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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강경애-어머니와 딸(5)
"참말인가?"
"이 사람, 또 귀가 바짝 당기는 모양이지?"
웃음으로 쓸어쳤다. 자기로서도 오늘에 한하여만 갑자기 전과 달리 말하기가 좀 점직했던 것이다.
봉준도 이 눈치를 알고 더 채치고 싶지만 원선이가 꺼리어서 잠잠하고 말았다.
"어째서 이야기가 중단이 되나? 마자 마치지?"
봉준이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자네 전부터 영실이를 알았던가?"
"응, 숙희와 동무라네. 그래서 몇 번 우리 집에 놀러 왔어. 그 통에 나도 알게 되었지."
"누이 있는 사람들은 수 나겠네."
"그럴지도 몰라."
둘이는 웃었다. 원선이는 멍하니 앞길만 바라보고 수굿수굿 그들의 뒤를 따랐다.
"여보게, 옥씨가 과연 미인이지! 자네는 어떻게 보았나?"
재일이는 뒤를 돌아보며 멈칫 섰다. 봉준이도 돌아보았다.
"글쎄."
"똑똑한 대답을 해 버릇하게. 밤낮 글쎄가 무어야!"
봉준이는 안타까움에 이런 말을 하였다.
쌀쌀한 바람이 그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디로들 또 가겠나?"
둘이는 씩 돌아보았다.
"무어 좀 먹고 헤지세. 어디로 갈까?"
언제나 먹는 말은 재일이가 먼저 꺼내었다.
"그만두지, 가랴면 자네들끼리나 가보게."
"얼른 같이 갔다 가세나."
"곤해서 못 견디겠네."
봉준이를 보았다.
"늙으니까 다르다니까."
전차가 앞으로 지나간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잠잠하였다.
"자, 난 가겠네."
원선이는 청진동 골목으로 빠졌다. 전신이 오싹해지며 따뜻한 방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잘 가게."
둘이는 말없이 걸었다. 어쩐지 적적함을 느꼈다.
재일은 옥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따라서 이때까지의 그의 눈으로 본 많은 여자들을 되풀이하여 보았다. 숙희 때문에 여학생들도 퍽이나 알았고 화류계 여자들은 그 수를 헤일 수 없으리 만큼이었다. 그러나 자기로서 흡족히 생각한 여자는 없었다. 그저 그렇고 그렇고 하였다.
하나 오늘 저녁 옥이를 보자 세상에 저런 여자도 있는가 하고 놀랄 만큼이었다. 그럴수록 숙희를 미끼삼아 반드시 옥이는 자기 것으로 만들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처녀, 부인을 가릴 사이 없이 얼굴만 고우면 그만으로 생각되었다.
"이혼은 집어치우게."
그의 심중을 떠보려 하였다. 봉준이 역시 옥이를 미끼삼아 숙희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숙희씨 같은 여자는 없으니까 어쩌겠나. 내 스스로도 이상히 아는 적이 많았네마는…… 물론 옥에게 대하여 동정하지 않는 배는 아니야. 그러나 사랑이 안 가는 데야 어쩌란 말인가?"
"음, 그렇지. 사랑이 없는 데야 동정한들 어쩌겠나? 나도 전부터 자네 마음을 모르는 배 아니고 따라 숙희를 연모하는 것까지도 대강은 짐작하였네. 그래서 그 애를 만나면 자네 말을 늘 하다시피 하였네. 어찌했든 이혼만 하게나."
"고맙네."
봉준이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한참 후에 그는,
"자네만 믿네!"
재일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옥씨가 불쌍하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봉준이를 보았다.
옥이는 아침을 먹고 머리를 풀어놓았다. 얼빗으로 슬슬 가리며 면경 속으로 비치는 가지 얼굴을 들여다보고 쫑긋 웃었다. 어젯밤 남편의 좋아하던 꼴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어떻게 붙었을까?’그 많은 사람이 시험쳤는데 아무래도 선생들이 내 이름을 잘못 불렀지!’이런 생각을 할 때 가슴이 선뜻하였다.
영실이가 들어왔다.
"머리도 숱하기는 해요."
그는 얼빗을 빼앗아 가지고 몇 번 가리운 후에 두 갈래로 꽁꽁 땋아가지고 곱슬하게 틀어놨다.
