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6
9월20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연중 제2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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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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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ncleB-vEOY
[서울대교구 김도훈 라파엘(제기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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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젊은 시절,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이 기억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과정을 마무리 짓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깊은 감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내게 수도회에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주셨으니, 어서 빨리 돌아가서 이 좋으신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특별하고 대단한 성인 돈보스코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정으로 마구 솟구쳤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마카오에서의 길고 긴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러나 저와는 달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던 고국 땅 조선의 상황은 암담하고 살벌했습니다. 박해가 한창이었기에, 입국 과정은 철저하게도 은밀했습니다. 입국 과정은 소설 몇 권을 써도 남을 정도로 처절하고 위험했습니다.
육로가 꽉 막혀있으니 바닷길을 선택하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건너오다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조선 땅을 밟았지만, 언제나 사람 눈을 피해 산길로, 밤길을 쉼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숙박을 청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노숙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끼니를 자주 건너뛰니 건강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건강한 장정도 견뎌내지 못할 여행길에 온몸은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피 흘리는 순교 이전에 이미 땀과 일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활활 한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적색 순교자들로 흘러 넘치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백색 순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백색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박해 시대가 지나가면서 순교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순교의 의미, 순교의 개념이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흘림 없는 순교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피흘림 없는 순교를 영적 순교,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시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간 수도자들, 고행자들,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증거•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백색 순교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종교 자유 이후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순례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겼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 역시 순교입니다.”
백색 순교에 대해서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각자 삶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증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비록 피를 흘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희생하고,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증언하는 사람이 되며, 백색 순교자로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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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q1IMVz1s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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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없다는 말은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핑계다
인간이 하느님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분명 인간이 당신을 도울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키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성경에서 다윗은 작은 목동에 불과했으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골리앗 같은 거인을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작은 물매와 돌로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 이야기는 외형적인 강함이나 능력보다 하느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 주며, 작고 연약해 보이는 존재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잔 다르크는 농촌 출신의 평범한 소녀로, 군사적 훈련이나 정치적 권력이 전혀 없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프랑스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랑은 마중물과 같습니다. 마중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려면 그에 맞는 사랑만 조금 집어넣으면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나머지는 우리 안에서 알아서 다 해 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우리를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 ‘망상활동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 가 있기 때문입니다. 망상활동계는 뇌간에 있는 신경 네트워크로, 뇌와 신체 사이의 경계를 조절하고 의식, 주의력,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적으로, RAS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행장에서 쇼핑에 정신이 팔려 시계를 보니 이미 비행기 이륙시간이 지났습니다. 좌석을 배정받고 짐을 부쳤기 때문에 자기 없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주위는 자기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집중됩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고 이미 20분 전부터 방송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왜 그전에는 듣지 못했을까요? 망상활동계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오스카 쉰들러가 어떻게 1,100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구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발동하자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자동차와 나치 금배지를 팔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 정도까지의 의지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이게 됩니다. 줄 것이 없었다면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는가 보다는 ‘오늘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지?’라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정해지기만 하면 능력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의지입니다. 사랑하려는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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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하와이엘 잠시 다녀왔습니다. 하루 전에 확인 했을 때는 터미널이 A였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터미널 A에서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신부님이 전화했습니다. 저는 게이트 34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부님도 34에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었습니다. 밤사이에 터미널이 A에서 D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터미널 D로 가야 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 공항은 게이트는 물론 터미널까지 종종 바뀐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행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게이트 바뀐 걸 몰라서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고난의 잔을 받아 들였습니다. 신앙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내가 바뀌는 것이지, 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것도 비슷합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여론을 무시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빠져서 국정을 운영하면 혼란이 발생합니다. 원칙과 공정에 따라서 법이 집행되어야 하는데,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국정에 개입하면 국가의 질서가 엉망이 됩니다. 