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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과 염불 (1)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가 될 성품이 갖추어져있다. 부처님께서 처음 득도 하시고 “대지의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어 있으면서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하셨다. 우리 인간은 본래부터 불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미혹한 세계에서 아우성치며 생사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법을 설하시어 자기의 본분을 깨닫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다시 말해서 모든 방편들은 모든 이들이 미혹에서 벗어나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일러 주신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합한가 아닌가에 문제가 될 뿐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법문은 선종, 교종, 율종, 정토종, 밀종인데 이 법문들은 사람마다의 근기와 성향에 따르기 위한 것이라 어느 것이든지 한 문만 수행하면 될 것이다. 한국불교는 선(禪)과 함께 가장 많이 수행해온 법이 염불(念佛)인데도 언제인지 모르게 참선 불교 중심으로 변해 버린 우리 불교 풍토에서는 염불이 노인이나 하근기만의 신앙으로 전략한 경향이 없지 않다. 여기서는 특히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과 염불을 위주로 하는 정토종에 대해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을 연구하여 뚫는 것이며, 이른바 ‘자기의 성품을 밝게 깨쳐 본래 성품을 환희 보는 것이다.’ 선의 수행방법에는 모든 생각을 다 놓고 잠잠하고 또렷하게 자성을 비추는 묵조선(黙照禪)과 화두를 들어 연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있다. 어느 선이든 자력(自力)으로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므로 행하기 어려운 길[難行道]이라 한다. 반면에 염불이란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 불보살님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해 타력(他力)으로 정토에 왕생하여 궁극적으로 성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법이다. 아미타불의 원력이라는 배를 타고 안전하게 성불하는 것이므로 행하기 쉬운 길[易行道]이라 한다. 참선은 자기 힘으로 노력하여 도를 깨닫는 것이라 몹시 어려운 일인데 반해, 정토염불은 부처님의 가피로 극락왕생 하는 것이라 매우 쉽기 때문이다. 참선은 바다를 건너 저 언덕으로 갈 적에 자신이 수행하여 이르는 것과 같고 염불은 배를 빌려 큰 배를 타고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참선에서 명심견성(明心見性)은 이른바 확철대오를 가리키므로 만일 최상의 근기라서 깨닫는 즉시 증득(證得)까지 한다면 동시에 생사까지 해탈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설령 미래를 환히 안다 할지라도 오히려 다음 생 받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광(印光)대사의 ≪가언록(嘉言錄)≫에서는 “오조(五祖) 계(戒) 선사가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선사가 노공(魯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괜찮은 편이오, 그러나 해인(海印) 신(信)선사가 주방어(朱防禦)의 딸로 태어난 것은 너무 참기 어려운 타락이요, 또 안탕(雁蕩)스님이 진회(秦檜)로 태어난 것은 정말 몹시 불쌍하고 딱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토 법문에서는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갖추고 지성으로 염불하는 것이 극락왕생의 유일한 길이며, 미혹과 업장이 있는 그대로 왕생하고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퇴전(不退轉)의 지위에 이르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성불하게 된다고 하여 다른 법문을 수행하는 경우 모두 미혹을 끊고 진리의 몸을 증득해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것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참선은 자기 힘으로 수행하는 것이라 행하기 어려운 도이고, 염불은 다른 이의 힘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것이라 행하기 쉬운 법이므로, 참선은 근기가 수승한 이가 행하는 도요, 염불은 근기가 하열한 우둔한 남녀나 행하는 법인 것같이 생각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염불도 부처님께서 설하시고 찬탄한 법이요, 보살들이 찬양하고 권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한 법이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많은 대덕 스님들께서 많이 수행한 법이다. 그러므로 근기가 하열하고 우둔한 이나 부녀자들만이 닦는 도가 아니다. 옛날 견성한 선지식 중에는 아예 화두는 접어두고 염불에만 전념하는 이도 있었고, 참선과 염불 두 가지를 다 같이 겸하여 닦도록(禪淨雙修)권하는 이들도 많았다.
육조혜능(혜능:638~713)대사도 선정겸수(선정겸수)를 주장하면서 <선정쌍수집요(선정쌍수집요)에서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느냐?” 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하는 한 구절이야말로 만세의 티끌을 뛰어넘는 묘한 길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정당한 원인이요, 삼계의 천상인간의 눈이며 마음을 밝히고 제 성품을 보는 지혜등불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용맹한 장수이며 삿된 무리를 베는 보검이요, 오천 대장경의 골수이며 팔만다라니의 중요한 문이요, 암흑을 여의는 등불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요,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배이며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가장 큰 중하고 가장 높은 묘한 문이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이니라.