"고운데요, 어쩌면 그리 고울까."
앞으로 와서 말똥히 들여다본다. 그는 가쁜함을 느끼며 두 귀밑이 빨개졌다.
"그런 소리 말아요."
얼굴을 돌리며 웃었다.
"웃으니까 더 곱네. 여자로 태어날 바에는 저렇게 고와야지, 무얼!"
며칠 전날 밤 재일의 꼴이 나타났다.
"학생도 그만큼 고왔으면 됐지요,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
그는 머리칼을 일삼아 주워 뭉쳐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영실 어머니도 부엌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내다본다.
"꽃송이 같애요."
옥이는 이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리고 내가 참으로 붙었는지? 이런 의문으로 가슴이 꽉 채웠다, 그는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붙었을까요?"
영실은 면경 속으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다가 살짝 비켜 앉았다.
"그럼 학교서 거짓말할까요?"
너무 좋아하는 꼴이 밉살스러웠다.
"거짓말보담도 혹시 이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는가 해서 하는 말이지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지요."
영실은 일어났다.
"어서 학교나 가십시다. 잔걱정 말고요."
옥이는 검정치마 흰 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책상 아래 놓인 구두를 꺼내어 놓고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신었다.
안방 문소리가 나자 영실은 나왔다.
"어서 나와요."
이러고 나가기가 퍽이나 부끄러웠다. 어쩐지 옛날 자기와는 딴판이 된 듯한 느낌이 생겼다. 그때에 떠오르는 것은 숙희와 연희였다.
그는 남빛 책보를 들고 영실의 뒤를 따랐다. 다리가 휘청휘청하는 것이 좀폐로웠다.
"재미나요, 이렇게 언니와 내가 함께 다니면 오작이나 좋아요."
쫑긋 웃어 보였다. 그는 숨이 차도록 답답함을 느꼈다. 지나는 사람들은 자기만 보는 듯싶었다.
"오늘 저녁, 원선인가 그이는 떠나신댔지요?"
"네."
가까워오는 학교는 빨간 벽돌집으로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개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은 집으로 오자 옷을 벗고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옥이는 이때껏 지리쳐 두었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교장선생의 말이 다시금 그의 귀를 울려 주었다. 그리고 뒤를 따라 나타나는 얼굴 흰 여선생들은 하늘같이 높아 보였다.
점심상을 들고 영실은 들어왔다. 그는 얼른 일어나 받아놓았다.
"어서 먹읍시다."
영실은 저를 들고 마주 앉았다. 권하는 바람에, 더구나 다정스러이 마주앉는 김에 숟갈을 들었으나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울울하여서 좋은 것도 언짢은 것도 판단할 여지없이 어림터분하였다.
상을 물린 옥이는 책상 곁으로 다가앉아 ‘나도 이제부터는 여학생인가? 숙희와 연희와 같은……’ 맘에 떠오르는 것은 영철 선생이었다. ‘그가 이 소식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물 먹고 싶듯이 그리워졌다. 같이 있을 때는 그만그만하여 무던한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뚝 떠나고 보니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못지않게 보고 싶었다. 보다도 자기의 달라진 옷 맵시, 시험 쳐서 입격된 것을 그에게 자랑 겸 친히 눈에 보이고 싶었다.
그는 붓을 들었다. 영철 선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저녁이 되자 옥이는 화장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 책상 앞에 마주 앉아 갓 사온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모든 잡생각은 잊고 책 속으로 정신이 폭 잦아 들어갔다.
"여보, 옥씨!"
깜짝 놀라 휘휘 돌아보며 뒤미쳐 일어났다.
"나와요."
뒤창문 곁에서 남편의 소리가 났다. 그는 몸 돌아볼 여지없이 밖으로 나갔다.
큰 대문을 나선 옥이는 창문 곁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달빛에 그의 시커먼 윤곽만이 보였다.
"저 새 옷 갈아입고 구두 신고 나오시우, 벌써 자우?"
"아니오."
"그럼 얼른 들어가서 펄쩍 갈아입고 나와요."
"왜요?"
황황히 날치는 남편이 이상해 보였다.
"글쎄 여러 말 말고 바삐 그리 해요."
남편의 말이니 할 수 없이 돌아서서 들어오면서도 마음으로는 불쾌하였다.