국방부 장관도 잘 했다고 했고, 절차대로 마무리했으면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특검’의 논란이 되는 것은 외압이 있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경찰청장도 잘 했다고 했고, 절차대로 마무리했으면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문’의 대상이 되는 것도 외압이 있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권력과 권한은 권력과 권한을 준 국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권력과 권한을 사적인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살로메의 청을 받아들여 의로운 사람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관리는 청렴해야 하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특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적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신약성서의 집필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도 인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에게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헌신과 죽음도 헛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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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는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위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오늘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짐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나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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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복음 환호송에서 철부지라는 낱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십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이른바 철부지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특출한 인물들이 아니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 안에 베풀어져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악령과 병에 시달리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부족함이 많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들이 할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위치에 서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그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평가 기준이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기준과 가치의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을 예수님께 적용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1코린 15,12) 하고 먼저 단정 짓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철부지의 위치에 서서,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예수님께 맡기고 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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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아십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1) 복음서 저자가 여자들의 명단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열두 사도만큼이나 중요한 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여자들의 명단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모든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지만(마르 14,50), 여자들은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지켜보았고, 사도들이 숨어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마태 28,1-8)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서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여자들의 이름을 따로 특별히 기록해 놓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앙을 증언하는 ‘증인들’도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명단이 똑같지 않고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보통 ‘전승의 차이’라고 말하는데, ‘전승의 차이’는 사실 ‘기억의 차이’입니다. 예수님 승천 뒤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사람마다 기억에 차이가 생겼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다른 자료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만 의존해서 명단을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다른 여자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시중을 들던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아서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한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간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모두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데리고 가는 것은, 양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수가 몇 십억 명이라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 신앙인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시고, 신앙인들이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내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3) 우리 교회에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순교자들인데, 우리가 그분들의 이름을 모르고, 그분들의 삶을 모른다고 해도,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순교한 일의 가치와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전해지든지 전해지지 않든지 간에 모든 순교자는 다 위대합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서나 ‘무명 순교자’일 뿐이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니, 그곳에서는 결코 무명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신앙인들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기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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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예관진 이레네오 신부님]
김천에는 직지사가 유명합니다. 4월 어느 화창한 날. 벚꽃이 한창 필 무렵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직지사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지사 벚꽃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직지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니까 왼편에 군밤 리어카가 서 있었습니다.
그냥 그 앞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는데 그 군밤 사장님이 아무 말씀 없이 지나가고 있는 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손을 펴보니 군밤 하나였습니다.
‘야! 이거 의외의 수확인데’ 하며 몇 걸음 걸어가서 입안에 톡 털어 넣었습니다. 어! 근데 밤이 맛이 있네요.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
갑자기 한참 가고 있던 길을 되돌아서 그 군밤 리어카로 가서 밤을 한봉지 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군밤이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미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껴지니 밤을 살 때 결코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장사는 이렇게 해야되!’라고 생각하며 군밤을 하나씩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군밤 한 알!’ ‘가던 길을 돌아서게 했던 그 군밤 한 알’
사제는 그 군밤 한 알을 쥐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가 줄 수 있는 군밤 한 알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사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하느님 복음의 깊은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그 맛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낫게 된 여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열정적으로 돕습니다.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맛본 그녀들은 이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밤 하나를 쥐어주는 사람처럼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맛보여주는 사람이 지금 우리 세상에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한명 한명이 세상 사람들에게 군밤하나를 쥐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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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인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라삐를 따라다닐 수 있는, 그래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여인들’의 몫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 차별은 사회 문제였고, 오늘날 성차별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자주 표현합니다. 그러한 관심은 실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도 루카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교자들을 존경하며 따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약자들이 많고, 자신이 왜 약자인지조차 모르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점점 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지, 또 갈수록 양질의 일자리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있는지 ……. 제 자식이 비정규직이면 정규직이 되는 것에 그리 애가 타고 부유한 이들의 부정과 편법 상속에 분노하면서도, 대개는 이러한 사회 현상의 근본 원인과 개선을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버리는 문화’로 표현되는 사회 경제 논리만으로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기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통하여 더 정의롭고 연대하는 세상의 증인이자 예언자가” 되어야 하며, “복음은 이상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돈과 권력』 추천사 참조).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회의식을 제거하는 경우가 많지요. 세상일과 신앙의 가치를 분리한 채, 마치 복음 읽기와 묵상을 먼 나라 이웃 나라 기행문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여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문제아셨습니다. 차별받고 학대받는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욕먹을 각오로 세상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복음 묵상의 열매입니다.
