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과학관과 윤보선묘소를 찾아
2020년 6월 2일,김 홍수 교수,박 병무 원장과 함께, 충남 아산에 있는 장 영실과학관과 윤보선 묘소를 찾았다.
오전중 정 종훈 건강이야기 원장을 만나고 나오는데,아산에서 점심이나 함께하자고 김 교수로 부터 갑자기 호출이 왔다.
서둘러 아산에 갔더니, 박 병무 원장 자택에서 사모님께서 정성스레 오찬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풍성하게 준비한 점심을 먹고나서, 박 원장이 사놓은 밭을 돌아보게 되었다.
박 원장은 아산시에서 어린이집 전체를 관장했던 총괄 원장인데,노후에 평소의 벗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코자 장영실 과학관 뒷산 언덕에 자리를 잡게 되었단다,
큰 콘테이너가 휴식공간으로 준비되어 있는가 하면,밭에는 고구마와 감자등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고,정원수 소나무들이 곳곳에 심겨져 있기도 했다.
밭구경을 마치고, 선문대 교직원출신들이 관리 책임을 맡고있는 장영실 과학관을 방문해 보았다.
장영실 과학관에서는 직원들의 안내로 물,바람,금속,빛,우주,우리,나라는 테마 공간을 돌아보고 관장실에 들려 다과를 나눈 다음 다음 코스는 음봉면에 자리한 윤보선 묘소를 찾아가게 된다.
윤보선 묘소는, 음봉면에서 당진방향으로 가다가, 이 순신 장군 묘소 가기 직전 사거리에서 좌편길로 들어 가다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은 자유 여행인지라 목적지를 가다말고, 관음사란 사찰 표시가 있어 그쪽으로 먼저 달렸다.
관음사는 기대보다 작고 초라한 절이었지만, 사찰 건너편에는 대단한 규모의 묘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는게 시간뿐이라는 한량들인지라,어찌 그곳을 그냥 지나칠리 있겠는가!
일제시대 육군 참장을 지냈다는 해평 윤씨 경제공 윤 영렬 장군 종중 묘원이었다.
필자는 조선시대 왕릉을 위시해서,독립투사, 유명인사들의 묘역을 두루 둘아본 터라서 꽤나 관심이 가기도 했다.
그곳 종중묘원을 답사한후,곧바로 윤보선 묘소를 찾아가게 되는데,의외로 묘역은 크고 잘 조성되어 있었다.
대통령을 지내셨기에, 의당 현충원국립묘지에 안장될수 있었건만,굳이 이곳에 안치된 까닭이 알만했다.
송림이 보기좋게 우거진 선친들의 묘역이 즐비하게 들어선 맨 꼭대기에 그는 부인과 함께 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 보선 대통령 묘역을 탐방한후,인근에 더 가볼곳이 없나 두리번거렸더니, 영원사라는 또 하나의 사찰이 들어왔다.
영원사까지 답사하고 돌아오는 귀로에,맛집이 눈에 띄어 1만원씩 하는 어죽 한그릇씩 하기도 했다.
장영실 과학관을 찾아서....
장열실 과학관에는 기후 변화 체험관,어린이 과학관,아산 생태곤충원과 아산시 전체를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가 있기도 하다
장영실 과학관 입구에는 선문대학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장영실은 누구인가?
강력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양반 중심의 사회를 유지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백성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천출이란 주홍글씨를 벗어던지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새겨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시대의 과학자 장영실이다.
여기에서 세종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농업 발전을 위한 과학기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막연히 하늘의 뜻에 기대어 농사지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의 변화를 계수화 함으로써 기회는 최대화하고 위기는 최소화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의 이름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이다. 장영실이 살던 시기는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기세를 올리던 때이다. 중국에서 왕조가 폐망하면 수많은 망명객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곤 했다.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조선에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의 신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식인 장영실이 어찌하여 천민이 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영실은 어머니가 관기(官妓)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르면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하나라도 천민이라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조건은 완급을 되풀이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의 신분을 갖는 천자수모(賤者隨母)의 법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무수한 홍길동들이 많았다. 이런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장영실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장영실을 선조로 모시는 《아산장씨세보》에는 그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실록과 족보의 기록상 다른 부분은 쉽게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없지만 세종 시대에 그가 관노 신분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술자로서 장영실의 이름은 태종대부터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틈틈이 동래현의 병기 창고에 들어가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영실은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된다.
1421년(세종 3년), 장영실은 윤사웅과 함께 북경에 가서 관성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성대는 13세기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동양 최대의 천문대로 각종 천문기기를 통해 천문을 살피는 장소였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장영실은 천민의 너울을 벗어 던지고,동래현의 관노였던 그는 대궐의 장인되어 각종 천문기기를 제작한 위대한 과학자로 거듭난 인물이 돤 것이다.
관장실에서 다과를 나누며.....
이곳 관장은 알고보니, 우리들 후배였다..
관음사 대웅전
해평윤씨 종중묘억
윤 영렬 참장 장군 묘비
이렇게 푸른 잔듸와 휴식공간이 보기좋게 갖추어져 있었고.....
윤보선 대통령 묘소 안내문
선조들의 공덕비
계단길을 타고 한참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고.....
멋진 소나무가 시선을 끌었고.....
측면에서 잡아본 소나무
윤보선 대통령 부모 묘소
위로 올라가면서 증조부와 고조부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도....
윤보선 묘소 앞에 넉넉한 잔듸밭
윤보선 묘소
우거진 멋진 송림
묘소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승마 클럽이 있었고....
우연히 발견된 동굴이 있기도....
영원사에 도착하여
법당에 모셔진 불상
2층 법당 불상
아름다운 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