무엇보다도 남자들과 마주 앉기가 거북스럽고 싫었던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옥이는 또다시 나갈 것이 거북하였다. 남편과 가지런히 서서 다니는 것은 기쁘게 생각이 되나 그러나 남편의 친구들과 섭쓸리기는 안타깝게 싫었던 것이다.
"안방 학생 데리고 갑시다."
"잔소리 말고 어서 나와요!"
소리치는 바람에 두말도 못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요?"
안방 밀장문 사이로 영실의 외짝 눈이 보였다.
"저기."
옥이가 큰 대문 밖으로 나서자 봉준이는 허방지방 뛰었다. 남편의 황급히 날치는 꼴을 보는 옥이는 무슨 일인가 하여 어리둥절하였다.
골목쟁이를 돌아서자 눈이 시큼해지도록 빛나는 가스불 앞에 남편은 우뚝섰다.
"어서 오르십시오."
몇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소리와 함께 휘발유 냄새가 옥의 코를 벗튀었다.
"이렇게 만나 보니 반갑습니다."
옥이는 얼결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연희와 숙희였다. 순간에 그의 가슴은 선뜻하였다.
택시는 달음질쳤다. 문득 자기와 남편이 그리운 고향 떠나던 때가 눈앞이 보이는 듯하였다.
옥의 바른편 무릎 사이로 옮아오는 연희의 따뜻한 체온은 같은 고향 사람임을 더욱 느끼게 하였다.
숙희는 연희와 무슨 귀엣말을 건네고 있었다.
"얼마나 기쁘십니까, 옥씨."
원선이는 자기 앞에 똑바로 앉은 옥의 목덜미를 보았다. 옥이는 머리를 숙이는 외에 잠잠할 뿐이었다.
"축하 올립니다, 옥씨."
이번에는 재일의 목소리였다. 이마 위에 땀이 나도록 옥이는 부끄러웠다. 암만 대답을 하려고 하였다가도 목소리가 밖에까지 나가 주지를 않았다. ‘어쩐 일일까, 내가 벙어리 되려나? 하기까지 의문이 들어갔다.
"선생님, 이제 가시면 언제쯤 나오시게 되나요?"
원선이는 무슨 생각을 하다가 얼른 숙희를 보았다.
"글쎄요, 여름방학 때나 오게 되겠지요."
곁에서 듣는 옥이는 한층 떠 부끄러웠다. 자기는 묻는 말도 대답 못하는데 숙희는 말을 건넨다. ‘언제나 나도 저만큼 되어 보려나!’하고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는 자기와 같이 못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남편이 배척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하였다.
경성역에서 내린 그들은 대합실로 밀려들어갔다.
옥이는 어쩌다 넘어질세라 겁이 나서 미처 그들의 뒤를 따르지 못하였다. 그는 한편 구석에 가만히 서서 머리를 숙였다.
낮같이 밝은 불빛 아래 흔들리는 그 사람의 동작을 따라 까만 눈만이 반들거렸다.
그들은 의자에 척척 걸어앉아 돌아보니 옥이가 없었다.
"여보게, 옥씨 어디 가셨나?"
휘휘 둘러본 재일은 이편으로 뛰어왔다.
"저리로 가십시다."
불빛에 빛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뇨"
옆에 의자에 가만히 걸어앉았다. 자칫하면 푹 고꾸라질 것 같았다. 옥의 이마 끝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재일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옥의 옆에 앉았다.
이 꼴을 본 옥이는 시재 걷다가 엎으러져서 망신을 톡톡히 할지언정 같이 앉고 있기는 싫었다. 그는 살짝 일어나서 앞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걸어나니 심상하였다.
눈결에 남편을 보니 그는 자기편으로 외면을 하여 돌아앉고는 얼빠진 놈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에 그의 눈에서는 있는 불이란 다 기어나오는 것 같았다.
원선이는 차표를 타 가지고 옥이 섰는 편으로 왔다.
"이 사람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십니다."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발부리를 굽어보았다.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며칠 동안에 처음으로 듣는 음성이었다. 약간 들리는 듯한 가는 말씨가 원선의 귀에다 귀엣말을 하는 듯이 장그럽게 들렸다.
"공부 잘하십시오. 그저 배워야 합니다."
