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자 수필
문득.1355 ---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에서
이태준 선생은 이역만리 울란바토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비록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죽어서도 고향 땅에 돌아가지를 못하고 무명으로 잊힐뻔하다 늦게나마 업적을 기릴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몽골 정부는 2,000여 평 부지를 제공했다. 연세의료원은 2000년 7월에 기념비 제막식을 하고 이듬해 준공식을 했다. 15평 규모의 기념관엔 안창호에게 보낸 친필 서신, 김규식의 사촌 동생이며 부인인 김은식의 사진, 여운형의 이태준 묘소 방문기, 이태준의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사진과 학적부, 선배이자 안창호의 의형제인 김필순의 사진 등이 진열되었다.
중앙 통로 양편에 꽃밭을 만들어 우리의 꽃인 백일홍과 금잔화 그리고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등을 심어놓았다. 꽃나무 하나 제대로 보기 힘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가뭄에 물까지 흠씬 뿌려주었다. 꽃은 고사하고 나무도 흔치 않은 이곳 울란바토르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조경이다. 아쉬움이야 떨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꽃밭을 꾸미고 가꾼 곳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큰 관심이고 큰 대접이다. “감사합니다!” 단 한 마디로 모두를 대신할 수밖에 없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제2의 고향 몽골에서라도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지금은 고국에서 수시로 오가는 관광객, 기업인도 많으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조국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지 싶다. 기념관 앞에서 선생을 처음 뵈옵는 인사를 올리려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새삼스레 우리의 암울했던 일제 만행의 역사가 여기서 다시 들추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선조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얼마나 악전고투하며 외롭게 떠돌아야 했는지 새삼 눈시울을 붉히며 떠올리게 한다. 어렵게 얻은 광복이고 독립인데 70년이 훌쩍 넘어도 오로지 ‘탓. 탓, 탓’만 명분으로 내세우며 끊임없는 싸움질에 나라가 비틀비틀 엉망진창에 곤두박질치는 것은 아닌지 면목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