이 한 구절을 생각하여 생각마다 앞에 나타내고 때때로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며 일 없을 때(無事時)에도 염하고 일 있을 때(有事時)에도 염하며 살았을 적에도 이렇게 염하고 죽을 적에도 이렇게 염하며 한결같은 생각이 분명하면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오직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다른 생각이 없으면 손가락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세계로 가리라(一句彌陀無別念 不勞彈指至西方).’ ”
참선과 염불 (1)
오늘은 참선과 염불에 대하여 각 경론에서와 선사, 대덕들의 말씀이 어떤가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부처님은《대집경(大集經)》에서 “말법시대에는 이 법문이 아니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고 하셨고,《칭찬정토불섭수경》에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극락세계를 매우 칭찬하였고,《보적경(寶積經)》에서는 “세존께서 아버지이신 정반왕에게 염불하여 극락왕생하시기”를 간절히 권하고 있으며, 《보살내계경》에는 보살의 세 가지 서원중에 두 번째의 원이 아미타불 국토에 왕생할 것을 원하고 있고, 《결의경(決疑經)》에서는 “말법시대 일만 년 동안은 염불하는 것이 가장 견고한 수행이다.”라고 하였다. 또 《화엄경의》<보원행원품>에서는 보현보살이 “원하옵건대 이 목숨이 마치려 할 때 모든 장애가 다 없어지면서 저 아미타불을 친견하옵고 그 자리에서 극락세계에 가 나게 하여지이다.” 라고 두루 찬탄하는 내용으로 끝마치고 있으며, 《월장경(月藏經)》에서는 “나의 가르침의 말법시대에도 수많은 중생이 행을 일으켜 도를 닦겠지만 마지막엔 한 가지 얻을 것이 있을 터이니 그것은 오직 정토의 한 문(門)뿐이다. 그 길에 들어서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구하면 만 명중에 한 명도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과《반주경》,《대비경》,《대법고경》,《업보차별경》,《정토경》,《문수경》 등에서도 염불을 권하고 있다.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불교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대소승의 경전이 약 940여부에 달하는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경전이 무려 270여부나 된다. 따라서 불교경전 중 약 3분의 1정도의 경전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찬탄, 혹은 왕생을 권하고 있다. 마명보살의《기신론》,용수보살의《십주비바사론》,《대지도론》, 세친의《정토론》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과 근본수행이 확실한 수행이고 불보살이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수행하기도 쉬우며 성불하기 쉬운 수행법임을 찬양하고 있다. 중국의 백장선사는 병든 스님을 위한 기도나 입적한 스님의 화장하는 법을 모두 정토에 귀의하도록 규정하였고, “수행은 염불이 든든하다.”고 했으며, 진헐(眞歇)요(了)선사는 “정토법문은 최상의 근기를 직접 받아들이며 중하근기의 부류도 함께 받아들인다. 부처나 조사나 교종, 선종할 것 없이 모두 정토법문을 수행하여 한 근원으로 함께 돌아간다.”고도 말하였다.
그리고 고불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영명(永明)선사를 비롯하여 장로(長蘆) 이(頤), 천의(天衣) 회(懷), 원조(圓照) 본(本), 대통(大通) 본(本), 중봉(中峰) 본(本), 천여(天如) 측(側), 초석(礎石) 기(琦), 공곡(空谷) 융(隆)등 여러 위대한 조사들은 선종의 법맥을 이어 전하면서도 정토법문을 두드러지게 찬탄한 선사들이다. 그 뒤에 우익(蕅益), 절류(截流), 성암(省庵), 몽동(夢東) 등 여러 위대한 조사들도 모두 그러하였다.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육조혜능(慧能)스님은《선정쌍수집요(禪淨雙修集要)》에서 “오직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다른 생각이 없으면 손가락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세계로 가리라(一句彌陀無別念 不勞彈指到西方).”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선사들로서 선정일치(禪淨一致)를 주장한 이로서는 고려의 보조(普照)스님이《염불요문(念佛要門)》에서 “염불의 공덕이 성취되면 언제 어느 곳에나 아미타불의 참 몸이 나타나며 임종시에는 구품(九品) 연화대에 영접되어 그 상품(上品)에 왕생한다.”고 하였고, 태고 보우(太古普愚)스님 역시 고려스님인데《태고암가(太古庵歌)》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끊임없이 분명히 생각하면서 외울지니 힘써 정진하여 그 공덕이 성취되면 홀연히 분별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 몸이 뚜렷이 나투신다.” 고 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서산(西山)대사는《선가귀감》에서 “마명이나 용수가 다 조사이면서 분명한 말씀으로 왕생하는 길을 간절히 원했거늘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왕생의 길을 닦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였고, 또 염불에 대하여 “아미타불을 누구나 열 번만 부르는 이는 그 원의 힘으로 연꽃의 태속에 가서 나고 바로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삼세의 부처님들이 다 같이 말씀하셨고, 시방세계의 보살들도 모두 그곳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물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이 분명하게 전해오고 있으니, 바라건대 공부하는 이들은 아예 생각을 그르치지 말고 힘쓰고 힘써야한다.”고 하였다.