요란한 소리를 따라 차는 들어왔다. 역부의 고함소리에 놀란 옥이는 입 속으로 ‘게이죠’ 하고 되뇌어 보았다.
원선이는 숙희 앉은 편으로 뛰어갔다. 서로 손을 잡고 이편으로 뛰어오자,
"어서들 들어가세요."
꾸리 묶어선 듯한 사이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나 혼자 지낼 생각이 난처하네. 이 학기 다 지나기 전에 곧 들어들 오게. 공연히 놀면 뭣하겠나?"
연희가 옥의 곁으로 왔다.
"고향서 편지 왔어요?"
"아직 아니 왔어요?"
연희를 쳐다보았다. 맞은편에 선 숙희는 새침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안녕히들 계셔요."
바라보니 원선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플랫포옴에서 차에 올라선 원선이는 이편을 향하여 모자를 높이 들어 보이고 차안으로 들어가자,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어밀었다.
이편에서도 모자로 손수건으로 내어흔들기 시작하였다. 원선이는 그들 틈으로 언제까지나 고요히 섰는 옥이를 보았다.
학교로부터 돌아온 옥이는 옷을 벗고 잠옷 비슷이 만든 통옷을 입은 후 밖으로 나와서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까지 열어 젖히고 방을 쓸어내었다. 그리고 책보를 책상 위에 풀어헤쳐서 책보는 문밖에 활활 떨어다 네모 반듯이 개어 한편 옆으로 착 놓았다. 그리고 우선 공부할 책만 따로 놓고는 모두 착착 겹놓았다.
그는 책상 위를 이렇게 정돈해 놓고는 오늘 온 신문을 들었다. 제 일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보기 시작하였다.
영실 어머니는 건넌방으로 건너왔다. 자다 나온 모양인지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눈이 빨갛다.
"영실이는 아직 시간이 남았나?……"
이렇게 혼자하는 말처럼 하고 나서 되뚝한 파란 곽과 편지를 내어밀었다.
"옛네. 아까 웬 심부름꾼 애가 가져왔기에 누가 보내더냐고 물어도 대지 않고 가데."
그는 달갑지 않게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우선 편지부터 보리라 하고 겉 피봉을 보았다. 주소도 성명도 아무것도 써 있지 않았다. 그는 문득 일어나서 의심과 함께 봉투를 뜯고 보았다.
영실 어머니는 말똥말똥 눈치만 따기 졸음도 어디로 달아난 모양이었다.
"무어랬나?"
다 보고 난 옥은 억지로 웃음을 띠었다.
"장난감 보낸다는 말입니다."
"응."
옥이는 곽과 편지를 책상 아래로 밀고 여전히 신문을 들었다.
영실 어머니는 펴보았으면 하고 바라보다가 보지 못하게 되매 허수하였다.
"에, 덥다."
얼굴에 붙는 파리를 쫓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발자취 소리가 멀어지자 그는 신문지에서 눈을 떼어 문밖을 내다보았다. 신문지도 맥없이 날아 떨어지고 말았다.
장독에 붙었던 왕파리는 왱, 하고 쨍쨍히 들여 쬐는 볕을 따라 문턱까지 날아왔다.
자기는 이곳에 오직 남편 하나를 믿고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차츰차츰 자기를 찾아오기도 싫어하는 듯하였다. 어쩌다 오게 된다면 반드시 재일과 함께 왔다가 가곤 하였다. 다소 의논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가슴에 뭉치고 또 뭉쳐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 혼자 삭아지고 말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나니 바람벽을 마주 앉은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 편지를 끌어내어 자세히 몇 번이든지 읽어보았다. 글자 한자 어그러지지 않고 분명히 쓴 글씨였다. 이것이 참일까? 남편이 일부러 시험해 보누라고 이런 일을 않았나? 그렇다면 반면에 남편이 자기에게 대한 애정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쁜 일이랴! 고마운 일이랴! 하지만 어디까지든지 참인듯 싶은 편이 세었다.
남편의 둘도 없는 친구가 이런 일을 내게 감히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필연 남편과 재일이가 함께 공모해 가지고 어떠한 계책을 내어서라도 자기와 이혼될 조건을 만들어 가지고자 하는 수단같이 보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설움이 가슴을 올올이 찢는듯하였다. 그는 책상 위에 폭 엎드려서 흑흑 느껴 울었다.
