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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종교 다원주의 선교
연구
1. 서론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며 선교는 세계 안에서 수행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다. 예수님은 만민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교회에게
주었고 교회가 그 사명을 완수해 가는 것이 선교이다. 즉 선교란 복음이 시간 속에서 성육신하는 것인데 이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변천하는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되어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감을 의미한다.
선교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에큐메니칼적인 입장이고 또 하나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이다. 복음주의 적인 입장은 로잔대회를 통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그들은 개인의
영혼구원, 교회의 확장을 추구하며 하나님과 수직적인 차원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의 입장은 인류 사회의 행복과 불행,
정의사회의 창조 등, 인간의 해방이라는 수평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나아가 최근에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선교론이 대두 된지
오래이다. 이는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강한 도전이 일어나게 한다. 구원에 있어서 예수만으로가 아니라 예수만으로?의 입장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살펴보며 다원주의가 선교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종교다원주의와 비교되는 전통적인 선교론인 복음주의적 선교론을 먼저 언급하고 복음주의와 대조하여 다원주의 선교론을
개념과 주장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복음주의적 선교론
복음주의적 선교론은 그 근거를 철저히 성경에 둔다. 특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명령에 충실하다. 그들은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교회의 설립과 성장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목적을 둔다. 보에티우스는 그의 저서 "Politica
Ecclesiastica"에서
① 이방인의 회심
②교회의 설립과 확장
③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선교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현대의 선교신학자 바빙크(J.H.Bavink)와 피터 베이어하우스(P. Beyerhaus)는 고전적 선교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보에티우스(G.Voe- tius)의 개념을 받아드여 선교신학을 수립하였다. 이 세 가지 목적들은 각기 분리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 도래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예수의 부활과 그의 재림으로 인한 하나님나라 도래 때까지 주의 은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선교 신학자 구스타프 바르넥(G. Warnek)은 "선교란 비기독교 세계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복음 전파"라고 하였고 맥가브란도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충성을 바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문화를 초월해 전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받아들여 교회의 책임적 구성원이 되게 하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전도와 정의 실천에 함께 사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T. S. Soltau도 선교의 목적은 토착 교회를 설립할 전망으로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모든
지역의 비회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M. L. Young도 선교란 잃어버린 자의 구원과 토착 교회의 설립, 하나님의 왕국의
출현, 또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그의 완전한 말씀을 모든 나라에 선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자를 보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복음주의 선교 개념은 1966년 미국 일리노이주 휫튼대학에서 모였던 세계 복음주의
선교 연합회(Evangelical Foreinn Mission Assoia- tion)에서 채택된 휫튼 선언문과 1969년 독일의 튜빙겐대학
선교학 교수인 P. Beyerhaus를 중심으로 작성된 프랑크프르트(Frankfort) 선언문에 명시되었다. 복음주의 선교론은 에큐메니칼과는
달리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직접적인 참여문제는 소극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조적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전도의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으로 인격 성숙이 곧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구원보다 개인구원과 개인 영혼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 선교 개념에서 더 강조할 것이
있다면 타종교에 대한 견해이다. 그들은 타종교의 구원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타종교인은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되는데 목적을 둔다.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주의 선교 개념은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견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과 대립된 복음주의의 선교
개념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이러한 복음주의적 선교관은 로잔 운동에 의하여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3. 종교다원주의 선교론
1) 종교 다원주의 배경
종교 다원주의란 진정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구원의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태동은 먼저는 WCC의 종교연합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이다.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에 의하면
종교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말한바 있다.
WCC안의 종교다원주의는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선교협의회에서 폴(K. T. Pall)과 차오(T. C.
Chao)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들은 기독교가 흰두교 지역과 유교지역의 국민들과 함께 서구 세속주의에 저항하는 공동적 사명을 위한 대화를
제시했다. 이러한 제시는 20세기 후반에 와서 종교연합운동으로 나타났다. 또한 비교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종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치(Ernest
Troeltsch,1865-1923)가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했으며,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렇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다원주의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과학의 발전으로 종교 다원주의의 태동을 촉진하였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동서양의 활발한 교류는 타종교에 관한 문헌을 쉽게 접하게 해주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문제는 긴급한 것이 되었다.