제발 부탁하건대, 누군가 피 흘려 이룬 신앙을 제 한 몸 평온하려는 도구로 타락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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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학생 시절 읽었던 ‘엔또 슈사꾸의 침묵’은 제게 큰 감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라는 어느 시골 신부의 마지막 표현처럼 “모든 것은 다 은총입니다.”라는 점을. 생명도 죽음도, 배교도 순교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소설이었습니다. 「침묵」은 이렇게 그 내용을 전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집니다.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사실 확인을 위해 일본 선교를 지원합니다. 잠입에 성공하지만, 그 역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밟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면 할수록, 그의 신자들은 더욱더 참혹한 고문을 받습니다. 자기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우들을 보면서 신부는 고뇌에 빠집니다. 배교해서 죽어가는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을 위해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묵인해야 하는가? 어느 것이 참된 사랑인가? 고뇌의 늪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밟는 네 발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의 말이 이어집니다. ‘주님, 당신의 침묵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 보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1784년에 자기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영세하였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한국에 첫 그리스도 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도들 자신에 의해서만 세워졌다는 점에서 교회 역사상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신생 교회는 아직 어리면서도 믿음에는 그토록 굳세어, 몹시 사나운 군란을 거듭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기도 채 못되어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27년 정해, 1839년 기해, 1846년 병오, 1866년 병인 년에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피로써 영구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들은 혈통으로나 언어로나 문화로나 여러분의 조상입니다. 아울러 그분들은 피로써 증거한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의 부모들이십니다. 열세 살 난 소년 유대철 베드로로부터 일흔 둘의 노인 정의배 마르코에 이르기까지 남자, 여자, 사제, 신도, 부자, 빈자, 상인, 양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어 가셨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으로 태어난 세계 유일무이한 교회라는 점과 갓 태어난 신생 교회는 곧바로 수없이 끔찍한 박해를 굳건히 이겨냈고, 짧은 세월 안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장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그분들이 피로써 지킨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끊임없는 고통 중에도 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 내셨고, 그 사랑으로 희망을 사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이는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8,35.37) 그러기에 한국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고 순교하였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그 가치를 위해 온 삶을 투신한 분들이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그분들의 위대한 삶을 뒤따르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조들이 사셨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가 마치 절대 가치인 양 여겨지는 세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적은 선조들이 겪었던 박해라는 물리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밋빛으로 위장된 갖가지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유혹들입니다. 이런 유혹이 더 심해지고 있는 오늘이라는 현실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신앙인에게 근본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선택을 위한 우리 모두의 내면적인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치열한 싸움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 가치를 살아가기 위해 내려야 할 선택의 순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미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복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9,23)하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던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십자가가 생명과 부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 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자신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를 예수님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욕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삶의 의욕도 없고 성취 욕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마침내 멸망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고, 이기심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 문제입니다. 고통도 죽음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 있는 고통인가, 무의미한 고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당신 몸소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당신의 제자라면 신앙으로,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과 자기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곧 순교자의 삶을 사는 길이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산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피 흘림의 적색 순교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지만, 피 흘림 없는 백색 순교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살아가는 삶이기에 이보다 더 거룩한 순교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칠 수도 있고 중간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신 예수님은 물론 오늘 우리가 현양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을 바라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사랑으로 바친 순교자들을 뒤따르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안에 큰 나무되니 님따름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성가, 103위 순교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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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괜히 미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 ‘나’를 함부로 한다는 생각 등으로 미워집니다. 다시 생각하면 제게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그냥 밉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멀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지는 않지만, 멀리하지 않는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원망과 미움이 애정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미움이란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아마 모든 사람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봉사자들의 고충을 종종 듣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하소연하시고 그래서 더 이상 봉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심리적 안녕감, 만족감, 행복감 하물며 엔도르핀이 세 배 이상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타인을 돕는 행위라고 합니다. 봉사 과정에서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도 생길 수 있지만, 봉사에 집중한다면 그런 부정적 감정을 넘어서는 큰 선물을 주님께 받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대로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삶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는 1791년의 신해 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 만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박해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미움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었고, 구원의 선물까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원수를 만들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과거 순교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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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의 희망으로 시련을 감당하였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1요한4,10-12)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의 사랑을 살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천주 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 행복이라는 미래의 확고한 희망으로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40년(1784년) 전 초기에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천상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신앙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을 두고 지혜서는 예언하였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천주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신앙 선조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 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는 늘어갔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40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세상과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 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신앙인의 모습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추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합니다.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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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길을 떠나네>
루카 8,1-3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함께 길을 떠나네>
“그분과 함께”(루카 8,1)“그들과 함께”(루카 8,2)
기쁨을 만나
기뻐하는 사람들
기쁘게 하고파
기쁨과 함께
길을 떠나네
희망을 만나
희망하는 사람들
희망을 나누고파
희망과 함께
길을 떠나네
사랑을 만나
사랑받는 사람들
사랑하고파
사랑과 함께
길을 떠나네
베풂을 만나
거저 받은 사람들
베풀고파
베풂과 함께
길을 떠나네
살림을 만나
살아난 사람들
살리고파
살림과 함께
길을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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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순교적 삶-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에 어둠에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 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287장 입당성가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퇴장 성가 역시 두분의 작품인 “순교자 찬가” 283장을 부르게 됩니다.
