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귀때기청봉에 ‘털진달래’ 꽃 군락지가 있다. 털진달래는 설악산과 지리산, 한라산 등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토종이다. 어린 가지와 잎 면에 보송보송 솜털이 나 있는데, 고산 능선에 무리지어 피어나면 붉은빛 물결이 장관이다.
해발 1578m, 귀때기청봉은 매년 봄 털진달래로 화사하게 뒤덮이는 명소로 유명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우뚝 솟아오른 산세가 일품이어서 최고의 고산 조망터로 꼽히는 귀때기청봉의 사면이 붉은 꽃 물결로 춤추는 광경을 눈에 담는 것은 고산에 오른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개화 시기가 또한 절묘하다. 5월 중순 설악산 입산 통제가 해제되는 시기와 맞물려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맞아 기지개를 켜는 산객(山客)들을 환영하는 꽃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매년 설악산 입산 통제가 끝나는 첫 주말에는 붉은 봄꽃 향연을 보려는 발길이 전국에서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진다.
군락지는 귀때기청봉 피라미드 경사면의 사방에 드넓게 분포해 있다. 이따금 바윗돌까지 들어 옮길 듯한 거센 강풍과 비바람 악천후에 고스란히 맞서야 하는 고산의 급경사 비탈면에서 어떻게 이렇게 앙증맞은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어날 수 있는지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털진달래는 겨울 삭풍을 이겨낸 설악의 봄을 단장하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조경수로 신이 점지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털진달래로 뒤덮인 귀때기청봉 비탈 능선에 올라서면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해발 1708m)이 손에 잡힐 듯 위용을 뽐내고,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서북능선 등 설악이 자랑하는 암릉군이 용틀임하듯이 장관을 연출하니 털진달래를 만나는 날은 자연미의 극치를 선물받는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통 선홍빛으로 물든 귀때기청봉 비탈면에 서서 일망무제 설악의 비경을 눈에 담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듯이 털진달래를 만나는 길도 만만찮은 고행을 감내해야 한다. 한계령 정상의 휴게소를 들머리로 가장 쉬운 최단거리 접근로를 탄다고 해도 편도 3.9㎞의 비탈길 등산을 해야 한다.
더구나 털진달래 군락지에는 거대한 너덜바위 지대가 버티고 있다. 귀때기청봉 너덜바위 지대는 거의 국내 최대 규모에 속한다. 뒤때기청봉의 피라미드 비탈면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정상까지 약 900여m에 걸쳐 크고 작은 바윗돌이 가파른 경사면을 뒤덮고 있다. 너덜바위 지대에서는 군데군데 꽂아둔 지주대가 곧 등산로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구간이지만, 이 또한 등산의 묘미라고 생각하면, 느릿느릿 바윗돌을 타고 넘으면서 설악의 비경을 쉬엄쉬엄 감상하는 것 또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더욱이 너덜바위 지대는 털진달래 군락지와 겹치는 곳이기 때문에 흰바위와 붉은 꽃 물결의 조화가 더 절묘하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일이 있다. 봄철 산불예방기간 운영에 따라 설악산 고지대 입산이 통제되는 기간이 매년 5월 15일까지여서, 털진달래 만개 시기와 맞물리는 것이다. 설악산 입산통제가 끝나는 직후에 서둘러 귀때기청봉을 오른다면, 털진달래 장관을 그런대로 눈에 담을 수 있지만, 2∼3주라도 늦어지면 고산의 특성상 꽃은 이미 지기 십상이어서 만개 시점을 맞추는 것이 매우 어렵다.
털진달래를 만나기 위해 귀때기청봉 산행 계획을 세운 등산객들에게는 정말 실망스런 상황이 아닐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털진달래 개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아까시 나무 등 다른 꽃도 마찬가지다. 지구 온난화로 날씨가 더워지다 보니 야생 꽃 개화 시기가 일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머지않아 털진달래 개화 시기가 입산통제 기간에 묻혀 꽃 구경을 할 수 없는 날이 도래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앞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지구 온난화 상황에 맞춰 입산통제시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하고 있다.
산행길에 이동하면서 만난 한 택시 기사는 “5월 초에 노동절과 어린이날 대체 휴무 등 황금연휴가 몰려있는데, 입산 통제 때문에 연휴 효과가 반감된다”며 “지구 온난화 등 기후변화 여건을 고려해 이제는 통제기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묘안이 필요한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국립공원이 우리 산하의 자연을 보호하는 목적 외에도 국민들에게 휴식과 힐링 활력을 제공하는 것이 존재 이유라면, 통제기간을 조정하는 것이 일견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대형 산불이 매년 봄 전국적으로 더 빈발해지고 있으니 이래저래 야속한 산불이다.
◇…그런데 ‘귀때기청봉’ 이라는 이름이 참 재미있다. 아니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까.
설악산 고봉은 최고봉인 대청봉에서부터 중청·소청·끝청 등 모두 ‘청’자가 붙는데, 귀때기청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름의 유래인 즉, 옛날옛적에 설악산 고봉들이 높이 경쟁을 해 순서를 정할 때 귀때기청봉이 자기가 설악산에서 제일 높다고 으스대다가 시쳇말로 ‘귀때기’를 얻어맞고 지금의 외딴 장소로 밀려나 ‘왕따’를 당한 듯 홀로 서 있게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는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