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이바노스의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프리아모스’(1824년).
설국열차의 한 장면. 기차에서 자란 남궁민수(송강호)의 딸 요나(고아성·가운데)는 열차 밖으로 나와 살아남는다. 아이로 상징되는 미래에 대한 가치를 보여준다.
■ 가족은 국가의 적인가
몇몇 재벌·정치인들 앞에선 공평 얘기하지만 뒤에선 자식 위해 보편적 가치 망가뜨려
가족은 과거의 조상·미래의 아이 이어주는 연결자… 국가는 법·제도·교육으로 뒷받침
국가는 가족 때문에 아프다. 가족은 국가의 틀 안에 있고 가족 안에서 자라난 인간은 자연히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가족과 국가 사이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심각한 일들은 가족과 국가 사이에서 터진다. 재벌과 정치가들은 국가와 가족이 충돌하는 지점을 형광펜처럼 꼭 찍는다. 기업은 국가적인데, 기업 총수는 자식에게 세습하려 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정치가는 온 국민에게 공평한 국가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뒤에선 자기 자식의 가치를 위해 국가의 보편성을 훼손한다. 가족은 국가를 좀먹는 벌레인가?
그래서 플라톤 같은 사람은 국가의 적인 가족을 제거하고자 한다. “여자들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 그리고 자식들도 공유하게 되는 것이… 최선의 것이 못 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박종현 역) ‘국가’의 이 구절은 보편적 가치의 요람인 공화국을 구원하기 위해선 가족의 근본 요소인 배우자와 자식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근대의 루소는 이런 플라톤의 생각을 따르고 싶은 처지, 즉 부양의 노고를 못 이겨 많은 자식을 제거하고픈 처지에 놓인다. ‘고백록’에서 “나 자신을 플라톤의 ‘공화국’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는 루소는, 사사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며 자신의 다섯 사생아를 국가에(구체적으로 고아원에) 양도한다(그냥 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의 정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의 공정성에 다섯 신생아를 참여시키는 사상가를 목격하는가? 그저 무책임한 한 아비의 모습, 처절히 실패한 가장을 볼 뿐이다. 가족을 부정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현실이 고작 근대 고아원이라니. 루소 자신도 후회하고 있다.
어쨌든 이기적인 가족을 극복한 국가에 대한 루소의 생각은 이 같은 인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력히 표명되기도 한다. 교육에 관한 책 ‘에밀’에서 전하는 이야기다. 스파르타의 한 부인이 다섯 명의 아들을 전쟁에 보냈다. 전장의 소식을 가져온 노예는 부인에게 아들 모두가 전사했다고 말한다. 부인이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화를 내자 전령은 급히 조국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제야 그녀는 국가의 승리에 대해 신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루소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시민의 실체이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끝에 루소는 ‘하고 싶은 일(본능에 따라 자식을 사랑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보편적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을 비난한다. 그런 자는 타인과 자신 모두에게 아무 이득도 주지 못한다. 결국 가족은 국가의 적이고 없어져야 하는가?
세습 왕조 시절엔 왕의 가족이 곧 국가였다. 하지만 오늘날엔 국가가 가족의 자리를 대신해 주려 노력한다. 국가는 고아에게는 부모가, 독거노인에게는 자식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삶의 형식을 제공하려 한다. 그러나 국가의 선한 의도는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을까? 가족은 국가에 투항해 완전히 동화될 수 있을까? 혹시 국가와 가족 사이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날 어떤 국가도 가족과 대립하지 않는다. 공립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글짓기 숙제를 봤더니, ‘가족’이 주제였다. 왜 국가는 이상 국가가 되기 위해 가족을 해체하지 못하고 교육 과정 안에 집어넣는가? 이는 가족을 해체하고, 한때 가족이었던 개체들을 국가 안에 모두 수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가족의 자리를 대신할 지혜도 돈도 없다. 결국 가족을 대체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으며 막대한 돈을 내느니, 차라리 가족제도에 얹혀 간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가족의 가치가 국가를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국가보다 가족을 먼저 체험하며, 이 체험은 국가 속에서 증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국가는 법과 제도를 통해 가족을 지배하지만, 가족은 국가 바깥에서 계속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한다. 이런 사정을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가족에게 어떤 틀을 남기는 경우에조차, 가족은 국가의 바깥에서 자신을 동일화한다.”(김도형 외 역) 롤랑 바르트는 가족의 독자성, 유일무이함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은 가족을 직접적인 귀속 집단으로 약호화시키든가, 혹은 갈등과 억압의 뒤엉킴으로 본다. 학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나의 가족을 ‘가족’의 일반적 의미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어머니를 일반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다.”(조광희 역)
그렇다면 이런 독자적인 공동체인 가족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근본 원리일까? 우리는 부모 자식 사이의 강렬한 사랑이 지닌 결속력을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사랑은 한 집안 전체의 울타리를 만드는 보편적인 원리는 아니다. 왕가나 재벌가의 부모 형제 손자들은 서로 싸우지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직접 낳은 자식과의 관계를 넘어서면 사랑은 아주 빠르게 옅어진다.
