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만명의 중공군을 상대로 1만 5천명의 미군과 영국군이 퇴각작전을 벌이다가 흥남 부두에서 민간인과 국군을 먼저 193척의 군함으로 피신시키고 자신들은 중공군과 계속 싸우며 남하를 저지하다가 그중 6500명이 동사 또는 전사를 한 전투이다.
당시 장진호
6.25 전쟁 동안 벌어진 가장 치열한 전투이다.
특히 세계사에서는 '현대에서 미국과 중국이 최초로 맞붙어 싸운 전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사건이다.
독일군과 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또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로 꼽히는 전투. 게다가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장진호로 진군하는 해병대원들의 모습
미국 입장에선 해병대뿐만 아니라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전투이다. 미군이 국지전에서 손해를 입거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손해를 본 경우는 있지만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 명 단위가 전투력 소멸 상황에 빠진 건 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투항한 중공군 포로들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총공격을 시작되었습니다. 미 해병은 자기들이 지키던 고지를 사수하였지만 중공군에 밀려 자신들이 왔던 험난한 길을 되돌아 가야만 했었죠. 밤이되면 영하 30도의 강추위 속에서 중공군에 동상이나 설사로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하였고, 오희려 이들은 스스로 미 해병에 포로가되거나 피난민 틈에 섞여서 도망가는 병사들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맥아더(오른쪽) 장군과
장진호 전투를 성공리에 이끌었던 미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맥아더는 장진호 전투당시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
우리 전투병력의 현 상태는 중공이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한 전쟁을 치를 준비가 확실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본 사령관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으나, 본관의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라는 유명한 암호전문을 보낸다.
장진호 전투시 중공군을 지휘한 제 9병단장 쑹스룬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장군은 중공군 제9병단장 쑹스룬(송시륜(宋時輪), 1907-1991)
생긴 것과는 달리 아주 불 같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의 불 같은 성격은 중공군이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만 집착하게 되어 나머지 부대가 무사히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는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많은 중공군 장교들과는 달리 황포군관학교에서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다. 또한 홍군 초기부터 마오쩌둥의 부대에 가담하여 대장정에도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간 국민당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전을 모두 겸비한 역전의 용사이자 전투에 잔뼈가 굵은 유능한 게릴라전 지휘자였다. 당시 중공군에는 계급이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계급이 도입되자 상장에 임명되었다.
장진호에서 얼어죽은 미군 시신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동상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혹독한 강추위에 총이 얼어붙고, 동상 희생자들이 많이 발생하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흥남까지 후퇴한 미 해병사단은 승리자였습니다.
그들이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대략 5,000여명이었고 중공군은 무려 3만7,500여명이 희생되었기 때문 입니다.
미국은 북한이 평양을 잃고 피신해 임시수도로 정한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 방면으로 미 해병대 1만 2천여 명을 전진시켜 주둔시켰고 미 육군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날리고 있었으나,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미군은 중국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이 당시 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다.
이 사진은 장진호에서 포위당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미 해병대원을 찍은 사진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몸을 감싸고 손에는 얼어붙은 깡통을 들고 있으나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과 살아야 한다는 의지에 찬 눈빛이 인상적인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은 1950년도의 US 사진가 공적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때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이 매섭게 추운 아침이었다. 그야말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감사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녁이면 그 밤이 샐 때까지 견딜 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짧게도 또는 영원 같이도 느껴지는 세계다. 여기에서 해병대원에게 "크리스마스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하는 세계인 것이다.
미군이 중국군을 얕보고 있는 증거로, 당시 미국 제10군단의 작전거리가 원산~수동~신흥에 이르는 작전구역을 담당해서 480km나 되었다.
상식적으로 병참 문제 때문에라도 작전거리를 이렇게 길게 잡고 부대를 길게 배치하는 일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진격 작전은 미친 짓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서 휴전선이 지금처럼 남쪽으로 밀려내려온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맥아더의 병크는 그야말로 천추의 한이라할만하다
전우의 시신을 수송차에 태우고 걷고 있는 미 해병대 대원
전장에 전우를 두지 않는다는 미 해병대의 전통에 따라 전우의 시신과 함께 철수하는 미 해병대 대원들. 시신은 차량에 태우고 자신들은 걷고 있는 장면
설상가상으로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에는 차출 명령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지휘관의 병크가 터진다.
바로 중국군 포로가 실토한 정보인, 대군이 산 속에 숨어있다가 일거에 포위한다는 작전을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재앙은 서서히 10군단을 덮치기 시작했다
11월 초에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기온이 서서히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의 위도는 북위 40°23, 고도는 평균 1,200m지만 이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로 전투가 일어났던 12월 평균 기온이 -11.6도인 극한지대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스크바의 강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심심하면 영하 35도의 강추위가 양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미처 방한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미군은 두껍게 옷을 껴입었어도 동상자가 속출했다. 중국군이라고 미군보다 사정이 나을 건 없었다.
그리하여 양군의 사상자는 교전보다 이 강추위 때문에 훨씬 많이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한국전쟁 판 모스크바 전투였다.
추위로 따지자면 장진호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는커녕 그보다 더 추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웠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하 30도 이하는 전투 기간 내내 딱 한 번기록 되었지만, 장진호에서는 영하 30도 이하를 밥 먹듯이 기록했는 데다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시속 60km의 칼바람이 내내 몰아쳐 체감기온은 그보다도 훨씬 아래였다.
미군이 극한지에서 전투를 치러 본 경험은 장진호 전투가 유일하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장차전 대비에서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명예 훈장 수훈자 131명 중 13명이 장진호 전투 생존자였던 만큼 미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첫댓글 화이트하우스에서 급히 날라온 1급명령은 36계.. 암호명 Christmas Cargo 엿지
나중에 트루만은 내가 하사한 크리스마스선물이라 자화자찬하면서 Miracle of Christmas 로 명햇다
그렇게 얼어죽은 미군들이 수천명이엇지만
전쟁끝나고 몇년후 나온 미드 '하와이파이브오'에서는 한국이 야자수가 넘실거리는 열대나라로 둔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