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4월의 대한민국은 차기 대통령 선거로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1952년 4월에는 최초로 지방 의회 의원 선거가 있었고, 1996년 4월부터는 공직선거법에 따라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실시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첫 번째 선거였던 1948년 5·10 총선거는 광복이후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의미 있는 선거였습니다.
국회의원 총선거 안내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 하얀색 한복과 고무신을 신고 투표소 앞에 줄선 여인들,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노인과 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에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려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총선거에 대한 전단지를 읽고 있는 사람들(1948)
투표소 앞에 줄을 선 사람들(1948)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투표하는 모습(1948)
아이를 업고 투표하는 여인과 할아버지(1948)
주민이 투표하는 모습(1948)
최초 지방선거 공고문을 보는 사람들(1952)
1952년 지방의회의원선거는 1949년 「지방자치법」이 제정·공포된 후 3년이 다가오는 시점에 실시되었는데, 읍·면 의회 선거는 4월 25일에, 도의회 선거는 5월 1일에 UN 감독 하에 치러졌습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거리 유세
선거용 트럭 앞에서 UNCURK직원들과 대화하는 주민들(1952)
지게를 지고 벽에 붙은 공고문을 보는 사람들, 선거용 트럭 앞에서 국제 연합 한국 통일 부흥 위원회(UNCURK :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직원들과 대화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치열한 전쟁과 피난의 고단함 속에서도 최초로 실시되는 지방의회의원선거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잘 보여줍니다.
무너진 수원의 성벽 앞에서 주민과 대화하는 UNCURK 직원들(1952)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남면 선거 투표(1956)
1956년에는 시·읍·면장 선거가 치러졌는데, 곰방대를 들고 투표장에 들어서는 도포 차림의 어르신들 모습이 눈길을 끕니다.
제1대 참의원선거 후보자 합동 연설(1960)
오늘날에도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의 선거 유세가 펼쳐지고 벽보와 현수막이 거리를 장식하는데, 1950~60년대에도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선거 합동 연설회(1973)
후보자가 단상 위에 올라가 지지를 호소하고, 유권자들이 경청하고 있는 합동 유세장 모습에서는 선거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직선제가 된 제2대 대통령선거 포스터(1952)
판넬 형식으로 거리에 진열된 1952년 대통령선거 포스터와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설치한 선거 선전탑에서도 선거철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제3회 민의원총선거 선전탑(1954)
1956. 지방선거에 대한 관권 개입 규탄을 주장하는 민의원들(맨 왼쪽 김두한)
1956.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지방선거 현장
1956. 대통령부통령 선거
1948년 제헌국회의 간접 선거로 선출된 초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1952년 심야 날치기 통과된 직선제 개헌안에 의해 최초의 국민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74.6%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는데요.
지금처럼 신문, 방송 등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 투표율 88.1%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으니 국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열망이 매우 뜨거웠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와 이에 맞받아친 자유당의 ‘갈아봐야 별 수 없다’는 선거구호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표심을 좌우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유세 도중 숨진 민주당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185만 표의 무효표가 나오기도 하는 등 최초의 직선제 선거는 한 치 앞으로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제5대 민의원 입후보자 득표 속보(1960)
선거 개표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후보자나 유권자에게 가슴 졸이는 순간이지만 득표 상황과 선거 결과를 접하는 방법은 오늘날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1960. 제5대 민의원 선거 개표 게시판 중계
1963.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 개표 현장
1963, 신문사 선거 개표 현황
손으로 한 장 씩 일일이 열어 확인하는 개표 방법과 개표 결과를 직접 게시판에 옮겨 적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자동으로 투표지를 분류하고 후보자별 득표수를 집계하는 전자개표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전자개표기는 원래 금융기관에서 수표나 지로용지를 분류하는 데 사용하던 것을 선거용으로 응용하여 도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개표현황조사 역시 현대화되어 통신망을 통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방송국에 전송되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과거에는 각 언론사 사옥에 게시판을 설치하여 직접 옮겨 적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제8대 국회의원선거 개표현황판(1971)
1960년 민의원 선거에서 입후보자의 득표 상황을 수기로 현황판에 반영하는 분주한 사람들, 현황판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당히 이채롭습니다.
한편, 1948년 총선거를 기념하여 체신부에서 발행 한 우표와 최초의 지방선거인 1952년 시읍면 의회의원 총선거 실시에 대한 문서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1952. 1973. 투표소에 줄 선 시민들
4. 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 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 4대 정, 부통령선거를 말합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 치료 중 급서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확신하고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공작을 진행합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자유당은 4월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 위협, 야당참관인의 축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기권자의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발표 등의 방법을 자행했으며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서 경찰과 반공청년단을 동원하여 야당 후보에 대한 테러와 폭력을 감행하게 됩니다.
개표 결과 총 투표자 1천만 명 중 이승만 960만 표, 이기붕 830만표, 장면 184만 표로 집계되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이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3월 15일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를 계기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3.1운동과 4.19 혁명 정신을 계승한다는 선언적인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게 한 4. 19정신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