문앞으로 지나치던 영실이는 우뚝 섰다.
"언니 왜 울어?"
된 햇빛이 내리쬐어 영실의 머리는 시재 타지는 듯하였다. 그는 마루로 올라앉자 책보를 방으로 던지고 달려왔다.
"왜 울어?"
옥의 어깨를 흔들었다.
"공연히 울지 뭐."
"언니 공부 준비하지 않우?"
"해야지."
그는 눈물을 이리저리 씻고 나서 책을 펼쳐 들었다. 하나 샘솟듯 나오던 눈물은 뒤를 이어 떨어졌다.
"에 덥다, 지독히 덥네."
영실은 후닥닥 뛰어나갔다.
옥이는 도로 책을 놓고‘어머니! 나는 어찌라우!’이렇게 부르짖을 때‘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번개같이 옥의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그의 시어머니께서 임종시에 턱을 가불가불 채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부르짖음이었다.
어린 옥이는 무슨 말인고 하고도, 너무도 또랑또랑한 힘있는 말이매 그의 머리에 꽉 찔려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그는 입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 ‘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다시 한번 불러보았다.‘얼마나 잘 아시고 하신 말씀이랴!’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든든한 의지가 생긴 듯싶었다. 따라서 북받쳤던 설움이 가라앉고 거뜬해짐을 느꼈다.
이 말 한 마디가 오늘날 옥에 있어서는 얼마나 귀한 보배였는지 몰랐다. ‘오, 어머니! 당신께서 남기고 가신 그 귀한 말씀은 내 가슴에, 내 가슴에 품었나이다.’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한참 후에 그는 다시 눈을 떠서 앞에 놓인 곽과 편지를 노려보았다. ‘흥! 몰랐다! 너희들이 짐작한 그런 어리석은 여자는 아닌 것이다! 시계와 반지로 인하여 일생을 버릴 그런 못난 계집은 아니다. 오! 아니다!’ 그는 벌컥 일어났다.
봉준이는 저녁을 먹고 문밖으로 뛰어나왔다. 시원한 바람은 그의 머리를 다소 거뜬히 해주는 듯싶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물먹고 싶듯이 숙희가 그리워졌다. 어젯밤 오래도록 숙희 방에서 놀았건마는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못한 지금에 생각해본다면 몇삼년이나 된 듯이 멀어 보이고 다시는 숙희와 마주 앉아 볼 것 같이 않았다.
그는 슬금슬금 걷기 시작하여 어느덧 숙희집 문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마침 안으로부터 숙희가 길을 굽어보며 나왔다.
"재일 군 집에 있나요?"
숙희는 머리를 들고 봉준이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금방 나갔는데요…… 아마 봉준씨한테 가셨을 것 같애요."
숙희는 앞으로 걸었다. 봉준이도 따라섰다. 이 여자가 어디를 갈까? 이런 생각을 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남몰래 달았다.
"숙희씨!"
그는 발길을 멈추고 섰다.
"조용히 저를 만나줄 수가 없습니까?"
무슨 볼일이 있세요?"
"네, 있습니다."
봉준은 앞장을 섰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오늘은 제가 바쁜데요."
봉준은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쳐 버릴까 하여 쩔쩔매었다.
"숙희씨! 잠깐만 와주십시오, 잠깐만!"
그의 음성은 떨렸다. 숙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잠잠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엇보다도 그의 하는 꼴을 보자는 호기심이었다.
봉준이는 숙희가 따르는 것을 알자 발길이 허공에 뜬 듯이 날아가는지 걸어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따라서‘이것이 꿈인가?’하는 의심도 몇 번이든지 들었다.
그들은 남산 솔밭 사이로 들었다. 노송나무를 사이로 둘이는 마주섰다.
"앉으셔요."
봉준이는 자기 양복 웃저고리를 벗어 깔아놓았다.
"앉으셔요, 네?"
거의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좋습니다."
숙희는 여전히 소나무를 기대어 섰다. 아까 거리에서보다는 훨씬 울울함을 느꼈다. 그러나 숙희는 속으로 ‘제가 어떻게 할 테냐! 제까짓 것이!’ 이렇게 스스로 위로받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셀 수 없이 들어선 소나무들은 마치 비밀회의로 모인 듯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떨어진 파란달빛은 봄바람에 떨어진 꽃송이 꽃송이 같았다.
