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5
9월19일[연중 제2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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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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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e6FAhX-A-4
[서울대교구 이승화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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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상처나 흠결, 과오나 흑역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 그 흠결이나 과오가 너무 깊고 커서 걱정합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내가 과연 주님 나라에 합당하기나 할까?
그런데 요즘 와서 드는 생각,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너무나 깊이 아로새겨져 문신처럼 사라지지 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나의 결핍과 약점을 상기시키기에 나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나를 하느님과 만남에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온 한 가련한 여인, 상처로 늘 아파하고 갈등하고 한평생 주눅들어 살아온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덕분에 너무도 당당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나빴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그 여인은 오랜 방황과 악순환의 세월을 접어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어느새 과거의 비참함에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여인의 머릿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큰 걱정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내가 변화될 수 있으려나?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토록 불가능해 보이던 여인의 회개는 결국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당신 자비로 아물게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완전히 치유받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여인은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찾아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이었습니다. 당시 꽤 값나가던 물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에게 있어 전 재산과 다름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가져온 여인은 회개의 표시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냅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은 지상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봉사는 더이상 극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용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렇게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위주로,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오늘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된 여인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여인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토록 비참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전환기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매일 망가지고 깨져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뻐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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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IH0ESj-x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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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용서받아서 많이 사랑한다면, 많이 사랑받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는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고 머리로 닦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덜 탕감받은 사람보다 탕감해준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많이 지어서 더 많은 죄를 탕감받아야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바리사이인 시몬은 억울합니다. 사실 모태 신앙인이어서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기가 그리 어려운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랑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이 사랑받으려면 많이 용서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이 용서받지 못하면 많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복지법인 들꽃마을 창설자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던 최영배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들꽃마을 후원회 전담)가 2024년 5월 20일 병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 신부는 생전 ‘부랑인의 대부’, ‘장애인의 벗’으로 불렸고 40년 가까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리스도의 사명을 몸소 실천했던 ‘천사 같은 사제’였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과 장애인들과 범죄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마음이 커야 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참아낼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 어떤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천사처럼 사는 분이라 성당에서도 천사란 별명을 지닌 분이신데, 요즘에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10년 전 자기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사람을 10년 만에 길가에서 보고는 온몸이 마비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자신은 천사라 다 용서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런 나쁜 마음이 생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사람 모든 마음에 악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가라앉아 있는 오물과 같아서 그 물병이 쓰러지기만 하면 병 안의 모든 물을 더럽힙니다. 자매님이 천사로 불렸던 것은 지금까지 그 오물이 가라앉아 있기만 했을 뿐입니다.”
또 어느 날 한 남자분이 외도하다가 들켜서 간통죄로 6개월을 복역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용서해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데 천사처럼 아름답게 꾸민 자매가 잠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내려오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는 얼굴이 마귀처럼 변하여 욕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자기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았는데 이런 창피한 고통을 준다고 빨리 이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교사였는데 어떻게 교사 입에서 그런 말과 표정이 나오는지 모르겠고, 남편은 기가 죽어서 계속 무릎을 꿇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눈에는 그 자매가 마귀처럼 보였고 형제가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아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부님이 신학생 때 직접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도 도와주는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기도 중 가슴 속에서 수많은 구더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들이 당신 안에 잠재되어있던 죄들이었음을 알고는 5년 동안 밤마다 방에서 울었습니다. 5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몸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품을 받고 첫 미사 때 바로 교도소로 달려가셨습니다. 남자 4백 명, 여자 2백 명이 넘는 복역자들에게 자신도 똑같은 죄인인데 자신은 들키지만 않았을 뿐, 그래서 천사처럼 제의를 입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들켜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차이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미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든 분이 신부님과 함께 울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교만, 성욕, 욕심이라는 세 가지 죄를 누구나 다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고 누구는 터뜨릴 뿐이지, 같은 죄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 용서받읍시다. 내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님께 청합시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저도 제가 바리사이였지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한 마디로 무너졌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한순간이라도 감사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죄입니다.
