이를 보았다.
"그런 소리 말게. 우리가 경성 사는 것만큼 주인은 우리들이 아닌가, 여보게."
원선이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은 벌써 조으네. 그럼 어디로든지 가십시다."
휘 둘러보았다.
봉준은 속으로 ‘이놈이 벌써 미쳤나’ 하면 일종의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나가십시다. 처음이니만큼 구경도 하시구요."
재일은 옥이를 보았다.
재일의 꼴을 본 영실은 더 앉았기가 퍽 괴로웠다. 그리하여 살짝 일어났다. 옥이는 그의 치마 귀를 맘껏 잡았다.
"놓으세요."
그들은 영실을 보았다.
"앉으셔요."
뒤를 이어 이런 말이 거푸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뿌리치고 나갔다. 혼자 된 옥이는 아까보다 더 안타깝고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원선은 재일을 꾹 찔렀다.
"가세."
옥의 모양을 보고 더 앉았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일은 밑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옥의 수줍어하는 것을 볼수록 더한층 아리따웠다.
"어디로 갈까."
재일은 일어나는 원선이를 쳐다보았다.
"일어나게나, 어디로 가든지."
그는 문밖으로 나섰다. 재일과 봉준이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든지 밑자리는 제일 무거웠는데 오늘은 웬일이야?"
봉준이는 문밖을 나서자 원선이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재일이는 방문을 배움히 열고,
"안녕히 지무십시오."
옥이는 머리를 숙인 채 일어섰다.
대문 밖을 나서자 재일은 봉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과연 드문 미인인걸!"
"그럴까? 하지만 숙희씨만은 못하지 않어."
"허, 미친 말이야. 못한 게 무언가? 그렇게 미치더람 한 번 말해 볼까, 숙희에게?"
봉준은 앞이 캄캄하도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때가 그의 다만 한때인 기회같이 생각되었다.
<계속>
첫댓글 좋은 자료 주심에 댓글로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