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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묵상글 (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 같아지셨으니 같아지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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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0 04:42
- 같아지셨으니 같아지자!
히브리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이고,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아지심 중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유혹받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으셨다는 것이며,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혹과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고,
유한하기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고통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그 반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굶주림은 본성상 인간이 너무도 싫어하고 원치 않는 것이며,
반대로 먹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기에 식도락이란 것이 있지요.
그러니 굶주림 또는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어렸을 때의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고
이 고통과 비교하면 다른 고통은 사치스러운 고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고통은 이렇게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곧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치 않는 곧 하기 싫은 것을 다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즐거울 것이고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인간은 유한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고통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이렇게 인간의 조건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되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은 피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 나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리면
그래서 주님처럼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게 되면 영적인 고통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얘기하듯 주님도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심으로
당신의 고통이 영적인 고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고통은 우선 시선 돌림입니다.
고통에 갇히지 않고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고 이것이 실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린 고통에 신음만 할 뿐 기도로 바꾸는 데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스럽기에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그런 관상적인 기도를 우린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기도의 더 높은 차원입니다.
시선을 고통으로부터 하느님께 돌릴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따르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이런 영적인 고통을 받고 사랑의 순종을 산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순종의 근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도 근본에서 본을 받는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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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빛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 ‘사랑받았다’라고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쓸모 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 그리고 도움 되는 사람, 도움 되지 않는 사람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쓸모 있고, 도움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만 보게 되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사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일까요? 많은 봉헌과 거창한 희생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웃으며 인사만 잘 해도 상대는 어느 정도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사랑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유다교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도 바로 사랑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식해야지, 그냥 막연한 전통을 따르기 위한 단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그 안에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일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이 ‘사랑’에 있듯이, 우리도 ‘사랑’에 기준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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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가? 바로 이 순간을 움켜잡아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시작하라.(괴테, ‘파우스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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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인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신랑인 그리스도의 때’가 열렸음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새로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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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하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요즘 여야의 정치 논리를 보며 잇속 챙기기에 바쁜 많은 정치인이 거짓말을 밥을 먹듯이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정한 원칙과 신뢰는 사라지고 자기 이득만 앞세웁니다. 그들을 백성을 위하는 대변자로 뽑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그 백성에 그 지도자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느 세월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 가르침을 주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의식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리고 이웃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내용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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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밥을 할 때 ‘뜸’을 들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뜸’을 들여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밀당’을 하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흥정’을 합니다. 너무 싸게 사려하지 않으면 주인도, 손님도 적당한 가격으로 흥정합니다. ‘뜸, 밀당, 흥정’은 어쩌면 사람 사는 재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친한 사이에는 ‘농담’도 합니다. 가끔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들어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농담은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부부가 헤어지려고 이혼 법정으로 가면 판사가 이야기를 경청한 다음 판결 내리기 전에 ‘숙려기간’을 줍니다. 이제 헤어지면 남이 되기에 잠시 서로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줍니다. 이런 숙려기간을 통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며 다시 부부의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마치 흥정하듯이, 밀고 당기듯이, 뜸을 들이듯이, 숙려기간을 주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른손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은 멜로디이기에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합니다. 왼손은 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리듬을 맞추면서 오른손이 가는 길을 밀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당에는 두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 두 개의 조직이 본당 사제를 도와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합니다. 하나는 사목 평의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재정 평의회입니다. 사목 평의회는 마치 오른손과 같습니다. 각 분과는 1년 동안 해야 할 행사를 기획합니다. 본당의 행사는 전례의 주기에 맞추어서 진행됩니다. 멜로디와 같습니다. 한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너무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재정 평의회는 왼손과 같습니다. 본당의 행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예산의 범위를 정합니다. 예산이 부족하면 행사를 줄이도록 요청하기도 합니다. 꼭 필요한 행사라면 필요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사목자는 사목 평의회와 재정 평의회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친교와 사랑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듯이, 사목 평의회와 재정 평의회 그리고 사목자는 공동체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국가의 기능도 3개의 헌법기관이 있습니다.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입니다. 사법부는 법과 원직에 따라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군사 독재 시절에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처럼 판단했던 오욕의 역사가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법의 이름으로 감옥으로 갔고, 죽었습니다. 양심수가 생겼습니다. 행정부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나라는 행정부가 소수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집니다. 국가의 질서가 무너져 내립니다. 부실 공사로 아파트가 붕괴하기도 하고, 멀쩡하게 보이는 다리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인사말이 되기도 합니다. 입법부는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당리당략에 의해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뒤로하는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됩니다. 입법부는 토론과 대화를 충분히 거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당제를 받아들입니다. 1당의 입법부는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25년 대한민국은 ‘뜸, 밀당, 흥정, 숙려기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행정부에서 선포한 ‘비상계엄’입니다. 집단 지성이 발휘 되어서 헌정질서가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 아래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합니다. 2025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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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고 말입니다.
