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신현락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비행의 흔적은 고도의 경계에서
흰 옷고름 포시럽게 풀어가면서
시나브로 무늬를 바꾼다.
가속하지 않는 고요한 날들
시간의 선을 따라서
오랜 마음의 폐허를 지나도록
여태 무엇하고 살았을까.
구름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줄의 시마저 사라져가고
원경의 바깥으로 펼쳐지는 연한 하늘색은
가장 평화로운 기억의 뒤란을 보여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알몸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놀고 있는지
비행의 저 너머로 한 세기가
눈앞을 가물가물 벗어나고 있다.
가을, 비탈에 서다
시집을 펼치자 가을 한 그루
비탈에서도 하늘을 향한
삐뚤삐뚤한 필체가 성성하다.
자꾸 미끄러지는 비탈을 끌어안으며
고집스럽게 저 나무를 버티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려면
모가지의 각도를 겨울 쪽으로 좀 더 기울여야 한다.
다시 한 장을 넘기니
말의 뿌리 바위 속에 구불구불하고
사유의 나뭇가지 다른 나무에 걸쳐 있다.
삭풍의 예감이 도돌이표로 걸려 있는
갈잎의 노래이긴 해도
뿌리가 간직하고 있는 노래의 기원을
사경寫經할 시간이 아직은 조금 남았다는 듯
소슬한 바람에 또 한 번 몸을 뒤척인다.
그렇지만 가을 비탈길은 지나가고 기다리는 것들이
아무래도 얼마쯤은 비켜서는 것이어서
꼭꼭 여며둔 단풍잎 같은 애틋한 사연들마저
자꾸 다른 세상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에 남아 있는 건
끝내 몸 밖으로 흘려보내지 못한 것들,
사경死境을 헤매면서도
마른 뼈처럼 촘촘하게 가을을 이룬 것들.
시집을 덮는다.
가을 속의 겨울, 겨울 속의 봄으로 상재된
비탈진 생애를 오래 보고자 한다.
흰빛의 인과율
1
눈밭에서 강아지와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저렇게 순결한 시간 위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건
족보에 오르지 못한 강아지와 아이들뿐이라는 생각.
모든 빛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현상이
검은빛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 반대말이 꼭 흰빛이 되는 것은 아니다.
2
소년은 묻는다.
눈雪을 어떻게 그리나요?
옛사람들은
달을 그리기 위해서 구름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지 않은 부분으로 달을 나타냈단다*.
눈을 그리기 위해서는
눈이 아닌 것들을 그리고
그리지 않은 부분을 눈이라고 하면 안 되겠니?
붓을 잡던 소년의 두 손이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다.
3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폭설을 만난다.
눈보라에 갇혀 생매장을 당하는 짐승의 무리와 마주친다.
만년설로 뒤덮인 눈밭에서 흰 소의 목덜미를 만져본다. 앞발굽에선 그가 걸어온 먼 길이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다. 하얀 입김을 증기기관차처럼 내뿜으며 모가지를 들었다가 내 가슴 근처로 내려놓는다. 그의 눈 속에선 그가 몰고 온 시간의 능선이 숨소리처럼 새어 나와서 그와 나를 감싸 안는다. 그의 거대한 몸이 조금씩 무너질 때마다 멀리 눈사태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뒷무릎이 꺾이고 어디선가 설해목이 부러진다.
흰 소는 나의 만 년 전 조상이었다, 고 해몽을 해보지만
만 년 전에는 조상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된 곳은 태백의 지하갱도였다.
떼죽임당한 시간의 내면은 묵광으로 번들거렸다.
땅 밑으로는 수천 길 수직으로 검은 강이 흘렀다.
석탄이 된 짐승의 뼈들이 지층을 이루고 있었다.
흰빛을 따라간 목숨의 마지막이 여기구나. 생각했다.
만년설을 걸어 죽음을 찾아가는 짐승처럼
최초의 흰빛과 최후의 검은빛 사이에서 울려오는
마지막 리듬에 발을 맞추고
눈보라 속에 잃어버린 길을 묻고 또 물었다.
4
산목숨으로는 그릴 수 없는
처음,
그 흰빛,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하지 말아야 할
약속 같은 흰빛,
해와 달을 따라간
순수 혈통의 마지막 족보.
검은빛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는 자의 내면의 밑그림.
고통의 하얀 입김.
그 흰빛.
5
누가 빛을 직진한다고 했는가.
흰빛은 수만 번 꺾인 빛의 기억이다.
석탄에서 불을 훔쳐낸 건 오직 사람뿐이지만.
석탄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문자로 기록되는 것은
모두 시간이 굴절된 흔적이다.
그 흔적이 흰빛을 띤다는 것을
어느 날 알게 되리라.
하얗게 세어 버린
당신이거나 짐승의 머리카락을,
6
흰빛을 호명한다.
죽음처럼 환한
시간의 운명이기도 한
그곳으로,
언젠가 도래할 시의 첫 구절처럼,
신생아의 울음처럼,
햇빛의 모음으로 발음되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무릎을 꺾는 짐승의 성대처럼,
*
홍운탁월: 달을 그릴 때 달을 먼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달 주변에 끼어 있는 달무리를 퍼뜨려 달을 표시하는 동양화의 기법.
