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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클로드 카리에르에 대한 부고이자 그가 직간접적으로 흔적을 남긴 세편의 영화(<세브린느>(1967), <세브린느, 38년 후>(2006), <사랑을 카피하다>(2010))에 공명하는 제스처와 소리를 둘러싼 짧은 생각이다. 지나고 보니 미로처럼 만들어진 묘지를 헤쳐왔다는 인상이다. 카리에르에서 루이스 부뉴엘로, 부뉴엘로부터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로, 올리베이라에서 미셸 피콜리로, 다시 카리에르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로, 또다시….
종소리가 들리면 영화는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 사진제공 SHUTTERSTOCK.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볼 뿐인 우리는 어떤 흔적을 가지고 시나리오작가에 접근할 수 있을까? 카메라에 붙잡힌 장면의 세부적 요소, 혹은 배우가 선보이는 강렬한 이미지와 대사, 그도 아니라면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의 구조와 형식에 대한 인상 같은 것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론한 요인들 가운데 어느 것도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각본가의 텍스트가 완성된 영화에 물리적인 흔적을 새기지 않기 때문일 테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각본은 영화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첫 번째 근거로 주어지지만, 영화가 완성을 향해 나아갈수록 여러 사람에 의해 분해되고, 이런저런 주석들로 조각나는 과정을 치르며, 끝내 만들어진 영화와 분리된 대상으로 사라진다.
이는 한편의 영화에 대한 시나리오작가의 ‘참여’가 촬영자나 편집자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에 해당함을 보여준다. 지난 2월 8일 89살로 세상을 떠난 각본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이런 맥락에서 그의 오랜 파트너인 루이스 부뉴엘의 비유를 빌려 영화에서 작가의 지위를 언급한다. “영화란 성당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작가들의 이름이 크레딧에서 지워져야 하며,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순수한, 이름 없는 필름 릴 몇개만 남겨야 한다.”(<영화, 그 비밀의 언어>)
영화의 안내자, 산파, 상담가
<양철북>
그가 공감을 표시한 부뉴엘의 견해와는 무관하게 카리에르는 영화사의 거대한 이름으로 남겨졌다. 영화와 무대, TV시리즈를 오가며 150여편의 시나리오를 남긴 각본가이면서 한편의 단편을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또 희곡작가, 배우, 애독가이자 저술가, 자유주의적 사상가, 국립영화학교 교장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은 인물의 역량을 설명하는 건 만만치 않다. 26살에 자크 타티와의 협업을 시작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어느 하녀의 일기>(1964)를 계기로 만년의 부뉴엘과 6편의 장편 시나리오를 함께 쓰고, 누벨바그의 태동기(루이말의 <비바 마리아>(1965))와 비디오 작업을 중단하고 제도적 극영화로 되돌아온 고다르의 전환적 시기(<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1980))에 동참했으며 지난해까지도 필립 가렐의 시나리오를 담당한 이 작가의 궤적은 전후 유럽영화사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증언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카리에르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각색한 <프라하의 봄>(감독 필립 코프먼, 1988), 귄터 그라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양철북>(감독 폴커 슐뢴도르프, 1979)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마르셀 프루스트(<스완의 사랑>(1984))와 귀스타브 플로베르(TV시리즈 <부바르와 페퀴셰>(1990))의 소설, 조르주 당통(<당통>(1983))과 프란시스코 고야(<고야의 유령>(2006)), 빈센트 반 고흐(<고흐, 영원의 문에서>(2018))의 삶을 극화하는 시도들에 도전했다.