자녀를 부모만큼 용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모처럼 사랑받기 위해 모든 이를 자녀처럼 용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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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4일에 성가대에서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습니다. 합창곡으로 ‘바람의 노래와 다시 살아나신 주’를 준비하였고, 9명의 단원이 독창을 준비하였습니다. 합창이 멋진 화음과 넘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면, 독창은 내면의 깊이와 영혼의 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악을 전공한 지휘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잘 따르는 단원들이 만들어낸 ‘한 여름 밤의 작은 음악회’였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행성이 빛을 내듯이, 지휘자를 중심으로 9명의 단원이 위로와 용기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그날 ‘임마누엘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19명의 어린이가 고운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아모르 성가대가 현재의 빛이라면, 임마누엘 어린이 합창단은 미래의 빛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가대가 아름다운 노래로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면 그것 또한 복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뜻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가져오는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승리한 전쟁으로 평화가 지켜지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냉랭하던 여인이 마침내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마음 졸이던 남자에게 복음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이의 울음도 엄마에게는 복음입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다가온 제대의 날은 복음입니다. 서류 미비자에게 마침내 주어지는 그린카드는 복음입니다.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깨어난 환자의 미소는 가족들에게 복음입니다. 제게도 복음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벽보에 쓰여 있던 저의 이름이 복음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합격했음을 알리는 이름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이 복음일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3가지 의미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바오로 사도가 선포한 복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는 것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것,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참된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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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36-50: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 바리사이의 집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회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37절), 그 여자는 예수께서 바리사이의 집, 즉 회당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아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땀에 젖은 채 식사 중인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 드린다.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39절)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43절) 채권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밖에서도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셔서는 더 큰 기적을 행하셨다. 밖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쳐 주셨지만, 안에서는 병든 영혼을 고쳐 주셨다. 밖에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고, 안에서는 죄 많은 여자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그러나 눈먼 바리사이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교회만이 신부처럼 신랑에게 입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이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여자는 깊숙이 감추었던 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여인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조에서 그를 해방해 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절) 이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다운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동시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셨다.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49절) 말한다. 용서는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온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7절) 하신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라고 한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꾸미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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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어제 독서에서 보았던 것을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소란한 꽹과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실천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무엇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거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실천한 율법과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면 그의 집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발을 닦아 드린 여자는 선행도 공로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많이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남아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죄가 사라지고 나면, 예수님께 보여 드린 그 사랑은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라는 말씀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큰 사랑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지 않고,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 순전히 인간 자신에게서 시작된다면 그 사랑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업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출발점은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사랑하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 지금의 자신이 되었고 복음을 선포하였으며 신자들이 자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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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48-50)
1) 47절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감사’를 뜻하기도 하고, ‘회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회개’ 쪽이 더 비중이 큽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로 번역하면,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회개한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로 번역하면, “크게 회개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용서가 먼저인가? 회개가 먼저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교리대로 말하면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이고,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진심으로 회개하기 전에는 이미 주어져 있는 용서의 은총을 실감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회개할 때 비로소 그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용서받고 싶으면 회개해라.”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2)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로 드러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회개’로 드러납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나도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는 방법도 회개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는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회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죄가 없다면 용서를 청할 일이 없을 것이고,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거짓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 용서를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십자가 은총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시키는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속 사업을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 되어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3) 47절의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과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주님의 용서에 차별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용서의 은총’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차별과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서로 드러나는 주님의 사랑에도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한다.(믿는다.)”로,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은,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믿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똑같은 은총이 주어져도, 사람에 따라서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지은 죄가 크거나 작거나, 또는 많거나 적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깊이 감사드리고 더욱더 회개하는 생활을 할 것이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드리고, 그만큼 회개도 적게 할 것이고, 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드리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께 서운하다고 항의하거나 불평할 것입니다. <그런 차이는 왜 생길까? 신심의 차이일까? 수양의 차이일까? 성품의 차이일까? 알 수 없습니다.>
4) 온 세상에 똑같이 밝은 햇빛이 비쳐도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해를 등지고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햇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둡기만 하다고, 그림자밖에 안 보인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햇빛을 받고 싶다면 해를 향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향해서’(또는 ‘주님의 사랑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돌아선 다음에는 자만하지 않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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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죄인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집, 죄인을 극도로 꺼리는 바리사이의 식탁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발을 닦는 여인의 눈물은 바리사이와 죄인을 갈라놓는 단단한 벽을 허물어뜨립니다.
루카 복음의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을 비롯한 다른 복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의 다른 점은 예수님의 장례가 아닌 죄의 용서에 대한 응답으로서 여인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께 다가서는 여인은 겸손이나 자기 비하 또는 속죄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기쁨에 휩싸여 있습니다.
