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단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당분이 세포 생성과 에너지원으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의 차이
는 있지만 모든 식물성 식품에는 당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모든 과일은 풍부한 당분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분을 추출하여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기술은 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보편화되
었다. 예로부터 대부분의 꽃 속에는 당도가 매우 높은 꿀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꽃으
로부터 직접 꿀을 대량으로 채집하는 기술은 현재까지도 개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대부터 사람들
은 꿀벌에게 인공적으로 벌통을 만들어주고, 그들이 꽃에서 채취해다 보관해둔 꿀 중에서 일정 부분
을 덜어내어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인도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조제하여 사용하는 기술은 기원전 5세기경에 처
음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 생산된 설탕은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대그리스까지
거래되었는데, 1세기경의 고대그리스 문서에 처음으로 설탕 관련 기록이 나온다. 고대그리스인들은
설탕을 사카르(sakkhar)※라고 불렀는데, 설탕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당시 세계 최고 장사꾼
인 아라비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 멀리서 수입해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대그리스인들은 설탕을
치료제로만 사용했다. 보통 수수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사탕수수는 벼科 식물로 2~4m까지 자라며,
줄기에 단맛을 지닌 하얀 빛깔의 액즙이 듬뿍 들어 있다.
※ 사카르는 바로 우리가 어릴 때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즐겨 먹던 사카린의 어원이다. 당시 문
경표준말로는 사까루였다. 사카린은 발암물질로 분류되어 한때 사용이 전면 금지되기도 했지만, 인
체에는 암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현재는 당뇨병 환자를 비롯하여 단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카린은 설탕에 비해 당도는 200~700배 높지만 열량은
발생하지 않으며, 인체에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배설된다.
사탕수수가 유럽에 전파된 것은 십자군전쟁을 통해서였다. 기독교인들은 아랍인들로부터 빼앗긴 성
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지만, 예루살렘 탈환보다 훨씬 값진 아랍세
계의 수준 높은 문명을 부수입으로 얻어갔다. 그 가운데서도 커피와 설탕 획득은 가장 큰 수확으로,
이후 유럽인들의 기호음료와 사교문화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유럽에서는 14세기부터 이탈리아의 시
칠리아에서 처음으로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는 포르투갈의 마테이라, 스페인의
카나리아제도에서 차례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여러 차례 사탕수수 재배를 시도했지만,
토양과 기후가 맞지 않아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사탕수수는 1506년 스페인의 식민지인 카리브海의 도미니카에서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아메
리카에 진출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비극의 역사가 싹튼 것이다. 도미니카의 토양과 기후가 사탕
수수 재배에 적합하여 스페인 본토보다 헐썩 더 잘 자라자 스페인人들이 사탕수수 재배면적을 확대
하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농사일을 시킨 것이다. 도미니카 원주민들은 스페인
人들의 대량 학살과 전염병 감염으로 거의 멸종되었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서였다. 이어 사탕수수
는 쿠바와 멕시코를 거쳐 남아메리카 전역에서도 재배되면서 흑인 노예들이 대대적으로 잡혀오기 시
작했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커피가 오늘날에는 대부분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되듯이, 인도가 원산
지인 사탕수수도 오늘날에는 대부분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된다.
남아메리카에서 설탕이 대대적으로 공급되자 유럽에서도 비로소 설탕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전
까지 값비싼 설탕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서민들은 치료용으로 쪼매 사용할 수 있었
다. 마침 유럽에서는 벌꿀 생산량이 급감하여 왕실이나 귀족들도 당분 사용에 애로를 겪고 있던 참이
었다. 벌꿀은 대부분 수도원에서 생산‧공급했는데,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수많은 수도원도
함께 몰락하여 벌꿀을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탕수수 재배지가 남아메리카 전역으로 확대되자 유럽 각국의 상인들은 너도나도 노예무역상을 차
린 다음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팔기 시작했다. 공짜로 흑인들을 잡아다 팔아먹는 노예무역
이야말로 거저 남는 장사였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주로 목화 재배에, 남아메리카는 주로 사탕수수 재
배에 노예를 부려먹었다. 유럽에서도 금세 흑인 노예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농토가 서유럽 전체보다
넓은 러시아에서도 흑인노예 거래가 활성화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흑인 노예 가운데 푸시킨의 외조부
처럼 표트르 대제의 장군으로 발탁된 자도 있었다. 푸시킨 역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시인으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1600년부터 1850년 사이에 대략 2천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노예로 거래된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백인들과 그들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짐승 사냥과 동일한
방법으로 노예를 포획했다. 잡히는 과정에서도 수십만 명이 살해되었으며, 범선의 맨 아래쪽 짐칸에
처박혀 몇 달 동안 아메리카로 이송되는 과정에서도 수십만 명이 죽어나갔다. 목숨을 부지해봐야 죽
느니만 못한 노예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대접을
받으며 노예살이를 했다. 1863년 1월 1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에 의해 세계 최초로 흑인 노예 해방 선
언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도 흑인들에 대한 대접은 크게 나아진 게 없다. 미국에서만 해마다 1000명
이상의 비무장 흑인들이 경찰이 고의로 쏜 총에 맞아 살해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사탕무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유럽의 모
든 나라에 영국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못하도록 금한 조치였다. 그러나 타격을 입은 쪽은 오히려 프
랑스였다.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은 가장 먼저 프랑스로 가는 설탕 무역을 완전 봉쇄
했다. 유럽에서 살롱문화가 가장 발달하여 밤낮없이 귀부인들의 살롱에 모여 커피를 즐기던 상류층
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항의가 빗발쳤다. 나폴레옹은 연일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대안을 찾으라고 호
통을 쳤고, 그 중 몇몇 화학자들이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덕분에 인류는
오늘날까지 사탕수수와 사탕무에서 추출되는 설탕을 얼추 비슷한 비율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농
촌진흥청에서는 당도는 세계적인 수준이면서 수확량은 가장 높은 사탕무를 개발하여 제주도에서 시
험재배에 성공했다. 잘되면 설탕값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호기다.
- 프랑스 식물학자 자크 브로스 지음 「식물의 역사와 신화」 중에서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지난 건강검진시 위.장 의 종양을 모두 제거 하였는데 위궤양증이 있다며 1개월 투약후 재촬영 일정을 받고 왔습니다. 거의 1주에 한번꼴의 진료에 일상이 병원의존형으로 바뀐듯 합니다. 척추 수술은 척추보강운동 3개월후 다시 보자고 했고 혈압.당뇨는 몇십년을 안고 가는 지병 입니다. 새삼 건강이 제일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추위가 더해가지만 운동 열심히 하시며 힘찬 하루 시작 하십시요.
저도 얼마전 국가건강검진을 받았는데,특별한 이상은 없다고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전 시작된 기침이 수시로 발작되어 알러지 치료 등을 해오다가 어제는 저선량 폐 CT 검사도 했으나
기관지가 좀 확장되었고하여 염려했던 결핵ㆍ폐렴ㆍ암은 아니라는 의사의 진단으로 역시 다행이지만
기침원인규명은 못하여 한의원을 방문해봐야할것 같습니다.우리나이에 아프지않고 사는게 은총이고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