즉 혼인 잔치에 어울리는 말은 ‘단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신부이고, 신랑으로 오신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단식은 중요합니다. 쉬어가는 시간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무언가를 내보내는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단식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도 단식은 중요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에서 우리는 단식합니다. 몸도 단식하지만, 마음도 단식합니다.
기도 생활에도 단식은 존재합니다. 기도 안에서의 단식은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과 잡념들을 끊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기도 안에서의 단식은 다른 것을 끊어내고 주님과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미사는 혼인 잔치입니다. 이 기쁜 미사 중에 우리가 걱정과 분노, 두려움과 분심으로 신랑이신 주님께 집중하지 못한다면... 미움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에 대한 평가로 주님께 집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고도 그 잔치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미사 안에서 만이라도 우리가 기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사 안에서만이라도 신랑이신 주님과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 작은 메모 한 장
예전에 사용하던 노트를 정리하던 중
한 노트에 꽂혀있는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그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자칭 예수의 벗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아주 조금 밖에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주님께 고통 대신 위로만을 찾기 때문이다.-
사랑은 고통을 함께할 때 시작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만을 찾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기적이고 또 위선적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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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잣대
“사랑 또는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논쟁-새것과 헌것”입니다. 저는 논쟁은 가급적 삼가며 괄호안에 넣고 침묵하는 편입니다. 이보다 시급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을뿐 아니라 사실 논쟁은 결론이 없음은 물론 분열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요 서로의 관계도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면 떠오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수십년전 일화이고 수차례 인용했지만 지금도 생생합니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났던 장상으로 기억합니다. “밥안먹고 교만한 것보다는 밥먹고 겸손한게 낫다”라는 지극히 평범단순한 언급입니다. 단식하고 남판단하는 교만보다는 단식 않고 남판단하지 않는 겸손이 낫다는 것입니다. 수행하다 보면 비교와 더불어 판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침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의 잣대는 단식이나 침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 모든 수행 덕목은 상대화 됩니다. 침묵이 대부분인 독거 노인 경우 같은 경우는 침묵보다는 말해야 하고, 가난이 일상화된 이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많이 먹고 많이 말하는 편에 속한 사람이 유념하여 실천해야할 단식과 침묵입니다.
그러나 영성생활에 단식이나 침묵이 유익한 것은 분명합니다. 수행의 원칙은 자발적 사랑입니다. 단식을, 침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발적 사랑으로 수행할 때 진정 자유로울 수 있으며 남판단하지 않은 겸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단식은 인간의 법이나 사랑의 환대는 신적 법이기에 단식에 우선하는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때문에 단식도 일단 보류하는 것입니다. 단식의 대원칙은 이미 주님이 분명히 밝혔습니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의 대원칙입니다.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겸손하고 지혜로워 이처럼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하느님만이 아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느냐?” 질문하는 사람들은 바로 무지의 반영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단식이 아니라 사랑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단식은 상대적이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기쁘게 지내야 할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고 나머지는 축제인생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결코 경쟁 대상이 아닌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하며 사랑의 잣대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사랑의 잣대로 분별해야 할 함을 주님은 한마디로 정리해 주십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의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으로 늘 새포도주의 현실 내용을 담아내야할 새부대의 마음을, 사고를, 의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분별의 잣대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했을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내 이해지평을, 사고지평을, 마음을 넓히고 깊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별의 잣대는 사랑 또는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분별의 잣대로 삼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히브리서가 위대한 대사제 예수님의 정체를 명쾌하게 밝혀 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대사제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신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순종을, 겸손을, 비움을 배우는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는다면 날로 구원의 근원인, 예수님을 닮게 되고 진정 분별의 잣대인 지혜와 사랑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착하다’라는 말보다는 ‘지혜롭고 자비롭다’라는 표현이 예수님께 적절하고 이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의 현현인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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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로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기쁨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기쁨
그리하여 새로운 기쁨
기뻐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한껏 오르네
슬픔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슬픔
그리하여 새로운 슬픔
슬퍼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깊이 여무네
희망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희망
그리하여 새로운 희망
희망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차지게 영그네
절망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절망
그리하여 새로운 절망
절망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낮춰 솟아나네
만남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만남