인과의 그물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날 아침이 그랬다. 그동안 새벽 운전을 오래 했기에 해 뜰 무렵에 하는 운전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사무실에 가기 위해 했던 새벽 운전은 전과는 다르게 위험을 많이 느꼈다. 아무래도 시외보다 시내 쪽으로 운전을 하는 것이라 건널목이 자주 있는데 신호를 위반하거나 과속하는 차량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새벽에 운전하는 사람은 대부분 일찍 출근하기 위해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야. 방심하는 순간 사고가 나는 거지.” 아파트 정문을 나와 동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아내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느낌이 있었다. 위험하다는 느낌의 반복이 일정한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 시간적인 선후관계에 의한 연쇄로 일정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인과라 한다. 인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합리적인 법칙이다. 트럭에 추돌당한 뒤 곰곰이 그 순간을 되새김질하면 모든 순간의 느낌과 생각과 말이 그 사고를 향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날 새벽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아니면 1분이라도 후에 출발했으면……’라는 생각과, ‘그냥 가까운 호매실 인터체인지로 들어갔으면 괜찮았을 텐데……’라는 생각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의 씨앗에 관련된 항목들이다. 시공간 속에서 모든 사건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 사고라는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사고가 발생하였고 일주일의 입원을 거쳐 요즘은 한방치료를 받고 있다. 이것 또한 인과의 연쇄이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에서 이 법칙, 인과율을 벗어나는 현상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인과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들은 무엇일까? 해탈? 자유의지? 시간의 진공상태? 무의식?
우리는 감각으로 대상을 느끼고 의식을 형성한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상이 없으면 의식도 없다. 하지만 경험의 대상이 사라진 이후에도 의식의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마음이 있다. 또한 개인적인 체험 이전에 집단적인 경험의 원형이 나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이성으로 잘 알 수 없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무의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무의식에도 인과율이 적용된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대개 무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사회적인 규제나 심리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우므로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것도 같다. 이렇게 정리해도 무언가 찜찜한 게 남는다. 라깡은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서 기표의 연쇄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지 않았던가. 기표가 있으므로 그에 따른 기의, 상징적 의미가 있을 터이고, 그것은 사물의 인과 연쇄처럼 의미의 연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니까 그의 견해에 따르면 무의식에도 인과율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생각으로 한 편으론 끔찍하다. 그러므로 무의식에는 시공간이 없는 게 아니라 시공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뿐이고 그 속에서도 우리는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선가에서 이것을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삼을 정도로 근원적인 물음이고 보면 나로서는 불가지의 영역이다.
물음의 방향을 바꾸어보자. 모든 인과의 끝은 어디인가? 인과의 연쇄가 끊어진 곳, 시간적인 선후관계가 끊어진 곳, 공간과 시간이 없는 곳, 기표의 연쇄가 끊어진 곳, 언어가 끊어진 곳, 세계가 사라진 곳, 블랙홀과 같은 그곳. 얼핏 죽음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너무 쉽다. 죽음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퉁쳐서 모든 의문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언어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죽음 또한 삶의 결과가 아니던가.
죽음까지도 이러하다면 정녕 인과를 초월한 개념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삶에 깊이 내재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말이다. 문득 신이 생각난다. 하느님? 음, 그건 너무 나갔다.
교통사고에 관한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사고 이전에 느낌이 있었고, 느낌 이전에 신체가 있었고, 신체 이전에 시간이 있었고, 시간 이전에 카오스가 있었고, 태초에 말이 있었고……. 느낌이 말이 되었고, 말 이후에 사건이 있었고, 사건 이후에 그에 따른 결과가 있었고, 그게 쌓여서 삶이 되었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그렇다. 언어에 매여 있는 한 우리는 인과의 연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와 나의 밖에 있는 세계는 모두 언어로 연결되어 있다. 언어 외에는 세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가 있다고 선사들은 말하였으나 그건 세외世外의 경지이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가 보기엔 언어를 사용하는 한 의미의 연쇄가 끊어진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세사에 얽혀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의 연쇄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과 세계가 일치하지 않다는 데에 그 실마리가 있다. 언어는 결코 실재實在를 붙잡을 수는 없다. 언어로 표현하는 한 우리의 감각 또한 실재를 포착하는 게 아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금언은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지 말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뜻은 아니다. 언어와 세계의 불일치성에 모든 존재의 욕망과 모순과 갈등이 발생된다. 그러하다고 해서 그게 꼭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주체와 세계, 인식과 사물의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서 새로운 시공간이 생성되고, 기표는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의미를 변형시킨다. 언어도 변화하고 나도 변화한다. 내 동일성의 언어적 그물에 포착되는 부분은 아주 적다. 그 나머지의 세계는 내 의식에 부재하고 여기저기에 자유롭게 흩어져 있다. 내가 호명해 줄 때를 기다리면서 매 순간 느낌을 통과하여 언어로 우리 앞에 머물렀다가 물거품처럼 다시 사라지는 그것. 교통사고로 인한 지금의 아픔이 말이 되기 이전의 느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과의 수레바퀴에 올라타지 않은 미지의 시간 속에서 나의 표현을 기다리는 세계가 거기에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가.
세계는 원인과 결과의 순환적 연속이며 삶은 인과의 언어적 그물이다. 언어는 구속이면서 자유이다. 언어는 시간처럼 매 순간 죽으면서 다시 태어난다. 모든 언어는 삶과 죽음의 흔적을 사유하고, 우리의 삶은 인과의 그물을 통과하면서 다시 새로운 시간과 마주치고 더욱 넓어지고 촘촘해진다. 그 안에서 흔들리기 쉬운 모든 인간 삶의 허약함조차 소중하다. 그물의 한 코를 흔들면 전 존재가 흔들리지만, 그것도 괜찮은 삶이다. 만남이 이별을 통하여 의미 있는 사건이 되고 삶이 죽음이 연하여 더욱 생생한 시간이 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