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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조주감파(趙州勘婆)
- 조주가 노파를 간파하다(
권위에 현혹되지 말고 부처가 되는 길로 똑바로 가세요
상근기 부처되는 것 아니라
부처 향한 치열함이 상근기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결코 부처가 될 수는 없다
어느 스님이 노파에게 “오대산으로 가는 길은 어느 쪽으로 가면 되나요?”라고 묻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 스님이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인지 걸어갔을 때, 노파는 말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뒤에 그 스님은 이 일을 조주(趙州)에게 말하자, 조주는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을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간파하도록 하마”라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바로 노파가 있는 곳에 가서 조주는 그 스님이 물었던 대로 묻자, 노파도 또한 대답했던 대로 대답했다. 조주는 돌아와 여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오대산의 노파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제 완전히 간파했다.”
무문관(無門關) 31 / 조주감파(趙州勘婆)
1. 성불하라는 말은 자리이타의 정신
“성불하세요!” 다시 생활 전선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를 보고 산사의 젊은 스님은 간곡하게 합장을 합니다. 짧은 산사의 생활이었지만, 부처님께 천배도 받쳤고 스님들에게 좋은 법문을 많이 들어 뿌듯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지쳤던 몸과 마음이 모두 되살아나는 느낌이니까요. 산사를 빠져나오며 잠시 웃음이 얼굴에 번져 오릅니다. 우리를 배웅했던 그 스님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나 있을까요. “성불하세요!” 정말로 그 스님은 우리가 부처가 되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정말로 부처가 된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 스님을 만날 일도 당연히 그의 법문을 들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미 부처가 되었는데, 산행이 목적이 아니라면 산사에 들려 대웅전의 석가모니에게 절을 할리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성불하세요!”라는 인사말에는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마지막 인사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젊은 스님에게 농을 던져볼 수 있다는 겁니다. “스님, 이제 제가 더 보고 싶지 않나요? 저 성불하지 않고, 다시 스님을 보러올 거예요.”
물론 상대방에게 성불하라는 말은 단순한 레토릭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자리이타의 정신이니까요.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러니까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지요.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산사에서 치열한 자기 수행으로 우리는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현실성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조건이 좋은 산사가 부처가 되는 데는 더 유리할 겁니다. 갑을 관계로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는 팍팍한 경제생활에서 커다란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아이들의 육아와 교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고, 산업자본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오염된 물과 공기, 그리고 음식을 꺼려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산사가 아닌 세속에서 웬만한 스님보다 더 주인으로 당당한 삶을 사는 데 성공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부처가 되려는 오매불망의 일념이 없다면, 번잡한 세속의 일에도 불구하고 부처가 되는 결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쩌면 산사에서보다 더 끈기 있게 노력해야만 할 겁니다. 끈기! 끈기는 근기(根機, indriy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이런 의견에 반대입니다.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anātman)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능력,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변하는 능력을 긍정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면 근기가 탁월하다고, 그러니까 상근기(上根機)라고 이야기해야합니다. 반면 끈덕지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하근기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2. 일상에서 성불한 사람이 최상근기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겁니다. 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근기여서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상근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산사에는 상근기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산사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열망이 쉽게 식지 않아서 사람들이 끈덕지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반면 일상생활에서 하근기가 많은 것은 치열한 수행을 방해하는 너무나 복잡한 조건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다잡으려면 거래처 사람이 전화를 하고, 애인이 찾아와서 울고, 아이들이 휴가를 가자고 조르니, 어떻게 끈기 있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거사(居士, Kulapati)라는 말이 있지요.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중국 당제국 때 활동했던 이통현(李通玄, 635~730)이란 거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이란 방대한 저작을 남길 정도로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했던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스님들도 함부로 다루기 힘든 재야의 고수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 조계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마저 그의 책을 요약해서 정리한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를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통현만 상근기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책도 짓지 않고 어떤 스님과도 논쟁을 하지 않는 진정한 재야의 고수는 도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과 논쟁에는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거나 논쟁에서 이기려는 허영과 자만이 깔려 있는 법이니까요.
사실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명성은 덧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겁니다. 그런 명성에 연연하는 순간, 우리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명성이 되니까요. 더군다나 선불교의 정신은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아닙니까. 문자가 자신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하도록 할 수는 없으니,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통현과 같은 거사를 넘어서는 진정한 고수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정말 스님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겁니다. 산사에서 치열하게 노력해도 되지 못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세속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서른한 번째 관문을 긴장으로 몰고 가는 어느 주막의 노파(老婆)가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속에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내는 부처가 되었다면, 스님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못 수행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동요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3. 조주 스님의 노인 간파는 궁색
부처가 되려고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778~897)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오대산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한 참을 왔으나 오대산이 나오지 않자, 스님은 당혹했나 봅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지요. 다행히 어느 주막에 이르게 되고, 스님은 그곳 노파에게 길을 물어보게 됩니다. 그러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驀直去)”라고 일러 줍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스님이 그녀의 말대로 가던 길을 가려고 한두 걸음 떼었을 때, 노파는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작은 소리였지만, 그 스님에게는 경천동지할 뇌성처럼 들렸나 봅니다. 어쩌면 스님은 임제(臨濟, ?~867)의 가르침을 떠올렸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산사에 들어가면 주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사실 그 사람에게 진정한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노파는 스님을 조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가라는 지시대로 가는 스님이라면, 조주를 만나도 결코 주인이 되지 못하리라는 탄식일 수도 있지요. 조주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조주가 자신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아마 오대산에 이르러서도 스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겁니다. 조주가 그런 내색을 모를 리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문하의 제자들도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을 겁니다. 당당히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들이 부처되기 놀이를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었을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위대한 선생이란 명성을 날리고 있던 조주도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진정한 재야의 고수, 제자니 선생이니 산사니 주막이니 가리지 않고 주인으로 살고 있는 진정한 부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조주는 몸소 움직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을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헤아려보도록 하마!”
다음 날 몸소 조주는 노파가 있다고 하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오대산을 처음 찾아가는 스님처럼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물어봅니다. 그러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라고 일러줍니다. 노파의 말대로 한두 걸음 발을 떼자, 그녀는 또 말합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그렇습니다. 노파는 조주를 찾아가려는 어느 스님한테나 똑같이 대응했던 겁니다.
조주가 너무나 유명하여 그에게서 배우려는 스님들이 많이 주막을 지나갔나 봅니다. 어쨌든 조주는 안심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동요하던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대산의 노파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제 완전히 간파했다.” 그렇지만 적진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려는 스파이처럼 움직이는 조주의 행동에 궁색한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오히려 노파의 대응이 더 안정감이 있고 당당하지 않은가요. 거짓으로 물어보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이야기해주는 노파를 정말로 조주는 간파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노파가 조주의 노파심을 알고 안심을 시킨 것일까요?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음알이에 빠지지 마세요. 그냥 주인이 되는 길이나 “똑바로 가세요(驀直去)!”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