그리하여 새로운 만남
만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넓게 열리네
헤어짐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헤어짐
그리하여 새로운 헤어짐
헤어지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애틋이 이어지네
당신은 늘
앞선 당신과 다른
처음 만나는 당신
그리하여 새로운 당신
당신과 함께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당신의 참된 벗이네
나는 늘
앞선 나와 다른
처음 만나는 나
그리하여 새로운 나
나와 함께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오롯이 나로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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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마르 2,21)
내적 기쁨과 외적 기쁨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 줍니다. 둘 다 영성 생활과 관련한 말입니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합니 다. 이를 통해 우리 영혼은 우리 창조주 앞에서 내면의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됩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나까?’라고 아무개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나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바람을 간직하고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런 사람은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난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실로, 그런 사람은 자신의 뜻으로 하느님의 뜻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대로 된 가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가난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여의고, 그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신적인 진리를 걸고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의도, 곧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겠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여러분이 영원과 하느님을 바라는 마음을 먹는 한, 여러분은 제대로 가난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만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최초의 근원으로 돌아갔을 때, 거기에는 하느님이 없었으며, 나는 나의 원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순수한 존재였으며, 진리를 기뻐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아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바랄 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란 것은 바로 나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야말로 내가 바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하느님과 만물을 여의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지의 상태를 떠나서 나의 창조된 존재를 받아들이자마자, 나는 하느님이라는 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로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에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었고, 있던 그대로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고, 자신의 창조된 존재를 받아들이자마자, 하느님은 더 이상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피조물 속에 있는 “하느님”이었습니다.(31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요한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당신이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으니, 당신의 증언은 유효하지 않소.”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여도 나의 증언은 유효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은 유효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잡지 않았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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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참 기쁨은 새 부대에 담을 때에만 /
박윤식 [big-llight] 250119. 19:43 ㅣNo.179422
이는 예수님 말씀인 ‘새것’과 유다교인 ‘헌것’을 단식 논쟁에 비추는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 “요한과 바리사이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 제자들은 어째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하면 단식할 수는 없지 않으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라. 그러면 그때에 그들도 단식할 게다. 새 천을 헌 옷에 깁지는 않는다. 그러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옷이 땅겨 심하게 찢어진다. 또 새 포도주를 헌 가죽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린다.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두어라.”
예로부터 이루고 싶은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최대한 절제했다나. 일종의 단식이다. 이는 하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나. 이렇게 단식은 수단이요, 은총을 얻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단식은 새로운 마음으로 하란다. 바리사이들은 단식 자체를 맹종하고 강요했지만,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신다. 사랑을 위한 믿음이어야지, 고통을 위한 믿음은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만으로 보이려들지 말라시며, 오직 하느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실천하는 게 단식이란다.
사실 단식은 육체적 수련 행위일 따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올바른 단식‘에 대해 언급하셨다. “너희는 단식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찌푸린다. 그러니 단식 때는 머리에 기름 바르고 얼굴은 씻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구원의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에. 다만 그분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비통해하며 단식하였다. 따라서 참된 단식은 예수님 수난에 참여하며 회개하는 행위이리라.
아무튼 우리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회심하고 싶어 하나, 그게 생각대로 그리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나 자신이 너무 낡고 고집스러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에. 어쩌면 종교적 의미에서 단식은 흔히 육신의 배부름과 욕망에서 생긴 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행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다.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종교적 의미보다, 이민족의 지배에서 유다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율법이자 사회적 계약으로 전락하여, 단식의 참된 의미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셨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곧 그분 말씀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이들에게 단식 행위는 마치 잔칫집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에게서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껴 시기와 미움이 치솟았다.
