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채우고 밖에서 시간을 허비(虛費) 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늦게 왔다고 꾸중을 하셨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나이에는 그렇게 어렵게 생활(生活)을 했다.
암울(暗鬱) 했던 오십년 대에 보릿고개를 넘고 가난하게
어린 날을 보내고 우리는 육십(六十) 년대(年代)와
대망(大望)의 칠십(七十) 년대(年代)를 보냈다.
이 시대(時代)의 우리는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시대(時代)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자고 일어 날 집 때문에
염려(念慮)는 하지 않는다.
항상(恒常) 북한(北韓)의 도발적(挑發的)인 행동(行動)과
국내(國內) 정세(政勢)만 안정(安定)되면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 것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강원도(江原道) 순수(純粹)한 촌놈이다.
지금도 촌놈이고 과거에도 촌놈이고 미래에도 촌놈이다.
추석을 지나고 나는 그리운 내 고향 산골을 찾아 가려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그곳에는 나의 피부 치는 아무도 없다.
고향(故鄕)의 산하(山河)와 그리고 그리운 내 부모(父母)님의
(아랫글중에서)
강원도 촌놈의 故鄕의 山河
글 조 처음
푸른 산을 바라보며 며칠 있으면 변할 산하(山河)를 바라본다!
누렇고 묽은 단풍(丹楓)이 산하(山河)를 덮을 터인데
내 마음은 허공(虛空)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버리고 떠나온 그리운 산하(山河)
내 평생에 갈지 아니면 영원히 주저앉을 것인 내 고향(故鄕)이다.
어머님의 품속 같은 그리운 내 고향(故鄕)의 산하(山河)!
함께 자라고 뛰어 놀던 그리운 고향(故鄕)의 친구(親舊)들!
하나 둘 이 세상(世上)에서 살아져 버리며 마음을 슬프게 한다!
고향(故鄕)이란 그 무엇인가 나와 무슨 상관(相關)이 있는가?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 하지만
그것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를 않는다?
가을이면 머루 다래가 산하(山河)에서 나를 유혹(誘惑)했다!
달고 시금털털한 그 맛이 나를 유혹(誘惑)했다
지금 생각 하니 달고 시금털털한 그 맛이
사랑인가 보다! 고향(故鄕)의 사랑은
참 특별(特別)하다고 그리고 그립다고 한다!
분명히 나는 객고(客苦)에 머물고 있다!
이 집이 내 집인데도 내 집의 창(窓)이
객창(客窓)으로 보이는 것이 무슨 이유(理由)에서 일까?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애향심(愛鄕心)이
하나의 굴 례처럼 느껴지고 있다!
먼 산을 바라보며 그 넘어 또 그 넘어 에 있을 고향(故鄕)을
뭉게구름을 손으로 헤치며 나는 보고 있다!
나는 서산(西山)에 지고 뜨는 구름과 태양(太陽)을 번갈아 보며
흰 조각(彫刻)구름 밖에 있을 고향(故鄕)의 산하(山河)를 바라본다!
그리고 쓰디쓴 익모초(益母草)의 잎을 따서 입에 넣어 봤다!
그래도 고향(故鄕)의 그리움 보다 덜 쓰다!
동강(東江)의 흐르는 맑은 물과 서쪽에서 흘러내리는 서강(西江)과
합수 되는 合水거리를지나며 각종(各種) 철새들이 가고 오는 길목을
나는 머릿속에 기억(記憶)하며 그 날에 떠나가는
한 쌍의 기러기를 지금까지 못 잊어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집 앞을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 앞을
追憶
나는 서성댄다!
모두 想像에서 나오는 듯 한
내 머릿속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生覺) 했다!
친구(親舊)야 너의 모습(冒襲)이 그립고 그립구나!
비오고 바람 불던 가을 그 날에
그리고 바람 부는 그 날에 행여
동강(東江)의 조약돌이
가지런히 놓인 바위위에 앉아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노라!
사람은 한번 태어나면 한번은 죽는다!
世上의 삶이 다 그런 거야!
일찍이 세상을 떠난 친구(親舊)들아 억울해 하지 마라!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理致)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지금사람들이 부르는
친구(親舊)를 동무(童舞)라고 했다
동무란 춤을 추고 함께 뛰어 노는
순수(純粹)한 우리말이라고 한다.
북한(北韓)에서는 오십(五十) 년대(年代) 초부터 서로의 위와 아래를
없애려고 동무란 말을 썼다고 한다.
그 말이 진짜 인지 혹은 가짜 인지는 몰라도
그럴싸하게 들리고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니던 시절(時節)에
동무(童舞)란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아마도 북한(北韓)에서 쓰는 말이라고 해서
그 시대(時代)의 정권(正權)이 쓰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그 시절(時節)의 교과서(敎科書)에는 반공(反共)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어(國語) 책에도 반공(反共)이 나오고
도덕(道德)책에도 반공(反共)이라는 단어(單語)가 등장(等張)했다.
내가 어릴 때에는 우리 모두가 어리 섞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고
나라에서 이것을 하라고 하면 아무 말도 없이 따라 복종(僕從)했다.
지금사람들 같으면 묻고 따지고 데모도 하고 대들고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동무란 말만해도 사상범(思想犯)으로 몰려
경찰서(警察署) 유치장(留置場) 신세(身世)를 지고
나도 모르게 당국(當局)의 감시(監視) 대상(對象)이 되어서
사회(社會)의 불이익(不利益)을 당하고 했다.