카리에르는 말하자면, 텍스트에 약동하는 혁명의 힘과 시대를 내파하는 역사적 징후,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해가는 인물들의 삶을 영화언어로 번역하는 과제를 짊어진 지난 세기의 마지막 거인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원전이 지닌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았고(카리에르가 작업한 부뉴엘의 걸작 절반은 원작 소설에서 가져온 이야기다) 해체와 재구축을 통해 영화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작가들의 흐름에 이바지했다. 지난 2019년, 카리에르가 각본을 쓴 37편의 영화들로 회고전을 개최한 뉴욕 MoMA가 그를 소개하는 글의 서두에서 카리에르를 무엇보다 플로베르와 셰익스피어의 언어, 당통과 반 고흐의 삶을 재구성한 작가로 언급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누벨바그, 뉴 저먼 시네마와 같은 영화 역사의 커다란 전환과 변혁에의 시도가 이전과는 다른 영화적 지대로 이행하려는 모험적인 움직임을 뜻한다면, 카리에르는 그런 변화의 시기에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온 새로운 시도들의 방향성을 구체화하는 안내자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거창한 담론을 중심으로 카리에르의 폭넓은 작업 목록을 이해하려는 것은 오염된 작가주의의 오류를 재생산할 혐의를 갖는다. 수많은 거장들의 파트너, 영화사의 주요한 기점을 밝힌 매개자, 거대한 텍스트에 맞선 단독자. 이런 설명은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의미를 고착하기 쉬운 일부분을 떼어내 작가의 핵심이라고 강변하는 전형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비친 결과물이 아닌 그것을 둘러싼 ‘위대한’ 이들의 신화에 존경을 바치는 그릇된 추앙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가령, 카리에르를 현실과 환상, 혹은 현실과 픽션을 오가는 미스터리를 형상화한 부뉴엘과 고다르의 각본가라고 지정한다면,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그가 무엇보다 활발하게 생산해낸 70년대 프랑스 TV드라마는 어떤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의 기나긴 필모그래피 앞에서 평자들은 일부를 외면하거나 전체를 뭉뚱그리기 쉽다.
놀랄 만큼 방대한 작업량과 영화사의 거대한 이름들 사이에서 카리에르는 자신을 자의식이 없는 작가로 지칭한다. 언뜻 의문스럽게 들리지만, 모순적이진 않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철저히 물리적인 제약과 조건 속에서 쓰여진 뒤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면 대부분 폐기되는 시나리오의 운명에 대해서다. 그러므로 카리에르의 작업은 결과물로서 완성된 시나리오만큼이나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남편이 죽은 지 10년 만에 자신이 남편의 환생이라 주장하는 어린아이와 젊은 여인의 조우를 그린, 지극히 부뉴엘스러운 아이디어의 창의적 변주로 가득한 <탄생>(2004)의 시나리오를 함께 쓴 조너선 글레이저의 회고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두고 1년여 동안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작가와 연출자의 관계와 루틴을 설정하는 대신, 카리에르가 주로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거야?” “정확히 무엇을 원하고 있어?”
카리에르는 마치 산파처럼 관념적인 아이디어와 동기가 영화의 꼴을 갖춘 내러티브의 형태로 정립되기까지,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감독이 그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를 만드는 기나긴 시간 동안, 연출자는 때때로 놀이에 사로잡힌 유아처럼 목적과 동기를 잊어버리고 실천적 행위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카리에르가 매력적인 시나리오작가일 뿐만 아니라 안내자, 산파, 상담가에 비유되는 견고한 협업자로 자리매김한 데는 이처럼 영화 제작의 성질을 이해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현실을 정지시키는 힘’
다만 이 글의 진정한 논의는 카리에르의 필모그래피를 범주에 따라 분류하기 위한 것도, 그를 향한 추모의 언사를 늘어 놓기 위함도 아니다. 카리에르가 남긴 텍스트 전반에서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조금 더 사소한, 하지만 어쩌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카리에르가 언급하거나 그가 참여한 몇편의 작업에 그려진 영화적 제스처의 기능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에 대한 환상’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카리에르는 현실을 재료로 삼는 영화가 단순히 촬영된 현실을 넘어서는 매혹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교묘한 속임수들을 활용한다고 지적한다. 영화는 화면 속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현실의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결코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을 법한 움직임과 제스처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 자체는 특별한 측면이 없지만, 카리에르가 주장하는 바에서 우리는 영화의 ‘리얼리티’, 혹은 영화적 사실감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리얼리티’와는 별개의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적 리얼리티는 현실의 ‘리얼’함, 혹은 통제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말과 동작과는 무관하다. 영화에 부여된 사각의 프레임은 현실의 물리적 규칙을 왜곡해서 비튼다. 프레임 내부에서 크기는 부조화를 일으키고, 제한된 구도는 대상의 형체를 날카롭게 잘라낸다. 이는 자기반영적인 모더니즘의 기획이나 환상과 판타지를 표방하는 장르영화들에만 해당하는 예외적인 원리가 아니다. 어느 영화에서든 이 왜곡은 유효하다. 클로즈업과 줌인, 디졸브와 교차편집, 하늘에 떠오른 부감숏과 뒤틀린 오블리크. 카메라가 본격화되고 초기 영화사의 시간이 열렸을 때 초현실주의가 두드러지게 활성화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카메라 렌즈가 보여주는 시각은 마약과 술에 취해, 혹은 잠에서 막 깨어난 채로 세계를 보는 초현실주의자의 비전과 닮았다.
