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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4월10일 월요일 [(자) 성주간 월요일]
[수도회]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으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2,1-7
† 복음 요한 12,1-11
◈ 오늘의 묵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맞아들이는 가족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마음은 사랑이
흘러넘쳤습니다. 마르타의 사랑은 손님을 맞이하고 시중드는 봉사로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로 표현됩니다. 그
사랑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닦아 드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라자로의 가족들은 예수님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러한 사랑과 감사의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웠습니다. 왜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궁리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향유로 적셔질 당신의
몸을 관조하셨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이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쁨으로, 사랑 가득 찬 감사로 피어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당신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종으로서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를 지고자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지극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2017년 가해 4월10일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는 외치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7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1
종종 운전을 하다보면 난폭운전을 하는 분을 만납니다. 좁은 틈도
가만히 두지 않고 끼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빨리 가지 않는 차를 향해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경적을 울리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인상을 쓰게 되면서 괜히 미간 사이에 깊은 골이 하나 더 생기게
됩니다.
‘저렇게 급하게 운전을 해도 몇 분 더 빨리 가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위험하게 운전하는 거야?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간다는 말도
모르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흉을 볼 때가 참 많았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2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성지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속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성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호흡을 조절하고 엉덩이
부분에 힘을 꽉 주고서 운전을 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에서는 ‘꾸르륵’ 소리를 연발하면서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좁은 틈이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갈 수 있다면 끼어들기를 하게 되었고, 천천히 가는
차가 있으면 ‘제발 좀 빨리 가주세요.’라는 마음으로 경적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사고 치지 않고 무사히 성지에 도착했고 가장 먼저
화장실부터 가서 일 처리를 했습니다. 바로 이때 난폭운전을 하던 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운전을 했을 것이라는, 그래서 이제는 ‘그럴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혹시 상대방의 입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나의 입장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마리아를 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은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옳지 않는가 라는 말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비싼 향유를 부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던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해서 주님을 일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다 이스카리옷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의 마음을 먼저
보았다면 어떠했을까요? 함부로 마리아를 판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산술적인 계산만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내세웠기에 마리아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을 평가 절하했던 것이지요. 가난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모습으로 행동하고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면서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커다란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는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까지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어제 강의를 했던 부천에 위치하고 있는 삼정동 성당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곡이지요. 그런데 이 곡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당시에 유명했던 피아니스트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중에 오른팔을 잃는 중상을 입은 것입니다. 피아니스트에게 팔을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똑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절망 속에
빠졌지요. 더군다나 당시에는 왼손잡이를 무시하고 천대하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절망은 더욱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에게 모리스 라벨은 그를 위한 곡을 만들어
헌정합니다. 한 손으로 칠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곡이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인 것입니다. 이 곡을 비트겐슈타인은 연주를 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예전의 유명세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
빠졌던 그를 다시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준 곡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을 희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습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할까요?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베타니아의 성 라자로 성당의 성화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으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10일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십니다(12,1).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기 위해 발길을
멈추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이
고을은 예수님께서 방문하시어 정담을 나누시고(루카 10,38-42),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11,1-44)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 것은, 그분께서 자신들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마리아는 오빠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죽음으로 갈라지게 된 오빠와의
생명의 고리를 다시 이어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에 비하면, 값비싼
향유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합당한 보답은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이 진실하고 클수록 세상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현세의 물질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기꺼이 다 내어줍니다.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습니다.
한편 유다 이스카리옷은 마리아의 행동을 보자,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5)
하고 따집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해서 불만을 제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가로채곤 했던 도둑’이었던(12,6) 그의 눈에는,
물질만 보였던 것입니다.
돈과 물질에 애착을 두는 이들은 삶의 중심과 판단 기준을 물질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사랑과 선과 정의, 공생과 공유의 삶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유다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듣고 보면서도, 끝내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비극을 자초합니다.
