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273) 지혜의 눈을 뜨다
보이는 세상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 마음이 투사한 대상만을 보기 쉽다 /셔터스톡
천주교에는 관상(觀想/觀相)이라는 명상법이 있습니다. 천주교 영성가이자 신비주의자인 영국의 토마스 머튼경은 어느 날 평소 지나던 거리에서 무심하게 있다가 홀연히 사람들 속에 두루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사람들(相)이란 환영을 보면서 그들 형상을 보고 인식하는 나라는 현상속에 깃들어있는 보는 [시선과 앎]이 바로 나와 세상 전체를 모두 보고 인식하며 감상하는 신의 눈이었음에 문득 깨어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그는 나중에 [신을 보는 내 눈이 곧 나를 보는 신의 눈이다]라고 읊었던 것이지요. 즉 나라든가 신이라든가 하는 경계는 원래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과 감각의 분별 망상이 만든 환상이었음에 깨어난 것입니다. 신(부처)은 내 밖에 따로 계셨던 것이 아니라 나조차도 이미 신의 일부인 거지요.
불교의 반야심경에도 무안계(無眼界)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눈이 없으며 눈이 보는 세상도 따로 없다는 황당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참뜻은 [본래 내 눈이 보는 게 아니라 법신(神)이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니 보이는 세상(眼界)도 보이는 그것만이 아님을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생각과 느낌대로 눈이 본다 여기며 세상은 그냥 물질 세상이 있는 것으로만 보지요. 그래서 지혜의 눈(법안)이 떠지질 못하고 자기 생각 속에만 갇혀서 자기 생각이 투사된 꿈같은 세상과 대상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기 마음이 투사한 대상만을 보므로 환상을 본다고 말하는 겁니다. 피올라 마음학교에선 헤븐존 과정에서 사랑명상(당근명상)을 통해 이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러면 누구나 자기가 눈을 통해 세상을 본 게 아니라 생명법신자리가 눈을 통해 보고 안 것임에 깨어납니다.
이를 법안(法眼)이라 하는 이유는 이걸 스스로 자각해야만 진실을 보는 지혜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법은 곧 진리요 생명이니 그걸 보는 지혜의 눈이란 말입니다. 처음엔 이 눈을 떠도 눈따로 대상 따로 나뉘어지지만 나중엔 세상 전체가 온통 이 눈 하나가 되어서 마침내 눈(앎)이라 할 분별조차도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하면 자기 마음 속에선 모든 게 나 따로 너 따로 각각 부분(개체)들로 나뉘어지기에 모든 것은 다 진리(神/佛)라는 일원론(一元論)에 계합하지 못한 채 허상의 삶을 살게 됩니다. 즉 진리인 실상을 보는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 삶은 자기 생각이라는 꿈속의 삶이라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