이처럼 새것과 헌것에는 차이가 드러났다. 사랑은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에 겪는 그 고통에 함께하며 안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나와 그들을 묶는 거다. 지금 내 삶의 기쁨을 어디에서 찾는지를 돌이켜보자. 이웃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참 기쁨을 느낀다면, 그건 성숙한 신앙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새 부대에 담을 궁리를 새로이 해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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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과방장을 감탄하게 하신 ‘좋은 포도주’이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1항에서 구약을 뛰어넘는 신약의 새로움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한 사건’은 나와 온 우주를 뒤흔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네 인간의 노력이기보다는 자신이 만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에 화답하듯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항 첫 시작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다시 활기차게 하신 ‘차고 흘러넘치는’ 충만한 포도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우리는 모두 ‘사랑의 취객’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그분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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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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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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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 19)
잃어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본질이
함께하는 사랑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잔치와 단식은
모두 신랑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새롭게 되지
않으면
잔치도
단식도
빛을 잃습니다.
그릇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단식입니다.
담아야 할 것을
담는 것이
단식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수난도
있습니다.
수난을 통하여
드러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사랑은
찢어지는
이 여정까지
건너뛰지
않습니다.
더 견고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결실을
맺으십니다.
새 포도주를
마주하기 위해
새 부대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쓴맛과 단맛을
번갈아
함께 맛보며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잔치이며
또한 단식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에
함께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욕망은
결코
복음을 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오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단식은
이제 그만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사랑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잔치도 사랑
단식도 사랑
공적인 생활도
십자가의 수난도
모두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고
더 집중하기 위해
겸손과 절제라는
단식이 있습니다.
단식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새 부대에 담는
이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는지를 묻는
소중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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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우리는 분명 의미있는 고통, 가치있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어울려서 운동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휴일이면 오후 내내 운동하는 것도 부족해서, 밤늦게까지 축구를 하고 농구를 했습니다.
다른 수도회 형제들과 시합이라도 있으면 내기를 걸었습니다.
이기면 삼겹살 무한 리필, 지면 수도원 돌아가서 라면에 찬밥.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공을 찼습니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던 라이벌 팀에 시원하게 대승을 거둔 저녁이었습니다.
배도 고프겠다, 고기 뷔페집에 들어가서 원 없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소맥도 제조해 마시고, 거기다 마무리로 철판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승합차 안에서 끝 기도도 바치고 묵주기도도 바치기로 했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도 오락가락 혼미해지고,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하다는 진리. 사실 제대로 된 단식은 인간을 기도로 안내합니다.
단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단식은 인간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과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인간의 마음과 영혼, 감각과 오감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식을 통해 기도할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곧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다면 ‘지금 기도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단식할 때가 있다면, 단식을 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던 그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축제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인해 시작된 공생활 기간은 일반 혼인 잔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대한 기쁨과 구원의 축제였습니다.
구원과 은총의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잔칫상에 올라온 맛갈진 음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내온 새 포도주를 큰 잔에 콸콸 부어 서로 건배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였습니다.
율법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며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그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태도, 영혼의 상태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때에 합당한 근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해야 마땅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들고 있는 부대의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저기 구멍나고 헤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백성은 사상 초유의 대혼란을 겪고 있고, 하루하루 안갯속같이 불투명한 길을 걷고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고통, 의미 있는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해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리가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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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이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의 의미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새것과 낡은 것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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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사는 제사일까, 축제일까?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예배의 차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바라는 제사 형식이었지만, 신약은 신랑을 맞이하는 축제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실 신약에 와서도 구약의 예배 형식대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중세 시대에 성체성사는 깊은 경외심으로 접근되어야 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실체 변화’ 교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영성체를 모독죄로 연결시키며 성체를 합당하지 않게 받을 경우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신학적 강조는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지나친 양심의 가책을 유발했던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는 성체를 연 1회, 특히 부활 시기에만 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엄격한 참회의 요구 조건은 많은 이들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독할 위험을 피하고자 차라리 영성체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나친 신중함과 성체성사에 대한 망설임은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영성체를 멀리함으로써 많은 신자는 교회의 성사적 삶과의 중요한 연결을 잃어버렸습니다.