나는 마리아와 유다 중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까? 혹시 눈에
보이는 현세적 가치나 물질에 매여,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을 보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고 믿는다
하면서도, 유다처럼 이해득실을 따지고, 가난한 이들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거나 권력과 명예욕을 충족시키지는 않습니까?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유다와 같은 도둑의 마음과 태도를
버려야겠습니다. 이제 나를 향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마음을 추슬러야 할
때입니다. 더는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그 무엇도 아까워 말고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되돌리는 오늘의 마리아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고, 아낌없이 되돌리는 사랑을 실천하여,
이 세상에 사랑의 나르드 향기를 가득 채워야겠습니다. 마리아처럼
허리를 굽혀 예수님의 발에 사랑의 향유를 발라드림으로써, 부활을
향한 예수님의 장례 준비에 참여하는 복된 우리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고통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
2017년 가해 4월10일 성주간 월요일
고통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
연중 교회 전례력으로 가장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 선배 수사님께서 가톨릭교회
전례에 대해 아주 쉽게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톨릭교회 전례는 큰 산 두 개를 넘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 산은
대림시기를 포함한 성탄절(한라산)와 사순시기를 포함한 부활절
(백두산)입니다.
수사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성주간이 교회 전례력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가를 아주 쉽게 잘 설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주간동안 교회는 우리 주님의 수난, 십자가 죽음을 더욱 진지하게
묵상하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매년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치욕스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반복해서 읽게 하고
기념하게 하게, 또 기억하고 회상하게 하는가, 묵상해봅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수난과 죽음 거기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이고도 보편적인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수난과
죽음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맥을 달리합니다. 그분의 수난은 우리가 겪는 수모처럼 마냥 괴롭고,
그저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겪으신 고통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낮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
고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겸손의 극치를 명백하게 보여준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는 철저하게 다른
죽음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그분의 고통은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고통이었고 그분의 죽음은 희망을 머금은 죽음, 부활의
서광을 알리는 생명의 죽음이었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도 고통을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 앞에 엄청
두려워떱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생각을 바꿔먹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과거 전통적인
고통과 죽음의 개념을 대폭 수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부터 고통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대대적인
전환을 해나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아야겠습니다. 희망과 기대, 설렘과 기쁨의
마음으로 고통과 십자가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다양한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도 바꿔야겠습니다. 이 땅위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고통과 십자가에 담겨있는 가치와
의미를 찾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의미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작업이 우리가 매일 겪은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유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 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십자가가 다가올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불변의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고통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도 주시지만 고통을
극복할 힘도 동시에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4월10일 성주간 월요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 12,1-11
교구에 있기 때문인지, 가끔 본당에서 ‘특강’을 부탁하곤 합니다. 이번
사순시기에도 몇몇 본당에서 특강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서울이지만
올해에는 멀리 광주에 있는 본당에도 다녀왔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제가 올리는 강론을 보셨고, 이번 기회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광주까지 가는 기차도 타보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시기에
우리들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해 주십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 고통
중에, 시련 중에 주님께 의탁을 하면 주님께서는 다 이해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의 배반을 겪으셨고, 조롱과 채찍질을
받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넘어지셨고, 그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토록 믿고 의지하였던 하느님마저 침묵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은 저는 9월 5일에 첫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고, 고향에서 친지들도 병문안을
왔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오셔서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의사
선생님, 간호사 분들의 치료와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호로 저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저는 그 뒤로 제게 주어진 시간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시간들이 어느덧
26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시간들 모두 감사할 일들이고, 고마운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세 번째 말씀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입니다. 예수님 곁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두 명의
죄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게 되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에게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죄인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가 크다 하여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죄를 뉘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상대평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절대평가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우리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노래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소년들은 어른 되나
얼마나 먼 바다 건너야 갈매기는 쉴 수 있나
얼마나 긴 세월 흘러야 사람들은 자유 얻나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얼마나 긴 세월 흘러야 저 산들은 바다 되나
얼마나 여러 번 올려봐야 푸른 하늘 볼 수 있나
얼마나 큰 소리 외쳐야 이 노래가 들려지나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얼마나 긴 밤을 지새워야 푸른 불빛 볼 수 있나
얼마나 높은 산 넘어야 고운사람 만나보나
얼마나 큰 눈물 흘려야 환한 웃음 가져보나
오, 내 친구야 묻지를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주님 수난 성주간을 지내면서 고통 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만이 우리 모든 삶의
고난과 역경을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섬김의 지도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10일 성주간 월요일 (요한12,1-11)
섬김의 지도자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어찌되었든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공식적인
지도자임을 상징하고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받게 되는 데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통치가 아래에서 위로향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누르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김으로써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요즘 보세요.
정치꾼들을!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양 기뻐해서야 되겠습니까?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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