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Hurricane)
1979년 미국영화
제작 : 디노 드 로렌티스
감독 : 얀 트로엘
음악 : 니노 로타
촬영 : 스벤 닉비스트
출연 : 미아 패로우, 제이슨 로바츠, 티모시 보텀즈
데이튼 케인, 막스 본 시도우, 트레버 하워드
제임스 키치
70년대는 재난영화가 급부상한 시대였습니다. 70년대가 시작되는 해에 등장한 항공 재난영화 '에어포트'는 아카데미상 10개부문에 올랐고, 이어 1972년 재난영화에 확 불을 당긴 수작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히트하면서 재난영화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타워링' '대지진' 그리고 이어지는 '에어포트' 시리즈, '스웜' 등, 1979년에 만들어진 '허리케인'도 그런 재난영화 중 한 편입니다.
원래 '허리케인'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수작은 존 포드 감독의 1937년 작품이지만 유사한 제목의 영화들이 몇 개 됩니다. (70년대 TV영화 '허리케인'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도시가 배경이지요) 79년 '허리케인'도 거대한 태풍이 등장하는 영화인데, 참여한 스탭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나름 유명 배우인 '제이슨 로바츠'와 '미아 패로우'가 등장하고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과 '새벽의 7'인 등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젊은 배우 티모시 보텀즈도 등장합니다. 거기에 '엑소시스트'의 명배우 막스 본 시도우도 출연하고 40-50년대 영국의 명배우 트레버 하워드도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이 정도면 뭐 출연진으로서는 손색없는 호화배역입니다.
배우 외의 스탭진도 화려합니다. 제작은 이탈리아의 명 제작자 디도 드 로렌티스가 담당했고, 음악은 '대부' '태양은 가득히' '전쟁과 평화' 등으로 널리 알려진 감미로운 영화음악의 대가 니노 로타 입니다. 거기에 촬영은 스웨덴 출신의 스벤 닉비스트 인데 이 촬영감독은 아카데미상만 두 번 수상하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과 함께 작업한 실력파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도 감미로운 음악이 괜찮고 거대한 태풍장면 촬영이 좋습니다. 감독 얀 트로엘은 좀 생소한 이름일 수 있지만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도 올랐고,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몇 차례 상을 받는 인물입니다.
배우 괜찮고, 제작자, 감독을 비롯한 스탭진들이 실력파인데, 그럼 꽤 좋은 걸작이 나와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게 영화라는 문화 매개체의 아이러니죠. 아무리 좋은 실력의 인물들로 구성해서 영화를 만들어도 범작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크레딧에 원작 소설 각색작이라고 나오는데 실은 1937년 존 포드 '허리케인'과 동일한 작품입니다. 두 영화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같지는 않지요. 그런 점에서 원작의 각색작이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고, 화려한 스탭진들이 모였지만 아무래도 '유럽의 영화장인' 들이 할리우드식 오락 대작을 함께 작업하는 것은 좋은 성과를 보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재난 영화 중에서 하위권 범작에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1900년대 초기, 미군 점령하의 사모아 지역 섬이 배경입니다. 그곳은 원주민들의 섬인데 이곳을 보호(사실은 점령)하고 있는 것인 미 해군입니다. 총 책임자인 브루크너 총독(제이슨 로바츠)의 딸 샬롯(미아 패로우)이 아버지를 만나러 섬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죠. 샬롯은 그곳 원주민인 마탕기라는 청년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탕기는 족장의 아들로 문명의 지식을 배우고 있었고 나름 부르크너 총독의 총애를 받는 편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마탕기는 젊은 나이에 족장의 직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족장 즉위식에 축하하러 간 브루크너 총독에게 다소 당돌한 질문을 하여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총독과 그의 수하장교이자 샬롯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잭(티모시 보텀즈)은 마탕기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죠. 섬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신부(트레버 하워드)와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막스 본 시도우)도 있는데 이 두 사람은 권위적인 해군들에 비해서 훨씬 원주민들을 잘 이해하는 편이지요.