죄는 불안을 가져옵니다. 죄는 고유한 삶을 망가뜨리고 주위의 눈치를 보게 하며, 끝내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 삶의 경험이자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어떠한지요? 어찌하면 용서받고 살아갈까요? 여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복음은 여인이 어떤 행동으로 용서받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용서받은 모습으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오늘 복음은 죄를 짊어지고 사느라 반성과 참회로 주눅 든 수동적 자세를 질타합니다. 반성과 참회가 이미 용서받은 것일 수 있음을, 그 반성과 참회가 감사와 찬미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듯합니다. 반성은 주눅 든 자기 비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설계하려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극복하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에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만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일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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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님]
<참회와 용서>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죄인인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죄인이라 불렸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마을에서 죄인이라고 불린 여인임은 분명합니다. 그 여인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가장 불편한 장소로 찾아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죄인 취급을 하면서 멸시하는 바리사이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길래, 그 따가운 눈총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그 값비싼 향유를 발라드렸을까요?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삶의 모든 것이 바뀔 정도의 영향을 받은 여인이었을 것이고, 그분을 간절하게 만나고자 했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용서를 청하는 것조차 죄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의 변화를 체험하게 한 예수님께 모든 것이 집중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변의 그 어떤 부정적 시선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들어 왔을 테니까요.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짧고 강렬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7.48)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체험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주었던 참된 회개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생겨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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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루카 복음이 전하는 죄 많은 여인이 막달래나 마리아일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리 개연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자매이자,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 넘는 나르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다고 전합니다.(요한12.1-8)
마태오 복음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이 아닌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전합니다. (마태오26.6-13) 이야기의 중복성을 볼 때, 한 여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편집 과정에서 복음에 따라 달라진 것일 수도 있고, 각기 다른 사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성서학자들이 밝혀야 할 일입니다.
한 가지 참고로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300데나리온 정도였다 하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평균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 금액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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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며, 많게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합니다.”(7,47)
손님을 초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손님을 초대할 때는 그 나름대로 초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초대한 손님에 대한 예의와 환대의 마음과 함께 정성이 담긴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초대받은 손님도 그 집에 머물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지 준비한 음식이 풍성하고 화려하지 않더라도 초대한 분의 마음이 담긴 정갈한 음식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무대는 바로 바리사이 시몬의 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의 초대 이유가 드러나 있지 않았으며, 초대한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관습, 예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즉, 주인은 손님을 마중하여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를 기원하는 입맞춤을 하고, 길을 걸어오면서 먼지로 더러워진 발에 물을 부어 씻겨주어야 하며, 약간의 향료를 분향하든가 향유 한 방울을 손님의 머리 위에 부어 발라주어야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몬이 예수님을 손님으로 초대한 의도란, 단지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함으로써 타인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돌연히 나타난 죄인인 여자, 행실이 나쁜 죄 많은 여자가 시몬의 집에 들어와서 시몬이 미쳐 행하지 않은 역할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것을 본 시몬은 당황스럽고 황당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심기가 표출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이미 간파한 것처럼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도 그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은, 겉으론 예수님께 대한 호의를 가진 듯 보였지만, 내심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숨은 의도가 드러난 것은 많은 사람, 남정네들만이 모인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사람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죄 많은 여인의 등장과 그녀의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부끄러움 내지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아니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7,38)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있는 어떤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은 행동을 그녀는 애정과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녀가 이전에 예수님에게서 어떤 은혜를 입었고, 어떤 치유를 받았는지, 또 어떤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아니면 그녀가 이런 행위를 통해서 어떤 죄를 용서받고자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부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 여자는 참으로 대단히 위험스럽고 파격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을 보면서 가장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사람은 아마도 집주인인 시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집 주인인 시몬의 마음은 결코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며 불편한 심사로 좌불안석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때 시몬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하였다.”(7,39) 얼마나 미묘한 표현입니까? 시몬의 내심을 꿰뚫어 보듯이 그가 자신에게 향한 심정을 넋두리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통회하고, 오직 주님의 자비로운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기며 다만 낮아지고 비워버린 마음만을 보고서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만이 아니라 투정하는 큰아들을 용서하시고 마음을 달래주신 것처럼, 시몬의 불편한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시몬을 꾸짖거나 야단을 치시기보다 에둘러 채무자와 채권자의 비유(7,41~42)를 들려주시고 세세하게 그와 그녀의 당신에 대한 상반된 행위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예우이며 배려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여전히 예수님과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 자신 스스로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선한 사람이다, 라고 자부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입으로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지만, 마음은 전혀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가 아쉽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그 여인이 예수님께 한 행위는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믿기에, 그 여자의 사랑어린 행위를 예수님도 아무 망설임 없이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응답으로 예수님은 그녀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라고 위로하십니다. 