16세기에 등장한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반응 중 하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교회가 두려움과 법주의를 조장하고, 그리스도의 해방적 은총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체 변화와 같은 특정 가톨릭 성사적 관행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부담만 느껴야 한다면 멀어지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제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여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처럼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기쁨으로 그분을 붙들려고 하는 순간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당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의 활동을 깨닫고는 기쁨의 마니피캇을 부르신 모습과 같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예배방식입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경섬유종증으로 외모가 심각하게 훼손된 비니치오 리바(53)를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감싸 안아주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습니다.
리바는 이달 초 바티칸의 세인트 피터스 광장을 방문했다가 교황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습니다.
리바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꼭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었고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체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바는 당시 교황과의 만남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내가 먼저 교황의 손에 키스했고, 교황의 다른 손은 나의 머리와 상처를 어루만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교황은 내 얼굴에 키스하면서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머리는 그의 가슴 앞에 있었고, 그의 손은 나를 감싸 안았다.”라며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어루만짐은 1분가량 이어졌지만, 나에게 그것은 영원 같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리바는 “교황은 완전히 침묵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끔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며 “당시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이 강하게 뛰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것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의
기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 기쁨이 그리워 단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더 데레사 성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영혼을 잡는 사랑의 그물이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우울한 형식주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쁨을 지향하는 신앙입니다.
그 기쁨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단식하는 신앙입니다. 성체성사의 혼인의 의미가 올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가톨릭교회는 점점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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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18-22)”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고,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을 하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던
‘슬픔의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시대입니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서 예수님을 떠나 있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를 짓고서 예수님을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갈 때, 그때 회개의 표시로 단식을 할 수 있는데, 그 단식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점에서는 ‘슬픔의 단식’이 되지만, 용서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기쁨의 단식’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공적으로 단식을 합니다.
그 단식은, 꼭 슬픔의 단식인 것만은 아니고, 용서와 구원의 기쁨이 들어 있는 기쁨의 단식입니다.>
3) 단식이란, 먹는 것을 중단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래 단식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단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죄 때문에 얻지 못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참회’이고, 육신의 목숨을 버려서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타내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식은 쓸데없는 헛고생이 될 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떤 정치적인 주장을 하는 방법으로 단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위선인 경우도 많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로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단식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4) 21절-22절의 ‘새 천 조각, 새 헝겊,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깁는다.’는 말과 술을 부대에 담는다는 말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권위 있는(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마르 1,27).
‘새롭다.’는 ‘하늘에서 왔다.’로 해석할 수 있고(묵시 5,9),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요한 6,68).
반대로 ‘헌 옷, 헌 가죽 부대’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이고, 생명력 없는 쭉정이 같은 생활입니다(마태 3,12).
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이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는데(마르 10,19),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고(마르 10,20), 예수님께서는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재물에 대한 집착과 애착심을 버리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이 곧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활’이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도 않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십계명을 겉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죄를 안 짓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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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 16, 29-31의 말씀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즉 자기 죄를 씻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 단식하며 재계를 지킨 겁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일주일에 두 번씩,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지키기는 커녕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만 보이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단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단식할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지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의 기쁨을 누릴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단식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입니다.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하는 속죄와 정화의 단식은 주님의 탄생과 함께 끝났습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걷고 난 후에,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음을 기억하고, 그 큰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분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그 날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깨어 기다리는 단식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저 끼니를 거르는 단식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찬 얼굴로 사랑을 실천하는 단식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단식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누리는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 즉 ‘새 포도주’를 맛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담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헌 부대’ 즉, 편견과 선입견, 고집으로 가득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내 안에 가득한 ‘나’라는 자아를 비워내지 못하면, 새 포도주를 내 안에 담을 수 없는 겁니다. 사람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누군가를 내 안에 담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내가 경외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담고 그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날마다 조금씩 그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마음에 담은 채로,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노력을 통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러지 못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담지 못하고 나 자신이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다른 이 안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겁니다. 