"숙희씨! 제가 올린 편지는 받아보셨겠지요?"
"네."
"어째서 회답을 주시지 않았나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숙희로서도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무엇을 깊이 생각하다가
"회답을 기다리셨습니까?"
모처럼 고대한 대답은 반문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반문하는 뜻도 봉준이로서도 대강 짐작하였다. 그렇지만 이리저리 따져 묻자면 공연한 시간을 허비할 뿐더러 새삼스럽게 과거 일을 탄해 가지고 말썽부리잘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네, 기다렸습니다. 여러 말씀 할 필요 없구요. 이미 숙희 씨가 편지를 통하여 저의 마음을 다 아셨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숨이 꼭 막혔다.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잠잠하던 봉준이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한 마디에 달린 것이올시다. 저의 사랑을 받으시겠습니까?"
봉준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빤히 들렸다.
숙희의 전신은 오싹하였다. 따라서 이 솔밭이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자 그는 소나무를 맘껏 껴안고,
"봉준씨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네, 형식상으로는 있다고 볼는지 모르오나 실은 저는 총각입니다!"
이 말에 그는 악이 치받쳤다.
"총각이라구요? 차라리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숙희씨! 당신 앞에 거짓말이 손톱만치나 있다면 당장 벼락이라도 맞겠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속일지언정!"
그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숙희씨!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가슴속에 여자의 흔적이 있다면 당신의 환영(幻影)이겠지요. 밤낮으로 당신을 그리워 애쓴 죄밖에는 없습니다."
숙희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언제까지나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만을 듣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 없는 터,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려 하니 애걸애걸하는 꼴이 불쌍하다 못해 곧 난처하였다.
"봉준씨, 이 부족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는 것은 제 몸에 지나치는 영광으로 압니다만, 아직 철없는 저라서 사랑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려가십시다."
그는 발길을 옮겼다.
봉준이는 아찔하여 얼핏 소나무를 쓸어안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비실비실 따랐다.
멀리 사라지려는 숙희의 치마폭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품겨 있었다.
정신없이 하숙으로 돌아온 봉준이는 방바닥에 콱 쓰러져 앓는 소리를 꿍꿍하였다.
주인 마누라는 어쩐 일인지 몰라 궁금하였다. 금방까지도 저녁 잘 먹고 이야기를 시끄럽게 하던 사람이 무섭게 앓는 소리를 하니 아마도 체했나 보다하고 건너갔다.
"어쩐 일이세요? 어디 편치 않으세요?"
"네, 물 좀 주시구려."
봉준이는 시뻘건 눈으로 쳐다보았다.
"효주야! 물 떠오나라!"
뒤이어 얼굴 나부죽한 어린 처녀가 두 손으로 시첩을 받들고 나온다.
"선생님 아프시다."
효주는 어머니 뒤에 붙어 앉아 이따금씩 그를 엿보았다.
"옥이도 오랄까요?"
"그만두셔요."
보기 좋게 꿀꺽꿀꺽 물을 들여마신 봉준이는 바람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바람벽에 진 자기 그림자를 보고 외로운 설움이 가슴을 메어지게 하였다. 하여 모르는 사이에 베개 밑이 척척해졌다.멍하니 바라보던 주인 마누라는,
"물수건 해서 대드릴까요?"
"수고시럽게…… 요."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벽에 걸린 수건을 적시어 머리에 번갈아 대주었다. 훨씬 시원한 맛이 있었다.
신발소리가 나자 재일이가 성큼 들어섰다.
"어쩐 일인가?"
"갑자기 아프시답니다."
"어디?"
봉준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는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떠서 재일을 보자 그의 손을 꽉 잡고 흑흑 느껴 울었다.
"어디 아픈가? 응?…… 울기는…… 왜."
재일은 그의 머리를 짚었다.
"과다하는데, 옥씨 오셨댔나?"
"웬걸요, 아프신지 알지도 못할 터인데요."
"오라지, 밤에 적적하지 않어?"
친구를 생각함보다도 자기가 그리웠던 것이다. 매번같이 이 집을 찾게 되면‘행여나 옥이를 만날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만두시라니까요."