사실 이 지상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분명 하느님께 속함을 바리사이들도 알기에, 그 여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7,49)라고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내심으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7,5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누구든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며, 많게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합니다.”(7,47)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입증되었으며, 우리 역시 그 여인처럼 주님으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받았으니 큰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며, 많게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합니다.”(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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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사무처장 신부님께서 학교 운동장을 잔디 구장으로 만들 것이니 신학생들 모두 나와서 잔디를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뻤습니다. 지금까지 흙으로 된 운동장이라 미끄러져서 많이 다쳤고, 무엇보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잔디 운동장에서 축구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며칠 동안 매일 저녁 식사 후 모든 신학생이 운동장에 나와 잔디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 심고 나서는 잔디 보호를 위해 한동안 운동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생이 제일 많이 하는 그리고 인기 있는 운동은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을 찰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겠습니까? 결국 그냥 축구하라는 허락과 함께, 꿈에 그리던 잔디 구장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학생을 위한 잔디 구장이지, 잔디 구장을 위한 신학생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도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미래에 잘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학업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정치인의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제발 뽑아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각종 비리로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성당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누구 때문에 성당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뜻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분명히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만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른 죄인인 여자를 보고서는 사랑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잃고 나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른 여자는 끝까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놓지 않습니다. 주님께 큰 사랑을 드러낸 여자는 예수님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을 향한 사랑은 믿음을 통해서 커질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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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어떤 죄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다’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라도 용서받을 권한이 있고, 용서를 받으면 그도 사랑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야말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습니다.”
동네에서 행실이 몹시 나쁜 여인이라고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 용서를 청하는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은 여인의 참회 행위와 회개를 보지 않고, 과거의 잘못에만 비중을 두었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고 여인의 과거 잘못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잡는 그녀의 손짓 하나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인의 접촉을 부정을 타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 여인은 마땅히 심판과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난을 받아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나쁜 행실을 알고 있고, 주변 사람들이 그 여인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모든 참회 행위를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시며 여인의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매여 미래를 막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빌미로 한 사람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용서와 사랑으로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밝혀줍니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일에 연연하고 집착하면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큰 사랑은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가져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모두를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의 법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야 합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저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주님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물로 누벼놓는 하루를 주님의 자비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시는 일에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기억을 잃어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십니다.... 하느님께는 어떤 죄도 마지막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법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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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초대하시는 분>
루카 7,36-50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
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초대하시는 분>
“이 여자를 보아라.”(루카 7,44)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과
한 식탁에
초대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의
눈길을 피해
초대받으신 분의 뒤쪽에
초대받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초대한 이의
매서운 눈초리와
초대받은 이들의
서늘하고 무덤덤한 눈길에
아랑곳없이
아무에게도
초대받을 수 없는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초대한 이와
초대받은 이들과
한데 어울리시는 듯
홀로 계시는
초대받으신 분과
오롯이 함께하려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는
초대받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초대한 이는
초대받으신 분에 가린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초대하지 않은 이가
거슬립니다
초대한 이는
초대하지 않은 이 앞의
따뜻하고 든든한 울타리 같은
초대받으신 분이
못마땅합니다
초대받으신 분은
당신 앞에서
당신을 보면서도
결코 당신을 보지 못하는
초대한 이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보네십니다
초대받으신 분은
당신 뒤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면서도
참으로 당신을 보고 있는
초대받지 못한 이에게
오롯한 마음을 건네십니다
초대받으신 분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초대받지 못한 이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당신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초대받으신 분은
당신이 그러하시듯
초대받지 못한 이를
품으라고
당신을 초대한 이를
초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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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의로운 바리사이 시몬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이 있습니다. 비록 죄에 자신을 더럽혔지만 더 이상 죄의 나락에 뒹굴고 싶지 않은 다시금 선하게 거듭나고픈 거룩하고 아름다운 죄인입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죄의 무게에 고개를 숙이고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람의 가장 밑바닥 가장 더러운 부분인 발에 입을 맞춥니다. 참회의 눈물로 사람의 발을 적시고 고운 머리카락으로 적신 발을 닦으며, 귀한 향유를 발라 곱게 문지릅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행위를 통해서 죄를 지은 여인은 죄로 물든 자신의 더러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다시 깨끗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낯선 여인의 기이한 행동에 모든 것을 내맡기십니다. 흙투성이 발에 입을 맞추지 말라고, 가녀린 머리카락을 함부로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비싼 향유를 더러운 발을 적시는데 낭비하지 말라고 만류하지 않으십니다. 복음 선포의 험난한 여정으로 지친 당신의 발을 따뜻이 적시는 속죄의 간절한 마음이 가득 배인 여인의 눈물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죄인의 단 한 가지 바람을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편안히 가거라.”
