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염창 달고리 마을
거기서 김포로 이사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다
집근처에 한강으로 흘러가는 개울이 있었고 작은수문도 있었다
개울은 깊이가 허리쯤 찼다
엎드려 헤엄치면 조개가 손에 잡혔고 수문옆 10미터 길이정도의 다리밑에는 작은 게들이 거품을 물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1학년 중간쯤 여주로 이사갔다
그리고 가을쯤에 광주로 이사갔다
6학년 2학기쯤 서울 효제국민학교로 전학 그리고 1981년 충주로 내려왔다
충주하면 비료공장이 생각나는 곳. 아무 연고 없는데도 충주사람이 되었다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충주 마즈막재를 올라갔다
차를 타면 1분도 안되는 거리를 걷자니 30분 이상이 걸린다
마즈막이란 글자때문인지 죽음이 가까와지는 것 같다
옛날 한양에서 청풍, 단양, 영월등 지역으로 낙향을 하던가
강원도 첩첩 산중으로 유배를 갈 경우에 마즈막재를 넘어 남한강 뱃길을 이용했다.
죄수들은 마즈막재를 넘어 바로 아래 남한강이 흐르는 종민동 나루에서 배를 타고 유배지로 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대로 청풍, 단양, 영월등에서 끌려온 죄수들은 배를 타고 내려와 종민동나루에서 내려 마즈막재를 넘어
충주 포도청이나 사형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단 이 고개만 넘으면
다시는 살아돌아가지 못한다는 관례에 따라 마즈막재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 이 부근에 호랑이가 많았는데 충주 성안 사람들이 그 고개를 넘으면
호랑이에게 물려 살아오지 못했다는 데서 나온 명칭이라고도 한다. 참 호랑이가 많았던 모양이다
위쪽으로 뻗은 길은 충주시내로 들어가는 길이고 왼쪽은 목벌 남벌 단양을 갈 수있는 길이다
오른쪽은 심항산과 댐으로 가는 길로 7,80년대는 종민동 주민들과 학생들은 이 길로
마즈막재를 넘어 시장을 보러가거나 학교를 가곤하였다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말로는 아침 일찍 시장을 가는데 머리에는 이고 손에는 들고
가파른 산길을 넘어 마즈막재까지 왔다고 한다 그리고 목벌쪽에서 나오는 일신산업 탄광에서 나오는 합승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는데 차문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사람이 미워졌다 한다
어쩌다 차를 놓치면 2시간길을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주로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한다
가는데 2시간 오는데 2시간
마즈막재 정상에 한켠으로 호국영령탑이 있고 반대편에 고려대몽항쟁 기념탑이 있다
1253년 몽골군은 5차 침입을 감행했다
22년 전 몽골 1차 침입 당시 충주성이 몽골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양반들은 다 도망가고
노비와 평민들만 남아서 몽골군을 물리쳤다. 그런데 도망갔던 양반들이 돌아온 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양반님네들이 자기 집 은그릇 없어졌다고 몽골군을 물리친 노비들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거다 몽골군을 이긴 천민과 노비들은 결국 정부군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1253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양반들은 일찌감치 보따리 싸서 남한강을 타고
영월, 정선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거나 새재 넘어 경상도로 피했다
남은 건 또 오갈 데 없는 노비와 천민들 중심의 민병들.
그런데 그 지휘관은 바로 20여 년 전 몽골군의 2차 침입 때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였던 김윤후였다 그가 충주방어사로 와있었던 것이다
당시 살리타가 죽음을 당한 처인성은 원래 처인부곡이라는 천민들의 주거지였고
성이라고 해봐야 축구장보다도 좁은 토성이었다 김윤후는 그 천민들을 데리고 농성을 준비하다가
살리타라는 대어를 낚은 것이다 김윤후는 상과 벼슬을 내리려는 조정에 대고 이렇게 얘기하였다
“제가 아닙니다. 저는 살리타를 죽일 때 활을 든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공이 없는데 상을 받겠습니까.”
“공 앞에 귀천이 없다”
충주는 고립된 성이 되었다 이미 충주 주변은 몽골군의 세력권이 되었다
더구나 충주 천민들은 20여 년 전 싸워 이긴 뒤에 도둑으로 몰리고 여기에 항거하다가
관군의 칼에 목이 달아났던 아버지, 아저씨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1253년 10월, 몽골군이 충주산성을 포위하고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면서 70여 일에 걸친 공방전이 시작된다.
