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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모로
누벨바그의 별 잔 모로가 지난 7월 31일(프랑스 현지시각) 향년 89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SNS를 통해 “영화와 연극의 전설, 절대 자유와 삶의 회오리 속에 살았던 예술가”와의 이별을 애도했다. 잔 모로는 고혹적인 미모와 도발적인 분위기, 자유로운 발언을 통해 누벨바그의 정신을 삶으로 승화시켰다. 1948년 데뷔 이후 1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60년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모데라토 칸타빌레>)을 비롯해 각종 시상식에서 숱한 영광을 거머쥐었다. 여성 최초의 프랑스 예술원 정회원으로 추대된 잔 모로는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고 그 열정에 영화계는 유럽영화아카데미 평생공로상(1997), 명예오스카상(1998) 등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수상으로도 잔 모로의 궤적을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영화 그 자체…. 언제나 기존 질서에 저항한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마크롱 대통령의 말이 자유와 매혹이라는 그의 두 가지 본질을 좀더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누벨바그를 전성기로 삼은 배우들은 적지 않지만 ‘누벨바그의 여신’이라 부를 만한 배우는 잔 모로 이외에 떠오르지 않는다. 1928년 파리에서 태어난 잔 모로는 16살에 연극 <안티고네>를 본 후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 국립연극원을 거친 후 48년 코미디 프랑세즈 단원으로 연기에 첫발을 디뎠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1953)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58년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도발적인 연기를 통해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위험한 관계>(1959), <연인들>(1961), <줄 앤 짐>(1961), <어느 하녀의 일기>(1964) 등 누벨바그의 숱한 걸작들을 통해 대체 불가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의 술집 댄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농염한 팜므파탈은 물론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는 상류층 여인 앤으로 분해 억눌린 욕망과 일탈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대표작으로 알려진 <줄 앤 짐>의 카트린의 매력은 잔 모로의 아우라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욕망에 솔직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대배우는 영화같은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자유를 향해 떠났다. 글 송경원 2017-08-07
잔느 모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제작노트
한 여자가 말한다. ‘주.템.므.’ 그녀 앞에는 연인이 서 있을 것이며, 둘은 아늑한 방에 있으리라. 그러나 카메라가 뒤로 빠질 때마다 우리는 그녀가 전화기에다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가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와 남자는 분명 사랑의 모험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루이 말이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서 프랑스 멜로드라마와 범죄영화의 전통을 따르면서 배반하기 위해선 단 몇분의 시간으로 족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우연과 절망, 오해와 살인, 열정과 기억에 관한 가장 순수한 걸작이다. 주말 저녁에 시작해 다음날 아침에 끝맺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장 르누아르와 오슨 웰스의 고전적 영역과 <네 멋대로 해라>에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르는 현대영화의 세계를 나란히 품고 있는 작품이다. 데뷔작에서부터 고전적인 기법의 활용과 혁신적인 시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말은 영화의 황금시대와 곧 다가올 새로운 물결의 자장 내에 동시에 위치한 작가였다. 그리고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모리스 로네와 함께, 공포와 광기 사이에 선 여자를 연기한 잔 모로를 처음 기억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곧 늙겠지. 그러나 사진 속에서 우리는 같이 있어. 거기, 어딘가에서, 같이. 우리는 결코 떨어질 수 없어”라고 읊조리던 그녀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초상 그대로였다. 30분 뒤엔 자유로워질 거라던 그들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모로와 로네가 말과 창조한 비극적 아름다움은 이후 <연인들>과 <마지막 선택>으로 이어진다.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