의로운 바리사이, 시몬이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나름 의로울 따름입니다. 스스로 의로우니 용서받을 일도, 용서를 청할 일도 없다고 내심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으로서 죄인은 가차 없이 단죄 받아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정의에 반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참회함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 선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 여인이 있습니다. 참회하는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새 삶을 선물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참회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음으로써, 여전히 스스로 의로움에 도취되어 ‘함께’라는 참 삶을 거부하고, ‘홀로’ 서서히 거대한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바리사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여러분 주위에 누가 있습니까? 참회하는 죄인, 스스로 의로운 바리사이, 용서하시는 예수님, 여러분 주위에 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참회하는 죄인, 스스로 의로운 바리사이, 용서하시는 예수님 가운데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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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이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영광을 입습니다. 죄 많은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앞쪽에 나서지도 못하고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간직한 가장 고귀한 머리카락으로 땅에 붙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발에 당신 입을 맞추고 그 발에 자신의 전부를 쪼개어 부수고 깨뜨려 그 발에 붓고 발라드렸습니다.
하여, 그 옥함의 사랑의 향기는 온 집안 온 고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이 ‘죄 많은 여인’을 교회에 비유합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 말고는 누구도 그런 향유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교회가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루가복음 해설)
이러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의 아름다움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향기를 뿜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죄 많은 여인’(교회)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그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죄 많은 여인’인 교회는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는데, 아직 내가 그 사랑을 보지 못함은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일입니다.
내내토록 찬미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그 향 되어 날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향기가 되어 세상에 뿜으시길 바랍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의 불순한 입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깨뜨려 형제들의 발에 입 맞추는 사랑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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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주님!
제 영혼의 막힌 코를 뚫으소서!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듯 제 온몸에 쏟아지는 숨 가쁜 당신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저를 부수어 진한 향기의 피가 흐르게 하고 부서질수록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온 집안에 베인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를 내내토록 찬미하게 하소서.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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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
-참회, 용서, 사랑-
“주님, 당신의 은총을 어서 입게 하옵소서, 당신께 의지하는 이 몸이오다.”(시편 143,8ㄱ)
모두에 선행하는 은총이요 모두가 은총입니다. 회개의 은총입니다. 참된 회개의 표지가 참된 겸손,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회개의 표지가 참된 지혜, 참된 감사,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회개 자체가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잠시 교황님 인터넷 홈페이지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일반알현후 삼종기도후에는 최근의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사목여정중 소감을 밝혔습니다. 얼마나 교황님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물한 여정인지 깨닫습니다.
“나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살아 있는, 기쁨 가득한 믿음을 보았다!”
“이들 교회는 ‘개종(by proselytizing)’이 아니라, ‘매력(by attraction)에 의해 성장하고 있다.”
“믿음, 형제애, 연민은 인도네시아 방문의 모토였다”
“무엇보다, 나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다. 시련중에도 기쁨이 넘쳤고, 고통중에도 지혜로웠다. 많은 아이를 낳은 사람들일뿐 아니라, 이들에게 웃음(미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아이들의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이어 제39차 세계 젊은이들의 날을 맞이한 메시지도 고무적이었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라, 그러면 지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 강론 주제는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입니다. 윗 말마디들은 우리 삶의 여정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여정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죄많은 여자의 참회 과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죄녀의 참회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와 사랑을 매우 겸손하게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과의 대화가 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깨닫게 합니다. 시몬과 대조하여 죄녀의 ‘회개의 표지’인 환대를 예로 듭니다. 둘의 예수님 환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 주었다.”
그대로 죄많은 여자의 온맘을 다한 참회의 구체적 표현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죄녀가 회개하기에 앞서 회개 은총이 선행했음을 봅니다. 참회와 용서의 결과 이런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많아서 용서가 아니라 참회와 용서에 대한 감사에서 샘솟는 주님 향한 사랑입니다. 회개와 용서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회개의 여정과 더불어 끊임없이 용서받음으로 겸손과 사랑은 날로 증대됩니다.
