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해 가는 구원의 신앙여정
한국에서 제일 먼 지구 끝
아르헨티나에 사는 교포들은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며 조국에 가는 것을 사모합니다. 하지만 비행기로 여행을 해도
비행시간만도 30시간이 훨씬 넘기에 아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잠을 잘 자는 사람들 입니다. 행여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을 이용하는 경우, 넓은
공간에서 안락한 큰 의자를 젖혀
침대로 만들어 편안히 먹고 자며 장거리 여행을 즐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성을 향해 가는
여행도 그렇게 안락한 의자에 앉아 TV 나
보면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경은 본향을 향한 여행길이 어떻다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나아만장군이 시리아에서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먼 여행을 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성경에는 문둥병자(우리들)가 고침 받은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 이었습니다.(왕하 5:1)
하지만 그가 문둥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작은 계집아이인 하녀의 말을 듣고
믿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사환)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왕하 5:9-10)
나아만은 엘리사가 뛰쳐나와 정중히 자신을 영접하고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며 문둥병을
고칠”(왕하 5:11) 것으로
기대했으나, 얼굴도 안 내밀고 겨우 종을 보내
시리아에 있는 강들보다도 못한, 들판에
흐르는 작은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하자 매우 분노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치료방법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걸 맞는
뭔가 기적적인 놀라운 치료법으로 쉽게 고쳐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때
그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르며 힘든 것을 행하라는 것도 아닌데
요단강에 내려가서 씻으시라고 권하자 겸손히 자신의 자존심과 교만을
버리고(자기부인, 회개) 엘리사 말씀에 순종하여 7번 물에 잠그고 나니
문둥병이 깨끗하게 사라져 어린아이 살처럼 부드럽게 되었습니다.(거듭남)
혹여 우리도 성경말씀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보다는 내 본성에 맞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아만이 엘리사가 전해준 그대로, 다른 데도 아닌 바로 요단 강에 가서,
또 적당히 3번도
아니고 7번을 몸을 씻어야 병이 나을 수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성경 말씀이 전해주는 치료법을 정확하게 따라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하나뿐이며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6장에서 더욱 명료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5병2어의
놀라운 기적으로 남자들만 계수해도 5000여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12광주리나
됐다는 내용이 나오고, 이어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칭송하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교가 미워하고 배척하는 그 예수님을 따르는, 열성이 대단한 자들
이었습니다. 세상 복을 받기 위해 또는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오늘날의 신자들 모습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왠지 그 수많은 군중들을 내쫓으며 그들을 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피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기대와 군중들의 기대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오셨지만
군중들은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라며 심히 모욕적인 말씀으로 그들을
흩으며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 부귀영화나 어떤 기적만을 추구하는,
곧 주님을 찾는 동기가 잘못된 자들은 동일한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말씀, 진리)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곧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그들이
먹는 떡에만 관심을 보이자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라며 그들을 불신자로 취급했습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기 유익을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
입니다. 이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5-39)
예수님께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내쫓지 않는 하나님 백성은
진리를
통해 예수님께 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진리에는 관심이 없이
육신의 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는 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요 6:37)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버지가 이끄시는
한 백성이 있다고 하시는데도 군중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한 백성은 어떤 자들입니까?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진리를)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리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요 6:44-46)
그들은 성경말씀을 듣고 배워 진리만을 붙잡고 따라오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선생들이 위 말씀들을 크게 왜곡하며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이끄셨기 때문이고 여러분들 중 한 명도 쫓아내지
않고 모두 다 구원해주십니다” 하면 모두들 크게 아멘! 하며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듣고 배우지 않은 군중들을
다 내쫓았습니다.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허황되고 허탄한 이야기인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4-55) 라고 설교하십니다.
주님의 살과 피는 진리의 말씀을 의미합니다.(계 19:13) 그럼에도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라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지한 군중을
보시며, 또
다시 안타까이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요 6:65) 라며 군중들의 기대와
다른 이상한 말씀을 누차 반복하시자 군중들은 실망하며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로 믿고 칭송하지만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그저 쉽게 따라만 다니면 되는 줄 알았던 무지한 군중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안타깝고 어이가 없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물었고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7-68)
대답하며 요한복음 6장이
끝납니다. 즉 6장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자들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그런 수많은 신자들을 보시며 속이 미어지십니다. 그런
신자들이 많을 것을 미리 예지하시고 “거짓 선생들의 미혹을 조심하라” 고
그렇게 애타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선생들은 말씀을 한 구절씩 떼어다가
인간의 본성에 맞게 각색을 해서 거짓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금송아지 하나님'을 만드는 엄청난 범죄입니다. 신자들도 돌이키는
회개도 없이 그런 쉽고 편한 교리를 따라가지만, 오죽하면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며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게 ‘도대체 너희를 모르겠다’ 고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가르쳐주는 구원의 진리만을 신뢰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지만 주님이 나를 인정해주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영혼의 평안을 느끼며 세상과 육신의 소욕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부르심을
입고 (또)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계 17:1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 물을 마시라고 청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한 그 많은
사람들이 택하심(거듭남) 곧 빼내심을 얻지 못해 구원의 대열에서 안타깝게
낙오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날 수 있기에 (벧전 1:23) 진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거듭날 수가 없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3:5)
신자들이 기복주의나 질병치료의 기적 등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피하시기에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바른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활동이나 선교 등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성경진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오늘날,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문제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향을 가는 구원여정은 넓고 안락한 침대의자에
누워 안일하게 자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피하고 싶은 신자들이 되지 말고
말씀을 통해 진리를 듣고 배워 아버지(말씀)가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송전서 (daum cafe :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