"오라게 원."
봉준이는 잠잠히 눈을 감아버렸다.
요 며칠 동안 재일은 옥이로부터 무슨 회보가 있을까 하여 지나다니는 체부만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가물해져도 따라 감감해지고 자기의 예측한 바와는 지나치게 어긋났다.
처음 짐작은 며칠 동안이면 옥의 마음을 움직여 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몇 개월이 된 오늘까지도 꿀먹은 벙어리 모양이었다.
"어쩐 일일까? 내 수단 방법이 틀린 것인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황금이면 만사에 거칠 것이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의 신념도 다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최후의 실낱 같은 그의 희망은 옥의 뒤를 따르다 직접 행동을 취하는 외에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으레 옥의 하숙집을 몇 번이든지 돌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한 번도 기회가 마땅히 없었다.
방금 옥의 집을 들러 오는 길이었다.
"곤하신데 나가십시오."
눈이 거적해진 주인 마누라를 쳐다보았다.
"에그 참 졸립니다. 미안하나마 저는 먼저 나갑니다. 앉았다 가십시오."
무릎에서 잠든 효주를 깨워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보게, 오늘 숙희씨를 만나지 않었나."
"응, 그래, 말좀 해보았나?"
봉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말하면 소용이 무언가?"
"그래, 거절받았다는 말이지?"
"그럼."
"직접 행동을 하여야하지 말만을 누가 무서워 하나. 그래 손 한 번 걸쳐보지 못한 모양이네 그려."
그는 씩 웃었다.
"그런 일은 난 못하겠데. 바루 성공을 못하면 말았지."
"흥! 아직 멀었네. 그렇게 약해 가지고야 일이 되나."
"여보게, 자네 힘써 주게나!"
"물론 힘써 주지. 한데 여자 암팡진 것은 실은 여간 지독한 것이 아닌 모양이데."
옥이를 두고 이런 말함임을 봉준이도 짐작해보았다.
"아무렴 자네 전에는 나더러 비웃댔지. 그리 단단히 지내보게."
"자네 옥씨랑 꼭 이혼할 생각이지?"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묻나?"
어지간히 몸이 단 것을 알았다.
"글쎄……"
빙긋이 웃었다.
"아무렴 숙희씨를 생각하는 나인 것을 잘 알지, 자네도?"
"오래."
"그러면 묻는 자네가 그른 것 아닌가?"
재일은 멍하니 전등불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봉준은 재일을 사귄 후로 이러한 태도를 처음 보았다.
언제나 쾌활하던 재일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으랴 하고 생각하니 그가 불쌍히 보였다.
"자네도 사랑의 쓴맛을 이제야 보네 그려."
재일은 자리 속에서 눈을 뜨자 엊저녁에 날치던 봉준의 꼴이 마치 활동사진으로 보는 듯하였다.
자기 경험으로 미루어 며칠이나 몇 달이나 갈 줄 알았던 봉준의 상사병은, 자기에게 알려진 후부터도 준 이태가 지나서 올해는 공부까지 전폐하고 봄부터 가을철까지 온전히 전문으로 종사를 하다가도 결국은 무서운 신경쇠약 병까지 얻어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지나간 이태는 몰라도 올 봄부터는 재일이도 봉준을 동정하여 숙희를 대할 때만은 다만 한 마디씩이라도 봉준의 이야기를 건네고 따라 숙희를 권면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숙희는 그만그만하였다.
엊저녁에는 재일도 겁이 났다. 자기의 친구로서 누이동생을 위하여 생사를 분간치 못하기쯤 된 형편이니 어쨌든 난처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옥의 안타까워하는 것이란 사람으로선 못 볼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컥 일어났다. 그는 옷을 입은 후 숙희 방으로 건너갔다. 숙희는 산뜻이 화장을 하고 앞문 앞에 앉아 수를 놓았다. 방문소리가 나자 숙희는 힐끔 쳐다보았다.
"숙희야."
그는 바늘을 든 채 재일을 보았다. 아직 이마에는 베갯자리가 있었다. 재일은 얼결에 이렇게 부르고 나서도 갑자기 어느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왜요?"
왔다갔다하는 재일은,
"너 어째서 그렇게 사모하는 김 군을 싫어하니? 무엇 때문이냐?"