2) 종교다원주의의
특징
종교다원주의의 특징을 목창균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모든 종교는 제 각기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나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생각으로서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한 19세기 종교사학파의 트릴치(Ernst Troeltsch)가 이를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 어느 종교나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양인에게는 불교와 힌두교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 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이 트릴치의 근본 신념이었다.
둘째,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 속에서
이일을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 것, 문화적인 것, 시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성과 우연성 배후에는 하나의
신, 즉 공동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 스미스 등이 이를 대변한다.
셋째, 모든 종교는 공동의 심리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의식 속에 기원을 가진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의 유 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써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대표자이다.
이러한 견해는 일반 대중을 비롯하여
여러 신학자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개신교신학자는 영국출신의 장로교회 목사로 현재 미국 클레마운트 신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존 힉(John Hick)이 있다. 힉 이외에도, 틸리히(Paul Tillich), 스미쓰(Wilfred Cantwell
Smith), 레이스(Alan Race), 사마르타(Stanley Samartha)등이 있다. 가톨릭 신학자로는 니터(Paul F.
Knitter), 파니카, 라너, 큉을 들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차 비티칸 공의회(1965) 선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신도를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입장을 공시적으로 천명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귀울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a) 존 힉
존 휙은영국의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로서 본래 개혁교회의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 성향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1973년에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를 발표하면서 종교적 사고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기독교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헌신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견해로부터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One Divine Reality)가 있으며, 모든 주요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반응이라는 다원론적
견해로의 변천을 말한다.
그는 {바가드-기타
폴 니터는 그의 신 중심적 모델을 "관계적 유일회성"(Relational Uniqueness)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특히 그는
과정적- 관계적 실재관의 영향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화적이고 과정적이라는 실재관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존재(being)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성(becoming)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결되지 않은 변화 과정속에서 종교를 보고 상대성을 허용한다.
특히 그는 생물의 진화를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의 신물리학의 통찰을 가지고 실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니터는 상호 관계성에 입각한 예수의 유일회성을 해석한다. 예수를 관계적 유일회성으로 해석한는 것은,
니터에 의하면, 예수를 '유일회적 이다'라고 기독교내에서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다른 종교적 인물들과 관계하는 경우에는 '한정된
유일회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중심적 기독론을 예수에 대한 신약성서 복음의 본래적 의미에 대립되지 않는 비 규범적
이해에서 전개려고 한다. 니터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신약성서의 예수에 관한 교리적 본문들에 적용하면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그 본문의 역사적
상황에서 해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가다머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과 그 내용은 경험과 의미의 지평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한 지평이란 역사를 통해 확대되기 때문에 본문과 내용이 새로운 구조 속에서 계속 들려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로
본문의 의도하는 바를 듣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니터는 신약성서의 상황이나 예수에 관한 과거 교리적 진술과는 전혀 다른 인간경험의
'구조'(texture)에 있어서 새로운 진보가 있었음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구조는 모든 문화 및 역사적 업적의 상대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의식과 다원주의에 대한 새로운 의식 그리고 특별히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의 새로운 형태의 통일을 추구할 필요성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 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c. 칼 라너(Karl Rahner)
칼라너(Karl Rahner)는 포괄적이면서
기독론적인 접근을 택하는 카톨릭 신학자이다. 그는 제 2바티칸공의회의 신학 자문위원이었으며,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로마카톨릭 교리를
공식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역활을 하였다. 제2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열리기 수개월 전, 라너는 바바리아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
종교'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의 강의는 종교 다원주의가 기독교에는 가장 큰 치욕거리이며 골칫거리임이 틀림없다는 주장으로
시작됬다.
그 다음에 라너는 그의 신학에 있어 근본이되는 세가지 주제들을 설명해 나갔다.
