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시사실, 스트레이트 스토리
■ Story
병이 깊은 73살의 앨빈 스트레이트(리처드 판스워스)는 언어장애가 있는 딸 로즈(시시 스페이섹)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동생 라일(해리 딘 스탠튼)이 쓰러졌다는 연락이 온다. 눈 나쁘고 운전면허증도 없으며 다리마저 불편한 앨빈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의 교통수단은 털털거리는 잔디깎이 차. 괴팍한 노인의 기이한 6주간 여행이 시작된다.
■ Review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주인공은, 우연히라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젠 세상이 잊어도 좋을 우울하고 초라한 노인이다. 우리는 그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앨빈 스트레이트라는 이름의 이 미국 노인은 일흔세살이며, 다리가 불편하고 건강이 아주 좋지 않다. 바보 취급을 받아 남자한테 버림받고 두 자식도 빼앗긴, 모자라지만 착한 딸이 시골마을의 허름한 집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정도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겠지만, 이 영화는 그의 개인사를 자세히 일러주지 않는다.
짐작건대, 그는 많이 힘든 생을 살았을 것이다. 깊은 골의 주름과 거뭇하게 뒤덮은 저승꽃이 아니라, 유난히 퀭한 눈이 그렇게 말한다. 묘하게도, 굳어가는 노인의 몸에서 아직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는 유일한 부위가 그의 눈이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그의 곁에 서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로든 이 영화를 택했다면, 우리는 이 노인과 이제 두 시간 동안(영화 속에선 6주이지만) 그가 탄 시속 5마일짜리 잔디깎이 차의 속도로 여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여행이, 격정도 분노도 환희도 없는 이 느리고 누추한 여행이, 마음속 어딘가를 단단히 건드려, 며칠이 지나도 노인의 눈만 떠올리면 눈앞이 흐려지는 후유증을 남긴다.
1999년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감독이 데이비드 린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믿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데뷔작 <엘리펀트맨> 때부터 린치는 관객을 불쾌하게 만드는 데 달인이었다. <이레이저헤드>을 보고나면 훌륭하다는 말은 나와도, 좋다는 말을 차마 하긴 힘들다. 린치의 남다른 점은 사람 속에 있는 징그러운 걸 끄집어내 형상화하고 서사화하는 능력이다. 그게 뭔지, 언제 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자기 속에 있다는 걸 린치는 느끼게 한다. <이레이저 헤드>의 애벌레 모양의 아기는 그런 느낌 때문에 더욱 불쾌한 형상이다. 린치는 무의식과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악명높은 괴작들을 혐오할 수는 있어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스트레이트한 서사와 이미지들은 더이상 무의식 안의 오물을 뒤지지 않는다. 린치는 새삼스럽게, 영화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실화가 바탕이 된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소름돋는 마찰음 대신 고요한 화음으로, 우리가 잊고 있으되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충만할 수 있었던 마음의 상태를 환기시킨다. “감정은 영화라는 매체가 잘 다룰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그건 균형 찾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기도 한다. 아주 조금만 넘쳐도 감정은 날아가버리고 아주 조금만 모자라면 아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그 미묘한 균형을 찾고자 노력한 실험적인 영화였다.”(2001년 칸영화제 기자회견 중에서)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아름다운 영화다. 하늘을 유영하는 카메라에 담겨 석양의 잔광을 난반사하는 가을 들판이 아름답고, 린치의 변함없는 음악 파트너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청명한 포크 선율이 아름답다. 너무 노골적으로 아름다워서, 린치가 혹시 테렌스 멜릭 못지않은 서정적 필치의 소유자임을 과시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정말 아름다운 건, 믿기 힘들지만, 79살(당시)의 배우 리처드 판스워드의 눈이다. 생은 축복이 아니었다. 야만의 들판을 홀로 걸어 생을 소진했지만 깊고 푸른 회한 한 가닥이 거의 죽어버린 육체를 지탱하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과 만나는 그의 젖은 눈이 그렇게 말한다.
전쟁의 상처가 그의 주름을 두배쯤 깊게 했다는 사실을 슬쩍 알려주지만 그런 설명이야말로 사족이다. 최초의 클로즈업만으로 판스워스는 어떤 설명도 구차하게 만들어버린다. 바보 딸로 나온 시시 스페이섹과 마지막에 단 한번 얼굴을 내미는 해리 딘 스탠튼, 두 베테랑은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판스워스와 완벽한 앙상블을 빚어낸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판스워스는 생을 마감했다. 이쯤에서 말을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괴감독 데이비드 린치가 외도한 정통 드라마로서가 아니라 최후의 순간에 가장 빛난 위대한 배우 리처드 판스워스의 이름으로 기억돼야 마땅한 영화다. 허문영 moon8@hani.co.kr
주연 리처드 판스워스
유작으로 남은 노년의 투혼
리처드 판스워스(Richard Farnsworth)는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앨빈처럼 두 다리가 불편했으며, 말기암을 앓고 있었다. 데이비드 린치는 잔인하고도 현명하게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판스워스를 주인공으로 내정했다. 거절하려던 판스워스는 결국 수술을 미루고 촬영에 나섰다. 이 투혼이 판스워스에게 생애 최고의 연기라는 찬사를 안겼다. 2000년에는 최고령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라는 값진 기록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2000년이 그의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다. 10월6일, 오래 죽음을 기다려오던 판스워스는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끝맺고 말았다.