미움과 원망이라는 끈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든 ‘원수’라는 나무 기둥에 묶어두고서는,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내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건 다 저 사람 때문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이지요. 먹음직스러운 새 술을 눈 앞에 두고도 헌 가죽부대를 끌어안은 채 부러움에 군침만 흘리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억지로라도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아보려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뼈저리게 깨닫고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내가 변화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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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구약의 시대가 지나고 신약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서간 저자는 구약의 대사제와 예수 그리스도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사제는 사람들 손에 의해서 뽑힌 사람으로 그는 사람을 위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연약하고 자신의 죄를 졌기에 자신을 위해서도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편에서 표현한 것처럼 ‘하느님에게서 나신 분’으로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사제이십니다. 그러나 구약의 사제와 다른 것은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멜키체댁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례자 요한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주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대해 혼인잔치의 기쁨 중에야 어떻게 단식할 수 없다고 역설적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 죽음은 스스로 원하신 것이지만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도 설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죽음으로 순종하여 대사제로 임명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대사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대사제는 짐승을 제물로 삼아 바치지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 구약의 전통과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헌 헝겊과 새 헝겊의 관계, 묵은 포도주와 헌 포도주 부대, 새 포도주와 새 포도주 부대의 관계임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구약의 시대가 마감하고 새로운 제자와 교회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해서 도전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따르고 고통도 따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도전을 시도하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의지하며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합니다. 그 길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갈등이 있다하더라도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우리도 미래의 희망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안정의 자리를 떠나 역동의 삶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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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굶주림을 채우는 사랑의 단식 ♣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으로 단식했고(레위 16,29), 바리사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다(디다케 8,1).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마태 11,19) 통한 스승의 영향으로 예수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 단식하지 않았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19-20절에서 생전의 예수님의 입을 빌어 왜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단식을 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1세기 교회에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마다 단식했을 것이다.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디다케 8,1). 구약에서는 혼인잔치를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으로 표현했다(이사 61,1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시대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이 이룩되어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고 하신다. 따라서 단식을 해야 하는 동기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주셨다. 이렇게 해서 죄와 어둠과 나약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벌이시는 사랑의 축제에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초대받았다. 또한 하느님의 사람 되심은 인간의 한계와 제약 안으로 기꺼이 들어오신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에 우리 또한 그렇게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할 소명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사랑의 축제에서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며 신명나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은 까닭은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함이 곧 기쁜 축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축제는 어떤 이벤트나 행사가 결코 아니다. 이 축제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매순간의 축제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과 사랑의 축제를 거부하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의 부재’, ‘축제의 장례식장화’를 의미한다. 바로 이때야말로 그 빈자리, 결핍, 부재를 다시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해 단식을 해야 할 때이다. 우리네 주변을 둘러보자. 사랑 결핍, 선과 정의의 부재, 굶주림과 소외된 이들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현장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단식은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의무적으로 하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확인하고 공감하고,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사랑의 축제를 벌이지 못함에 대한 가슴 치는 회개의 몸부림이야말로 참 단식이다. 단식하는 그 빈자리에서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들, 억울함에 한숨을 멈추지 못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도록 하자. 새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철저하고 새로운 회개의 정신으로 단식하며(2,21-22) 그 빈 골짜기에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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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는 흔히 '착한 목자'로 비유하지만 언젠가 어느 신부님이 사제를 '버스 기사'에 비유한 이야기를 참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1) 버스는 남녀 노소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버스 기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버스에 태웁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는 남녀 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사제는 자기 혼자만 즐기기 위한 경기용 자동차, 스포츠 카의 운전자나 부자만을 위한 고급 승용차 기사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한 버스 기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제는 원하는 사람 모두를 차에 태우는 버스 기사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2) 그런데 버스에 '노약자를 위한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친절한 버스 기사는 노약자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승객들에게 권고를 해서라도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는 모든 이를 위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특별히 늙고 병들고 약하고 소외 받는 이들을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3) 버스 기사는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노선'을 충실히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노선을 따라 가면서 승객들이 불안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운전해야 합니다. 버스 기사가 기분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정해진 노선대로 운전하듯이, 사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고 사셨듯이 사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버스가 규정된 노선을 지키지 않고 난폭하게 달린다면 승객들이 불안에 떨게 되듯이, 사제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산다면 신자들에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안겨 주게 됩니다.