정말 날로 겸손해지고 사랑이 많아지는 사람들은 바로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께 끊임없는 용서를 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회개의 여정’입니다. 참된 회개와 더불어 용서의 은총이요, 주님과 사랑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죄녀처럼 즉각적인 참회로 주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요, 이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주님의 용서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대로 오늘 복음은 미사장면의 압축같습니다. 복음의 죄녀처럼 참회의 표지로 큰 사랑을 드러낸 우리에게 미사후 파견시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어도 무방합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입증되는 믿음입니다. 회개를 통한 용서와 겸손한 믿음이요 살아나는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복음의 죄녀와 참 좋은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코린토 서간에 나오는 죄인 바오로입니다. 바오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말그대로 은총에 감격하는 은총의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은총이 한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은총이 ‘참된 겸손, 참된 지혜, 참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동병상련(同病相憐), 누구보다 복음의 죄녀를 깊이 이해했을 바오로이며, 누구보다 바오로를 깊이 이해했을 복음의 죄녀입니다. 은총의 열매가, 은총의 자녀가 바오로이며 복음의 죄녀이고 회개로 용서받은 죄인들인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중 주님과 사랑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시며 ‘사랑의 제자’, ‘사랑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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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른 은총은 없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오늘 복음에 주님 앞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자이고 하는 여자입니다. 하나는 죄 없다는 사람이고 하나는 죄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 시몬도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우선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것이 훌륭하고,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도 훌륭합니다. 사실 스승으로 여겼으니 주님을 초대했겠지요?
그런데 꽤 훌륭하긴 하지만 아직 의로움에 머물지 은총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보통 의로움을 중시하는 자가 은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그 대표적인 자입니다.
그리고 죄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으로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의로움을 중시하는 보통의 바리사이들과 같습니다.
이에 비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익히 들었을 것이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한 것 때문에 비난받으셨다는 것도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 여인들 가운데서는 매우 용기 있는 행위를 합니다. 내외가 심하던 그때 남자들이 모인 곳에 그리고 죄인을 불가촉천민 취급하는 바리사이 집에 감히 나타납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용기 내게 하였을까요? 용기가 그녀 안에 있었던 걸까요? 밖에 있었던 걸까요?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께서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바리사이 집에 남자들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간 것이고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둘러싸 있어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간 것입니다.
흔히 용기를 얻어서 무엇을 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용기를 얻는 방식도 이런 것입니다.
심리학적인 방법이니 최면술이니 이런 것들을 통해 용기를 얻으려 하지 말고 주파수를 오직 한 곳에 고정하듯 예수님께 집중할 때 그 예수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주시는 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여러 부정적인 시선을 무릅쓰고 주님께만 시선을 집중하며 주님을 꼭 만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용서받고 싶었고 그 용서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곧 회개의 마음을 주신 것도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거라는 믿음과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이제는 죄의 세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화해하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내 화해 요청을 상대가 받아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고
그래서 내 화해 요청에 그도 화답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화해를 청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법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듯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지 않아 우리가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지 않아 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기를 원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다면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요.
이미 은총을 살고 있기에? 다른 은총을 살고 있기에? 다른 은총을 받고 싶기에?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다른 은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이 필요 없다면 모를까 은총을 원한다면
주실 수 있는 주님께 그리고 주시는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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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ㄴ)
<죄인들의 친구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7,36-50)은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말씀'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초대에 응하십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와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 사회에서 여자는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죄인들의 친구'이시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자의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말합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7,47)
우리의 '신앙여정'은 '하느님 체험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 체험의 여정, 곧 용서체험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한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용서)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께 많은 것을 내어드립니다. 많은 것을 내어드리고, 또 많은 것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다운 신앙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다시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입니다.(제1독서/1코린15,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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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진정한
사랑은
있다.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봉인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활짝 열린다.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나눔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를
나누신다.
옥합을
깨뜨리듯
아픔 없는
사랑이란
없다.
옥합의 눈물이
회개의 향유이다.
회개는
실패가
아니다.
가장 고귀한
용서의
체험이다.
회개의
용서이며
용서의
회개이다.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이다.
용서의
방관자들인
우리가
용서를
만난다.
복음의 삶이란
옥합이 깨어져
용서를 만나는
용서의 삶이다.
옥합 안에는
향유가
있어야 하듯
우리들 삶에는
용서가
있어야 한다.
하느님 없는
용서란 없다.
용서 자체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자녀들의
용서이다.
하느님의
옥합에
다시 채워지는
용서이다.
용서는 용서로
다시 채워져야
한다.
하느님을
다시 뜨겁게
만나는 용서의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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