오늘 적당한 시간되면 두 성가를 부르면서, 또 다음 시편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순교영성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5)
오늘 우리는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지만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의무기념으로 지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18-19세기 100여년에 걸친 박해시기 10000여명 순교자들을 낸 것은 세계 천주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명례방 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경신박해(1860년), 병인박해(1866년), 한티 천주교 박해(1868년), 제주도 교난(1901년)등, 무려 1세기 100여년 동안 상상하기도 끔찍한 순교자들의 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물든 때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박해역사를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말그대로 순교자들의 한국천주교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현 상황의 매우 위중하고 심각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폭력의 악순환, 전쟁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도대체 앞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후위기만 해도 심각한데 국내외 상황은 여전히 어지럽고 혼란합니다. 길과 희망, 진리와 빛을 잃고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같습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무엇하나 낙관적 징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라도 순교영성을 새로이 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주님의 전사, 진리의 전사, 평화의 전사, 빛과 생명의 전사”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로 구체화되며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들처럼 한결같은 내적평화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신뢰와 사랑의 순교적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은총의 선물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축복이 뒤따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기일전 용기를 내십시오. 참으로 이런 은총에 힘입어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아 주님 사랑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이 우리를 사기충천하게 합니다. 새삼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고,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하며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 순교영성을, 백절불굴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답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종파를 초월하여 예외없이,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진리의 길 주님 하나뿐이라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길과 희망, 빛과 생명, 진리의 주님을 잃었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무지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잃고 자기를 잃은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좀비’와 ‘헛것’의 유령같은 삶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끝으로 제 평생 좌우명 고백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구원은 요란한 구호가 아닌 한곁같은 파스카 삶의 실천으로 성취됩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은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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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8,3ㄷ)
<예수님의 협조자들!>
오늘 복음(루카8,1-3)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라는 말씀입니다.
9월20일인 오늘은 본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곧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대축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큰 대축일을 9.22(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거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합천본당은 이 큰 대축일을 9.22(주일)로 경축 이동하여 기념하고, 오늘은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미사'로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바쁘셨던 분이십니다.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낫게 하시느라 참으로 바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협조자들이 바로 '열두 제자들'이며, 오늘 복음에서 전해지고 있는 '여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의 활동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여자가 바로 일곱 마귀가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십자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사랑에 큰 협조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성실한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성실한 협조자'가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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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순교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순교자들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묻게됩니다.
세상의 삶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십자가의 정체성으로
순교의 꽃을
가득 피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신앙의 새아침을
열었습니다.
순교로 우리의
신앙을 아름답게
지켜 주셨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삶의 의미를
십자가에서 찾은
사랑의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희망의 씨를 이 땅에
뿌리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삶의 의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뼛속 깊이
뼈가 부서져도
신앙을 고백한
이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통해
참된 삶의 의미를
되찾는 시간되십시오.
순교는 인내를 다시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삶이란 십자가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입니다.
기쁜 순교자 대축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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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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