철오선사는 “하나는 부처님 말씀이고 하나는 조사의 말씀이니 어는 것이 더 중하고 어느 것이 더 경한 것인가?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 학자가 한 번 생각해보면 반드시 자신이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중봉선사는 “참선에는 염불을 겸할 것이나 염불에는 참선을 겸함이 불가하다.”라고까지 하였다.
참선과 염불 (3)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의 사료간(四料簡: 네 게송)을 살펴보자. 영명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제3조(祖)이며 정토종(淨土宗)에서도 제 6조로 섬기는 분이다. 법명은 연수이며 영명사(永明寺)에 머무르셨으므로 세상에서 영명선사라 부른 것이다. 그 분을 아미타불의 후신이라 하기도 하고 자씨(慈氏)가 화생하였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28세에 출가하였고 천태덕소(德昭)국사에게서 선지를 깨달은 뒤에 평생 염불을 하며 정토왕생을 원했다.
스님은 15년 동안 영명사에서 1,700인을 득도 시켰고 계를 준 이가 만여 인이며 40만 본의 미타탑을 찍어 보시하였고 모두에게 염불을 권하여 정토종을 널리 퍼뜨렸다. 그때의 모인 대중이 항상 수천 명이었는데 하루 염불을 십만 번씩 부르게 하였다. 고려 스님이 그의 문하에 가서 인가를 받은 이가 원공(圓空) 국사 외에 36인이나 되었다. 72세 때의 2월 26일 새벽에 일어나 분향하고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하고 앉아서 입적하였다.
스님이 자력과 타력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염불의 난이도(難易度)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말씀한 설법에 사료간이 있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보면 “참선과 교리에 밝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꼭 염불해야 당연하지만은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역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한다. 제 아무리 통달하였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사료간(四料簡)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이 같이 있다면
마치 이마에 뿔 달린 호랑이 같아서
현세에는 여러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는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로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將來作佛祖
여기서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이 같이 있다’고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 경지에 이른 뒤에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고 있다.
이런 이는 확철대오 하여 용맹스런 힘이 호랑이와 같은데 다시 염불로 생사해탈을 장악하게 되면 호랑이에 뿔까지 달린 격이므로 그 용맹과 위력은 견줄 데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승에선 뭇 사람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는 부처나 조사가 된다’ 고 한 것이다.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은 없어도 염불공덕이 있다면
만 사람이 닦으면 사람 모두 왕생하리니
다만 아미타부처님을 뵈옵게 되면,
아직 깨닫지 못할 까 근심하리오.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이 게송의 의미는 아직 확철대오 하지 못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생사해탈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아미타불께서 어서 오셔서 맞이해 주시도록 발원하면서 정토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은 이가 왕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십악(十惡)을 저지른 악역중생도 임종 때 간절한 마음으로 참회하면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면 설령 열 번이나 아니 단 한 번만 부르고 숨이 끊어지더라도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왕생할 수 있으므로 ‘만 사람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가 정토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미묘한 법문을 들어 단번에 불퇴전의 지위를 증득하며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지라도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므로 ‘다만 아미타불만 뵙게 되면 어찌 깨치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느냐?’고 한 것이다.
세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다면
열사람 중에 아홉은 미끄러지나니
중음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얼떨결에 그를 그만 따라가고 만다.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이 게송은 비록 참선으로 확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사람일지라도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끔히 끊어버리기가 쉽지 않아서 여전히 생사윤회를 피하기 어려우므로 ‘열 사람 중 아홉은 미끄러지나니’라고 하며, 중음의 경계란 중음신(中陰神)의 경계인데 임종 때에 금생 및 과거 전생의 모든 선악의 업력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을 뜻한다. 이때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그 중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에 이끌리는 것이므로 ‘얼떨결에 그를 그만 따라가고 만다.’고 한 것이다.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지옥의 쇠 침대와 구리 기둥을 껴안고서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으리.
無禪無淨土 鐵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箇人依怙
이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 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왕생의 발원도 없이 죄악을 짓는 일만 골몰하므로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다. 이런 자는 죄악의 과보를 피할 길 없고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데 불에 달군 쇠 침대 위에서 이글거리는 구리기둥을 껴안는 고통을 받고 만겁천생이 지난다 해도 구해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 할 이 하나도 없으리’ 라고 한 것이다.
말법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근기가 하열하고 업장이 막중하여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드문데 이 정토왕생의 염불마저 하지 않는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를 가엾이 여기어 영명선사는 이 사료간으로 일깨운 것이다.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요,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이다. 깊이 궁리하고 음미하면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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