가족은 바로 ‘죽은 자의 매장’이라는 ‘의무’를 통해 가족이 된다. 게오르크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점을 잘 간파한다. “한낱 개체에 지나지 않는 무력한 시신(屍身)은 모두가 공유하는 개인의 위치로 올라선다.…가족은 사자(死者)로 하여금 공동세계의 이웃이 되도록 주선하는바, 이 공동세계는 사자를 마음 내키는 대로 파괴하려는 자연력이나 하등동물을 제압하고 무력화시킨다.…가족에게 맡겨진 사자의 매장이라는 이 최후의 의무야말로… 적극적인 인륜적 행동이다.”(임석진 역) 죽은 자는 곧바로 자연의 분해 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가족은 그를 매장하고 기리면서 영원히 가족의 한 사람으로 있게 한다. 그리고 이 매장의 의식이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모든 가족이 억지로라도 모이고, 남 같이 지내던 친척들도 참여하는 차례, 제사 등을 보라. 이 행사들은 모두 매장된 죽은 가족(조상)의 힘이 공동체를 만들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랑은 부부, 부모와 아이 사이, 이렇게 두세 사람을 연결하는 작은 끈이 될지 모르지만, 죽은 가족을 기념하는 의무(매장과 제사)는 한 가문의 모든 성원을 결속한다. 가족이란 공통의 죽은 조상이 연결해주고 있는 사람들이며, 죽은 이는 연결자로서, 가족 안에 계속 인격으로 머문다.
국가는 이런 방식의 공동체를 구성할 줄 모른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죽어간 애국자나 국가적 재난의 희생자들을 기념하지만, 국가의 대의와 상관없이 죽어간 개별자들을 사사로이 기념하지는 않는다. 그들에 대한 애도는 오로지 가족의 몫이다.
죽은 조상이 가족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힘이라면, ‘자식’은 인간이 무한한 시간을 얻는 길을 열어준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인간은 삶과 세상을 유한한 한 인생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이 더 이상 살지 않을 미래에 쓰레기로 뒤덮일 지구를 우려하며, 후손에게 닥칠 자원 고갈을 두려워한다. 자신은 백 년도 못사는데! 왜 인간은 자기가 죽은 뒤에 펼쳐질 미래를 자기의 고민 아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것일까? 그것이 자신의 아이가 살아갈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살아갈 시간이기에 한 인간은 무한한 앞날을 자신이 책임지는 자신의 시간으로 가지게 된다. 후손이 누릴 미래를 자신의 시간으로서 염려하며 유한한 자기 생의 계획을 그 미래에 맞춰 짜나간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은 죽은 뒤에도 이어져 나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유한한 나의 삶 너머 다른 사람, 즉 아이의 삶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국면을 레비나스는 화체(化體·trans-substantiation)라는 말로 표현했다. 실체(substance)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게서 보듯 고립된 존재이다. 화체란 바로 이 실체의 삶이 다른 실체로, 즉 아이의 실체로 옮겨가는 일(trans)을 뜻한다. 인간에게 만약 무한한 미래가 허용된다면, 오로지 현재의 나와 다른 후손의 실체로 옮겨가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정체성’에서 한 인간이라는 고립된 실체의 삶이 아이라는 다른 실체에 옮겨탐으로써, 개인에게 제한되지 않는 미래가 가능해지는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이재룡 역)
이렇게 가족은 인간이 조상에 대한 의무 속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아이를 통해 무한한 미래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중요한 것은 이 가족이 국가, 나아가 인류라는 보다 큰 공동체를 위한 가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내 아이에 대한 관심은 다른 이의 아이에 대한 관심이 되고, 미래의 인류에 대한 관심이 될 것이다. 한 가족의 가치가 보편화하는 모습을 ‘일리아스’의 극적인 한 장면이 암시한다.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찾아가 그의 살해당한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오려고 담판을 벌일 때,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 또한 누군가의 아들임을 일깨운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오! 나와 동년배이며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의 아버지를.”(천병희 역) 아킬레우스는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며 흐느낀다. 국제 정치에 가능할 것 같지 않던 휴전과 평화가 잠깐 도래하며, 헥토르의 시신은 아버지에게 돌려진다. 적도 나도 결국 가족의 일원인 까닭이다.
그러나 가족 이기주의를 부르고, 자기 가족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려 하는 인간의 악덕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몇몇 가족이 없었다면 국가는 그렇게 방황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므로 가족과 국가 사이에 놓인 인간의 임무란, 가족이 병균으로 변이하는 비극을 막는 의사의 사명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화체(化體·trans-substantiation): 하나의 실체(substance)에서 다른 실체로의 전환을 뜻한다. 그래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포도주로 전환된 사건을 일컫기도 한다. 레비나스에게 이 개념은 무한한 시간이 가능해지는 방식이다. 무한한 시간은 한 사람의 실체에겐 불가능하다. 그는 유한한 시간을 누리고 늙어 죽는다. 몸이 빵과 포도주로 변하듯, 가족 속에서 하나의 실체(부모)가 다른 실체(아이)로 변하는 방식으로만 시간은 무한하게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