첫번째 주제는, 기독교가
자기를 모든 인류를 위한 절대적인 종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며,
두번째 주제는, 비기독교 종교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주제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익명의
크리스챤'(Anonymous Christians)으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선구자, 다른 종교에 숨어있는 신재로서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너의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가해져왔다. 존 힉은 그것은 "바라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명예로운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한스 큉 역시 비판적인 입장으로 두가지 주된 반대 이유를 제시한다. "익명의 크리스챤"이란 개념은 비기독교
인들에게는 불쾌한 말이며, 둘째로 세계 종교들의 도전에 직면함없이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비기독교 종교인들에게도 모든 인류에 대한
일반 계시의 표현들과 "하나님의 의와 심판, 인간의 죄와 죄책 그리고 모든 남녀에게 속죄와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증거하고 있는
요소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파나카와 라너에 대해 가해야할 중요한 비판은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상대화 시키고 타협시켰다는 것이다.
d) 한스 큉(Hans K ng)
큉은 1960년이래 튜빙겐에서 가르치고 있는
스위스의 로마카톨릭 신학자이다. 잘 알려진 그의 저서로는 {칭의}(Justification:1965), {교회}(Church:1967),
{무오?}(Infallible?:1971), {크리스챤이 됨에 관하여}(On Being a Christian:1967), 그리고
{영생?}(Eternal Life?: 1984)이 있다. {크리스챤이 됨에 관하여}에 명백히 나타나있듯이 큉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다.
다른 종교의 약점은 물론 장점도 인정한지만, 그는 하나님의 최고 계시는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믿는다. 큉에게 있어서 두 가지 두드러진 요소는,
비평학자들에 의해 구축된 역사적 예수, 즉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인간다운 방식으로 살게끔 해준 참사람이다.
이것이 '아래로
부터의 기독론'(from the below)이다. 그는 세계 종교들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구원의 방식과 교회 내에 있는 '특별한 구원'의
방식을 구분한 것으로 유명하다. 큉은 인간은 그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에게 유용한 종교 내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 종교 내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실존적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직면할 때까지는 모두 그러하다. 종교들은 ...보편적인 구원사에 있어서의 구원의 방식, 즉 세계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일반적인 구원의
방식이다. 교회내에서 매우 특수하고 특별한 것으로 나타나는 구원의 방식과 대조되는 보다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구원의 방식인 것이다.
큉은 {기독교와 세계종교}라는 책에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와의 대화를 시작한다. 그는 이 대화에서 두 가지 일을 시도하는데,
첫째는 타종교의 빛 가운데서 행하는 기독교의 자기 비판이고, 둘째는 복음의 빛 가운데 행하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창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커져가는 헬라의 영향하에 있던 교회들 뿐이었다고 주장하다. 그의
결론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은 하나님을 '대표하고','나타내며','명백히 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그의 기독론은 예수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칼테돈의 신조를 부인하는 것이다.
4. 종교다원주의가 선교에 미친 영향
이러한 범신론적 보편주의와 다원주의적인 신학에 의한 선교관은 선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종교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는
표현 방법과 규정 내용 및 의식이 다를 뿐, 결국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또는 다른 명칭의 조물조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서, 어떤
종교든지 열심히 그리고 종교가 요구하는 율법과 교리를 성실하게 준행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주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데 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문화권에서 믿고
있는 종교를 성실하게 믿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 불교도나 회교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가? 종교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 세계 인구의 70-80%에 달하는 비 기독교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인도주의적 관점에
관심을 가진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곤 한 성경말씀이 이를 입증한다(출 20:3,
23:24-25, 시 96:5,사 44:6-8).
둘째,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 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전 1:21).
셋째, 종교다원주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요 14:6),"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결론
현대의 다종교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간의 갈등이 있어서는 안되고, 종교 사이의 평화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해 긴요한 조건임에도
종교간의 갈등이 전쟁과 다툼을 유발시키는 어두운 현실임을 이라크 전쟁과 여러 테러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 보아왔다.
종교는 개인은
말할 것도 없이 집단과 사회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평안과 화목, 행복등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이다. 그래서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 갈등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대화를 통해서 극복해야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타종교를 이해하고, 또한 타종교에게 우리의 종교를 이해시켜야
한다. 다종교들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는데, 타종교들이 말하는 신(god)은 우리 기독교의 신(God)과 비교될 수 없을 뿐더러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독특성과 당연한 진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취급하여 갈등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도 타문화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 속에서 서서히 문화와의 충돌 없이 전해야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또 기독교의 구원은 타종교들의 구원의 개념과
다름을 알고있다. 원죄로 인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굴레 속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며,"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는 주장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많은 논쟁들 속에 성경은 답을 주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14:6),"다른 이로써는"(행4:12)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타종교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흔들리지
말고 진리를 보존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넓게 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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