4)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지켜가면서 '정류장'마다 정차해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는 인생 곳곳에 서 있는 이들을 교회라는 버스에 싣고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로 향합니다. 시간에 쫓긴다고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서 간다거나 뛰어 오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냥 출발해 버린다면 좋은 기사가 아닙니다. 좋은 버스 기사는 조금 늦게 오는 승객들을 친절하게 기다려 주듯이, 좋은 사제라면 인생 여정에 곳곳에서 신앙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언제라도 문을 활짝 열어주고, 조금 늦게 오는 이들을 짜증내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5) 버스 기사가 출발 전에 버스를 잘 점검하고 기름도 충분히 넣어 두는 것은 '기본적 준비'에 속합니다. 중간에 기름이라도 떨어져서 버스가 서 버린다면 곤란한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사제도 자신의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 평소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도와 영성 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외적인 활동과 취미 생활에 정신을 빼앗겨서 기도와 영성 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언젠가는 기름이 다 떨어진 버스처럼, 고장난 버스처럼 중도에 서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마저 하실 수 없이 바쁜 중에서도 새벽이나 밤늦게 홀로 기도하셨다고 성서는 여러 번 전합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으로서 기도 없는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려움과 유혹을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6) 버스 기사는 운전석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오후나 밤 시간에는 피곤에 지쳐서 졸음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옆에서 지켜봐 주고, 피곤하고 졸릴 때에는 말이라도 붙여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는 인생의 반려자가 없이 홀로 살아야만 합니다. 때로는 힘들기도 하고 외롭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에 홀로 계셨습니다. 사제 역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게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시고 신자들의 기도와 격려가 항상 뒤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교회라는 버스의 기사는 사제이고 승객은 신자들입니다. 이 버스의 종점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이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이 버스에서는 노약자석이 유명 무실하지 않습니다. 기사인 사제는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길이 막혀도 인내롭게 종점을 향해 갑니다. 승객인 신자들은 버스 기사가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버스 기사는 때로는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게 자신을 인도해주는 운전 기사,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능한 분에게서 위로와 힘을 거듭 얻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히브 5,1-4)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대사제였고 사제들은 작은 예수님처럼, 만인을 위한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제가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사제는 하늘 나라의 율법을 잘 지켜야 하지만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고,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 율법이 참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율법주의에 빠져 단식을 왜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하면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완성은 곧 사랑임을 가르치시는 대사제 예수님의 단호한 외침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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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0.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구하는 삶
<2025.1.20>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3:1~14절)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구하는 삶❞
❚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궁극적으로 친히 이루어 주심을 믿고,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약속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1~7절).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고 밝히면서 여호수아가 더이상 전쟁을 할 수가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이 남은 전쟁을 이스라엘과 함께할 수 없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아 있는 족속들을 완전히 정복하기까지 믿음의 싸움을 계속 싸워 나아가야 함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말씀하십니다. 그 지역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블레셋 땅과 애굽 쪽으로 치우쳐 있는 가나안의 남부와 레바논 지역을 비록하여 가나안의 많은 지역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쫓아내셔서 이스라엘이 그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7절).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땅이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이스라엘은 그 땅이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기업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친히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역사하시며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어 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때로는 우리에게 먼저 믿음의 행동을 요구하시기도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기대해야 합니다(8~13절).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모세를 통해 요단 동편 지역을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그 지역은 아르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과 메드바 온 평지, 헤스본과 거기에 속한 모든 성읍, 길르앗과 헤르몬 산과 살르가까지 바산 일대였습니다. 그중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을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은 그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습니다. 이 지역은 본래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남쪽은 시혼이, 북쪽은 옥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요단 동편 땅은 본래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이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요단 서편의 땅 역시도 은혜로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을 그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도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면서 현재 직면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받은 복을 헤아려 보며 장차 받을 더 큰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14절).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으로 주어진 땅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불에 태워 바치는 제물인 화제물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을 기업으로 삼아 살아가야 했습니다. 즉 다른 지파 사람들이 수입의 십분의 일과 각종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의지해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레위 지파들에게는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혹여나 다른 지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아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살길이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그들을 책임지실 것이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믿는 우리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조만간에 사라지고 말 것들에 불과한 이 땅의 것들에 우리의 인생을 맡기지 말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우리의 진정한 기업으로 삼아 믿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심을 기대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에 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니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13: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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