충주성 사람들은 “왜 내가 싸우고 있지?” 하는 질문에 홀연 가슴을 찔린 채 주저앉는다
외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도 도둑 누명을 쓰고 죽어간 아버지, 아저씨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느 날 김윤후는 성 안의 천민과 노비들을 불러 모았다
퀭한 눈, 풀려버린 다리, 늘어진 어깨의 민병들. 그런데 병사들이 뭔가를 잔뜩 들고 나왔을 때 천민들,
특히 노비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노비 문서였다
발목을 잡아챈 족쇄처럼 자신들의 부모와 자신과 자식의 이름과 인생을 결박한 문서.
김윤후는 외친다.
“만일 힘을 다하여 싸워 이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관작을 줄 것이다.”
그리고 노비 문서에 불을 질러버렸다.
“너희는 오늘부로 양민이다. 문하시중도, 병마사도 될 수 있는 양민이다.”
김윤후의 호령은 계속됐다.
“저 소와 말들을 보아라. 공(功)대로 나누어주겠다. 공 앞에 귀천이 없다.”
이제 함성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굳게 닫힌 충주성문이 열렸다. 맹공을 퍼붓다가 지쳐 있던 몽골군들은 별안간 성에서 쏟아져 나온
고려의 민병들 앞에 기절초풍을 했다
“관청 소속 노비들의 명부를 가져다 불살라버리고 또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나아갔다(<고려사> 권 103, 김윤후 열전).”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권리라 할 ‘자유’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어. 충주성 전투는 그 빛나는 예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된다.
충주댐 건설 전에는 앞에 있는 호수에 사람들이 살던 마을과 길이 있었다
10월 20일 저녁에 충주문화회관에서 음악회가 있었다
안무가 몸에 안 익어 어설프다
젊은 사람들은 잘도 흔든다
에이 작년만해도 몸이 부드러웠는데...
10월 22일 오늘은 손자 생일이다
아침에 일찍 서둘러 서울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김에 연세암병원에 있는 동생을 찾았다
병원을 가던 길에 출출하여 음식점을 찾는데 줄서서 있는 사람이 있길래 보니 수제비집이었다
들어가 한그릇 시켜먹고 병원을 향하였다
할머니 며느리 아들이 꾸려가는 식당인가보다
할먼니는 수제비 퍼서 그릇에 담고 여자 두분은 연신 밀가루덩어리를 조각내 들통에 던져 넣는다
한 아주머니는 서빙하고 아들인가 하는 사람은 손님 좌석배치해준다
사는 것이 신나고 활력이 넘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에 고추가루를 듬뿍 넣으니 먹음직합니다
명원에 와보니 여동생이 혼자 앉아있다
음악을 잘 듣고 있나 물으니 이어폰이 고장 났다 한다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와 헤드셋을 하나 샀다
동생 머리에 걸치니 딱 맞는다
말기암이다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병원을 나왔다
언제까지 살른지...
내 아내도 암으로 하늘나라 가고 아버님도 암으로 가셨다
막내 여동생은 말기까지 가서 극적으로 소생하여 10년넘게 건강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누가 인생을 아름답다 했는가?
왜 꽃이 예쁘다고 하는가?
그것은 유한하기때문이 아닐까?
연세대로이다 수많은 사람들 학생들이 등하교하는 학교길이다
지나치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귀에 이어폰들 끼고 있다
길을 물어보려면 이어폰 안낀 사람을 골라야 한다
말없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이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들 가고 있을까?
딸네 집으로 왔다
여기에는 새로 세상에 나온 손녀가 있다
누구는 죽어가고 누구는 태어나고...
딸은 세째를 낳고 키우느라 피곤한가 보다
수안보근처에는 어떤 분이 50정도 인데 자녀를 아홉을 낳았다
아홉자녀 키우려니 경제적인 도움이 될까 하여 이장을 겸하고 있다
가을이 되니 갈대도 옷을 바꿔입었습니다
이 새상에 힘든 길 가는 동안 참된 평안이 어디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여동생의 쾌유를 기도합니다
동창님들 동창회 잘 마침을 축하합니다
새로운 회장님 화이트맨?님 화이팅!!!
첫댓글 하루일과가 엄청많아서 정신없어요 ㅎㅎ
저녁에 맛있는 것 먹고 힘내세요
마즈막재 잔차로넘어보싶으네요
좋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