서울보다 시골인 지방(地方)에서는 더욱 심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촌놈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강원도(江原道) 산골 촌놈 이란 말이 생겨나고
어느 때는 촌놈 이라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사람들이 어디가 고향이냐고 고향(故鄕)을 물어 보면
충청북도(忠淸北道)나 엉뚱하게 다른 곳을 말하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진짜 “강원도(江原道) 촌놈”인 모양이다.
이런 촌놈이 나이가 들고 고향(故鄕)이 그립다고
그리고 친구(親舊)가 그립다고 먼 산을 처다 보고 한숨을 짓는다.
어느 산위에 올라서 큰소리로
나는 진짜 “산골 촌놈이다.” 라고 소리쳤다.
그 말이 산울림이 되어서 지금도 그 말이
내게 돌아와 내 귓전을 스친다.
나와 함께 자라고 함께 놀던 친구(親舊)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나와 몇 명의 친구(親舊)만이
머리가 백발(白髮)이 되어
동구(洞口) 밖을 서성이고 있다.
그 친구(親舊)들을 길거리에서 만나도 서로 몰라본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너무 오랜 세월을 두고
서로 그리워하며 떨어져 살았기에
너무도 그 앳된 옛 모습은 모두 살아지고
할아버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친구(親舊)를 통해
그 친구(親舊)를 만나보면 짙은 담배 냄새와
고유(固有)의 노인(老人) 냄새가 코를 진동(振動)하게 한다.
처음에는 “누구시더래요” 라고 강원도 말로 어색하게 물어 본다
그러면 내가 누구라고 밝히면 2학년 때 교실(敎室)에서 오줌 싸던
아무개 아니야 하고 얼싸 안고 반가워한다.
나는 친구를 처다 보며 “촌놈 많이 늙었네!” 한다.
그 친구(親舊)는 나보고 진짜 촌놈이
나보고 촌놈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것은 그는 읍내(邑內)에서 살았고 나는 읍내(邑內)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진짜 촌놈이라고 놀려 댄다.
나는 촌놈이라는 그 말이 싫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진짜 촌놈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에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初等學校)
운동장(運動場)이 세상에서 제일 큰 줄 알았었다.
그것은 내가 촌놈이기 때문에 어디 가서 보고 들은 것이 없고
아침을 먹고 학교(學校)에 다녀오면 나머지 시간(時間)을
개울이나 강가에서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과외공부(課外工夫)를 할 수도 없고
그럴 처지도 못되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 준대로 하면 되고 숙제(宿題)를 하면 된다.
학교(學校)에 숙제(宿題)를 해 가지 아니하면
교실(敎室) 복도에서 팔을 위로 들고 벌을 서야 하기 때문에
벌 받는 그 일이 싫고 숙제(宿題)를 아니 해 가면
선생님으로부터 나에게 불이익(不利益)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는 싫어도 그 숙제를 했고 솔직히 좋아서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초등학교(初等學校) 다니던 그 시대(時代)에는
지금의 고등학교(高等學校) 분기 금을 내는 것처럼
사친회비(事親會費)라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월사금(月謝金)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변해서 師親會費라고 변경(變更)되었다.
월사금(月謝金)이 사친회비(師親會費)가 되고
師親會費가 변하여 육성회비(育成會費)가 되었다.
매월(每月)이것을 내지 않으면 수업(受業)을 받다 말고
선생님이 돈을 가져 오라고 집으로 되돌려 보내곤 했다.
이때는 나는 항상(恒常) 강가에 앉아서 집안의 가난함을
한탄(恨歎)했고 학교(學校) 선생님을 미워했다.
6*25戰爭을 치루고 아무것도 없는 빈 터전에서
우리의 가난함을 어찌 말로다 표현(表現)하랴!
미국(美國) 사람들이 원조(援助)를 해주는 우유(牛乳)가루를 타기 위해
학교에 갈 때 마다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학교를 가야 했고 올 때는 보자기에 책과 함께
牛乳 가루를 타서 집에 가져 오면 어머니가
밥솥 안에 牛乳가루를 넣어서 쪄서 주고
그것이 식으면 딱딱하고 그것을 먹고 허기를 면했다.
십리(十里)를 걸어서 학교(學校)를 갔다 오면 산으로 가서 산딸기와
논두렁에서 뫼라는 지금도 알 수 없는 풀뿌리를 캐 먹고
배를 채우고 밖에서 시간을 허비(虛費) 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늦게 왔다고 꾸중을 하셨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나이에는 그렇게 어렵게 생활(生活)을 했다.
암울(暗鬱) 했던 오십년 대에 보릿고개를 넘고 가난하게
어린 날을 보내고 우리는 육십(六十) 년대(年代)와
대망(大望)의 칠십(七十) 년대(年代)를 보냈다.
이 시대(時代)의 우리는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시대(時代)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자고 일어 날 집 때문에
염려(念慮)는 하지 않는다.
항상(恒常) 북한(北韓)의 도발적(挑發的)인 행동(行動)과
국내(國內) 정세(政勢)만 안정(安定)되면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 것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강원도(江原道) 순수(純粹)한 촌놈이다.
지금도 촌놈이고 과거에도 촌놈이고 미래에도 촌놈이다.
추석을 지나고 나는 그리운 내 고향 산골을 찾아 가려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그곳에는 나의 피부 치는 아무도 없다.
고향(故鄕)의 산하(山河)와 그리고 그리운 내 부모(父母)님의
묘소(墓所)를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親舊)들을 찾아 그 모습을 보고 싶다.
내 고향(故鄕)과 그곳에 거주(居住)하는 모든 사람에게
신(神)의 은총(恩寵)이 내려지기를 기도(祈禱)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