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아주 특별한 외출을 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경남 지역을 벗어난 서울이 목적지로서 새벽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데 얼추 17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만만찮은 여정이다. 이를 군에 비유하면 관할 구역인 위수지역(衛戍地域)*을 벗어난 셈이기 때문에 특별 외출에 해당하지 싶다. 그런데 이 여정은 서울에서 대학 동창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오는 게 목적인 나들이다.
아내의 모교인 대학에서는 매년 5월 중순에 졸업 50주년을 맞이하는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홈커밍데이(homecoming day) 행사를 개최해왔단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4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올해 재개하기로 했다는 전언이다. 그동안 미룰 수밖에 없었던 1970~1973년의 졸업생들을 한데 묶어서 개최한다며 학창시절을 돌아볼 계기가 마련되어 몹시 설렌다고 했다. 꼭 참석하려고 KTX 승차권까지 예매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병의 확진과 수술 때문에 몽땅 물거품이 되었다.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리고 낙담하던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수술 후 3개월이 경과한 지난 10월 각종 검사 결과 이무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심기일전하려는 계기로 삼고 싶어서 서울 나들이를 계획했던 것 같다. 지난 홈커밍데이 행사에는 동기동창 중에 미국과 일본에 이민 갔던 친구들을 비롯해 각자의 삶을 꾸리던 친구들 열 대여섯이 모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자기만 참석하지 못했다며 애통해 하다가 마침내 오늘 몇몇이 만나기로 약속해 설레고 기대된다는 말로 내심의 단면을 넌지시 엿보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이 소풍날을 앞두고 달뜨던 심정과 일맥상통할까. 만남의 날짜는 오늘(11월 7일)인데 서울을 오갈 왕복 KTX 승차권은 지난 달 중순에 예매를 하는 모습에서 숨겨진 마음을 충분히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라고 손사래를 치며 내치려고 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새벽 여섯시 반 무렵에 마산역을 출발하는데도 한 마디 불평이 없이 다소곳해서 신기했다.
오늘 새벽 인정(寅正 : 4시) 조금 지난 시각에 슬그머니 일어나 거실로 나와 아내가 어떻게 하는 지 묵묵히 지켜봤다. 나보다 얼추 반시간 쯤 늦게 기상해 세수를 하고 단장을 한 다음에 5시 반 무렵에 집을 나서며 “기대된다”고 하던 말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본심을 대변하는 듯 했다. 거기에는 지난 봄 수술을 하고 나서 툴툴 털고 일어선 스스로에 대한 믿음 과 자존감이 담겨있지 싶다. 숨겨진 마음이 어떠하든 건강을 되찾았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은 느낌에 내 기분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어느 가을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종로의 탑골공원 부근에서 점심이나 한 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었다. 군소리 없이 약속 날짜에 KTX 열차편으로 상경했더니 친구 둘이 서울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거의가 평소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그중에 한 친구는 50년이 훌쩍 지난 뒤에 만나는 기쁨도 있었다. 그날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오늘 첫 새벽부터 일어나 채비를 하고 불원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한 걸음에 달려가는 아내의 심정도 그날의 내 마음과 별반 차이가 없지 싶었다.
육체적 건강은 삶을 누린 세월에 반비례하게 마련일까. 고희(古稀)를 넘기며 아내의 건강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아 무척 당혹스럽다. 젊은 날엔 내가 더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지금은 정반대 상황으로 바뀐 것 같다. 몇 해 전에 담낭절제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척추와 무릎 관절 문제가 불거져 수시로 병원을 찾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지난봄엔 전혀 뜻하지 않은 수술을 받고나서 방사선 치료까지 감수했다. 수술 후 6개월 뒤인 지난달(10월)에 각종 검사 결과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음의 검사는 또 다시 6개월이 지난 명년 춘삼월로 예정되었다.
불가(佛家)의 설(說)로서 ‘사람이 세상에서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여덟 가지 고통’이 팔고(八苦)이다. 여기에는 우선 ‘태어날 때 받는 고통’인 생고(生苦), ‘늙어가는 고통’인 노고(老苦), ‘병들어 받는 고통’인 병고(病苦), ‘죽음을 맞이해 겪는 고통’인 사고(死苦)가 있다. 이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인 애별이고(愛別離苦), ‘미운 사람이나 싫은 일에 대한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는 고통’인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음(五陰) 즉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고통’인 오음성고(五陰盛苦) 등이 그들이다. 삶을 누리려면 이처럼 다양한 고통을 겪게 마련인데 기껏해야 병고(兵苦)에 시달리며 허우적거리다가 세상 모두를 잃은 듯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어쩌면 덜 떨어진 못난이의 사려 깊지 못한 짓이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나서 49번째 해가 시작되는 날이 내일이다. 그동안 큰 허물없이 나이 듦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다가오는 새해에 이르면 내가 여든, 아내가 일흔 여섯의 문턱을 넘을 뿐인데도 육체적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궁색한 구석으로 내몰렸다. 내외가 엇비슷하지만 아내가 더더욱 심해 애잔하다. 차라리 내가 대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다. 제발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건강하면서 품위를 잃지 않고 허락된 날까지 삶을 누리다가 이승의 삶을 접는다면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련만 바람처럼 그리 될지 모르겠다.
(한판암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