1920년생인 리처드 판스워스는 1937년 샘 우드의 <어 데이 앳 레이시즈>의 기수로 첫 등장한 이래 40여년간 몸을 내던지며 살아온 스턴트맨이었다. 로이 로저스, 게리 쿠퍼 등 당대 서부 사나이들의 말타는 연기는 대부분 판스워스의 솜씨. 스탠리 큐브릭의 60년작 <스팔타커스>에서는 커크 더글러스를 대신해 칼을 들기도 했다. 연기의 시작이라 할 만한 건 조지 시걸, 골디 혼과 공연한 76년작 <공작 부인과 더티워터 폭스>의 마부 역할부터. 뒤이어 앨런 J. 파큘라의 78년작 <컴즈 어 호스맨>의 연기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자, 세인들은 이 58살 신인배우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턴트맨이 명배우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82년 신사적인 강도 빌 마이너를 연기한 <그레이 폭스>는 그에게 캐나다의 아카데미상인 지니상을 안겨줬고, 이후에도 <내츄럴>, TV시리즈 <빨강머리 앤>, <미저리> <겟어웨이> 등 스크린과 TV를 오가며 꾸준한 활동을 보였다. 굵직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에 여간해서 얼굴을 찌푸리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 없는 느긋하고 선한 이 남부 사나이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연기로 화면의 일부가 되는 법을 체득했고, 마침내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위대한 연기로 마감했다. 레너드 몰틴은 “스턴트맨이 배우로 전업해 성공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며, 배우가 나이 60살이 넘어 비로소 성공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판스워스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킨 유례없는 인물이다”라고 썼다.
TV 가이드
숭고할 만큼 쓸쓸하게, <스트레이트 스토리>
이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모두 의아해했을 것이다. 과연, 그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이 맞을까? 중산층 가족의 역겨운 이면, 인간의 뒤틀린 욕망 등을 초현실적이고 복합적인 구조로 형상화했던 그가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는 말 그대로 무척 단호하게 ‘스트레이트’한 방식을 취한다. 이야기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쭉 뻗어가며, 아름답게 텅 빈 자연과 인물의 침묵하는 표정에 집중하는 카메라는 충격적일 정도로 날카롭게 비판하는 린치 특유의 스타일 대신, 고요하게 삶의 남은 시간을 명상하기를 택한다. 이 영화는 너무도 투명하다.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뉴욕 타임스>에 실렸던 앨빈 스트레이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70살이 넘은 앨빈 스트레이트는 자신도 몸이 불편하지만, 10년 전에 연락을 끊은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한 여행을 계획한다. 형이 죽기 전에, 지난 10년의 어리석은 미움을 털어버려야겠다는 일념하에, 그는 잔디깎이에 짐수레를 달고 형이 사는 위스콘신주로 6주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시속 5마일로 달리는 노쇠한 잔디깎이에 몸을 싣고 그는 삶의 불행과 행복의 순간을 맛보는 사람들을 스쳐가면서 자신의 시간을 돌아본다. 황량한 길을 따라 천천히, 기약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듯한 노인의 잔디깎이와 다가올 시간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얼굴에 또 하나의 주름을 새기는 듯한 노인의 형상을 통해 린치는 어떤 수사도 압도하는 인생의 깊이를 전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최소한의 양식으로 삶의 최대한을 끌어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두 형제가 마침내 만나, 별다른 말도 없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겨우 서서 10년 만에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삶의 자잘하고 하찮은 오해를 넘어서 함께 죽음의 시간을 바라볼 때, 여기에는 어떤 숭고함의 경지가 서려 있다. 앨빈 스트레이트 역을 맡아 홀로 외로운 여정을 감내했던 리처드 판스워스는 이 쓸쓸한 영화에서 완벽했다. 스턴트맨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57살에 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그에게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첫 주연작이다. 촬영 당시 말기 암과 싸웠던 그는 영화가 완성된 뒤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슬픈 운명이 영화와 겹쳐지며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글 남다은(영화평론가) 2008-01-03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