숙희는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아무 말 없이 바늘 꽂았다 빼는 소리만 잦아질 뿐이다. 숙희의 꼴을 보니 오늘도 틀릴 모양이었다. 재일은 음성을 낮추었다.
"숙희야! 너의 오빠도 생각지 않니? 오늘만 부대 가자. 가서 잠깐만 앉았다 오자꾸나. 그것이야 무엇이 힘들 것이 있니? 응, 대답해라."
재일은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숙희는 언제까지나 말이 없었다. 재일은 마음대로 하면 달려들어 실컷 쥐어박아 반쯤 용신을 못하게 만들어 주면 좋을 상으로 생각되었다.
싯재 펄펄 뛰는 생떼 같은 청년이 자기 하나 때문에 죽겠다 살겠다 하는 판에도 말똥말똥히 무엇을 생각만 하고 앉았는 것이 재일로 하여금 눈에 불나도록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꾹 참고,
"어찌겠니?"
숙희는 바늘을 저고리 섶에 꽂고 재일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오빠! 제발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세상에는 봉준씨 한 분만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뿐 아니겠어요? 그런 것을 어떻게 일일이 동정합니까? 심하게 말하면 죽는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네, 오빠, 그렇지 않습니까?"
숙희의 얼굴은 슬픈 빛이 돌았다
"숙희야! 그러면 너는 봉준 군을 죽이려느냐! 응?"
그의 눈에는 봉준이가 보였다. 따라 어여쁜 옥이가 보였다.
"죽는 사람은 약자지요. 못난이지요. 어찌해서 귀한 일생을 일개 미미한 계집 때문에 희생을 버리겠습니까……"
재일은 분이 왈카닥 치밀었다.
"야! 사설만 지껄이지 마라. 너도 무슨 사람값에 가니! 에잇, 저런 매몰스런 계집애하고 말하다가는 아주 기막혀 죽겠어! 어데 얼마나 버티나보자."
그는 휙 나가버렸다.
숙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눈물 흘린다는 것은 몇 분 후에 한 방울씩 떨어질 뿐이었다.
연희가 밖으로부터 황당히 들어왔다.
"어째 그러니? 또 그 일 때문이냐?"
연희의 까만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하여 마치 낙숫물 지듯이 흐르는 것이었다.
숙희는 말똥히 연희의 들먹이는 어깨 위를 바라보며 저렇게 속 시원히 울어봤으면 하고 오히려 눈물 많은 것이 부럽게 생각되었다.
따라 봉준의 일이 난처하였다. 그러나 어여쁜 아내를 가진 봉준이가 또 자기를 생각하여 죽네 사네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자기로서는 색마와 같이 생각되었다. 어쨌든 순결치 못한 것이 미웠던 것이다. 돌이켜 한 번도 장가 가보지 못한, 이름만이라도 총각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장래는 어찌 되었든 우선 그의 순정에 자기의 마음도 어찌 움직여 나갈는지 모를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옥에 티가 있을지언정 이십여 년 꼭 봉해 두었던 자기의 흠도 티도 없는 정조를 아내 있는 사람에게 바치기는 암만 눈 감고 생각하여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봉준의 꼴을 본다면 자기도 사람인지라 어떻게 될는지 몰라서 아예 가기가 싫다는 것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몇 달 째 눈 딱 감고 모른 체하여 왔다.
한참이 지나도 연희는 울었다. 숙희는 이상한 생각으로,
"언니, 일어나라우."
그의 어깨를 흔들 때 그의 무릎 아래로 샛노란 들국화꽃 한 송이가 보였다.
요새 며칠 동안 옥이는 학교도 결석하고 밤낮으로 봉준의 병간호 하기 눈코뜰 짬이 없었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없이 병세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아침도 먹는지 마는지 한 옥이는 영실을 데리고 숨차게 달음질쳤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봉준의 곁으로 갔다. 두 눈이 푹 꺼진 그는 눈을 들어 옥이를 보다가 영실을 보자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숙희씨!"
벌컥 일어났다. 하여 뚫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냐요, 우리 주인집 학생 영실이야요."
영실은 겁이 나서 방구석으로 쫓겨가 앉는다.
<계속>
첫댓글 좋은 자료 주심에 댓글로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