뭐 대략 어떤 상황인지는 설명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원주민들의 '대빵'인 족장이라 하더라도 해군 총독의 딸이 그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발칵 뒤집힐 일이죠. 일종의 타잔과 제인 놀음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 별로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도시에서 온 백인 처녀가 난데없이 원주민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어떤 동기나 계기가 너무 미약합니다. 마탕기야 뭐 백인 여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치더라도. 그리고 이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지배자의 딸을 사랑한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의 깊은 사랑이지, 샬롯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를 속이고 원주민과의 위험한 사랑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더구나 잭과 나름 사귀고 있었는데) 이 동기와 설정이 취약하다 보니 영화가 전체적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승전결도 너무 극단적이거나 막나가는게 많습니다. 두 남녀 주인공의 철없고 위험한 사랑 때문에 애꿎게 희생되는 모아나 라는 원주민 처녀는 대체 무슨 죄 입니까. 섬을 지배하는 총독의 딸이라는 신분과 원주민들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인물이 이렇게 무책임하고 대책없이 무모한 사랑을 키워나간다면 그 과정이라도 좀 설득력있게 전개해야 와닿는데. 2시간이라는 나름 넉넉한 상영시간동안 그 설정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나중에 아주 극단적으로 사건이 커져버리고 그걸 지혜롭게 혹은 용감하게 해결하는게 아니라 그냥 허리케인이 몰려와서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자연해결' 됩니다. 해결이라기 보다는 그냥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참사속에서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두 남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사하다면 이게 누가 공감하는 작품이 되겠습니까?
볼만한 건 후반부에 몰아치는 거대한 태풍장면 입니다. 70년대 당시 기준으로는 꽤 볼만했을 겁니다. 요즘이야 뭐 CG로 몇 십배 더 거대한 장면도 만들어내지만. 하긴 1937작품 존 포드 영화도 후반부 허리케인 장면은 꽤 그럴듯했으니 42년이나 더 지나 만든 영화에서 그 정도 장면은 나와야 당연하겠죠.
레너드 말틴의 무비 가이드는 최악의 점수인 BOMB 을 부여했고, IMDB 점수는 4.6점으로 처참합니다. 뭐 그렇다고 볼 거리가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제이슨 로바츠는 캐릭터에 참 잘 어울려 보이고, 원주민 청년은 비전문 배우이지만 자신의 캐릭터에 잘 어울렸습니다. 원주민들의 춤이나 자연 친화적인 모습도 보기 괜찮고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잠깐의 장면도 '블루 라군'을 연상시키는 듯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조금 아름답긴 하죠. 물론 '블루 라군'이나 '라이언의 처녀'가 훨신 더 잘 묘사했죠.
킬링타임용 재난영화입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타워링' 등에 비교할 작품이 아니지요. 재난 영화는 30년대 존 포드의 작품같은 유성영화 초기 고전부터 '4시의 악마' 같은 60년대 영화, 그리고 최근까지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지만 그중 79년 '허리케인'보다 완성도가 낮은 작품은 별로 없었던 기억입니다. 그래도 나름 영화계의 장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쬐금 볼만한 요소 정도가 있었던 영화입니다. 79년 작품인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같은 해 여름 우리나라에 개봉되었고 꽤 준수한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하긴 70년대 우리나라에 재난영화나 감성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죠.
평점 : ★★ (4개 만점)
ps1 : 마탕기가 족장 취임식에서 브루그너 총독에게 경례를 하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장면은 보기가 씁쓸하더군요. 조선시대 우리나라와 청나라와의 관계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ps2 : 배우들 캐스팅만 보면 티모시 보텀즈와 미아 패로우가 로맨스 관계로 전개될 것 같은데 뭐 초반부는 그랬지만 티모티 보텀즈는 그냥 심심한 역할입니다. 당시 떠오르는 20대 배우가 너무 낭비된 느낌입니다. 원주민 청년의 들러리 역할 수준도 안됩니다.
ps3 :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왜 돌덩어리들은 있는데 그 많던 사람들의 시체는 하나도 안보일까요?
[출처] 허리케인(Hurricane, 79년) 국내 개봉 흥행한 재난영화|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