카리에르가 예시로 드는 건 1928년작인 무성영화 <우먼 오브 어페어>의 한 대목이다. 그는 이 신을 두고 엄격한 검열이 존재하던 시대에 어떻게 “철저히 비현실적인 장면이 현실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어느 사무실, 방문객인 그레타 가르보와 사업가 존 길버트가 마주 보고 있다. 여자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보이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자막으로 나온다. “당신 반지가 헐겁군요.” “내가 그 반지 같은 사람이라고 얘기했었죠. 추락하기 쉬운 사람.” 여자는 소파에 앉고, 남자가 다가가 그녀 옆에 앉는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는다. 여자가 남자를 끌어당기면 카메라는 그들에게서 벗어나 여자의 손을 포착한다. 소파 바닥으로 떨어진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진다. 침묵. 카리에르는 평범한 일상의 원리들이 제거된(정확한 순간에 손가락에서 빠지는 반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사무실, 결정적인 순간에 중단되는 화면) 이 장면이 “현실의 한쪽을 정지시킨”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처럼 현실을 정지시키는 영화의 리얼리티는 사물(반지)에 새겨진 암시들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활용되는 손의 제스처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화의 끝, 반복되는 종소리
<세브린느, 38년 후>
현실을 정지시키는 영화적 제스처의 힘은 카리에르가 시나리오를 쓴 <세브린느>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밀을 간직한 채 집에 돌아온 세브린느는 온몸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은 남편 피엘을 바라본다. 짧은 침묵과 어색한 연결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첫 장면에서 들린 종소리를 다시 듣게 되고 돌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는 피엘의 모습을 마주한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마비를 회복한 피엘의 모습이 환상인가, 아니면 영화 전체가 환상이고 세브린느가 거실에서 눈을 뜨는 순간에 현실로 복귀하는 것일까.
어느 쪽도 ‘현실적’인 결론은 없다. 현실과 환상이 모호하게 침범하는 이 결말에서, 영화는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남편의 신체 변화가 표상하는 환상의 원리와 놀라움을 드러내며 그러한 환상에 대응하는 세브린느의 현실적 표정을 아슬아슬하게 공존시킨다. 해결되지 않는 혼란에 도달한 영화의 끝에서 강렬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는 영화를 첫 장면으로 되돌린다. 카리에르는 이 결말의 시퀀스에서 시나리오가 염두에 두고, 부뉴엘이 배우들에게 주의 깊게 지시한 것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문제 따위가 아니라 기본적인 신체의 동작이라고 말한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피엘의 몸짓, 두려움을 간직한 세브린느의 움직임, 그리고 영화를 다른 환상으로 옮겨버리는 종소리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피엘을 끌어안는 세브린느의 단호한 선택과 같은 제스처들 말이다.
<세브린느>의 제스처가 현실과 환상으로 분기하는 세계를 가까스로 통합해낸다면, <세브린느>의 후일담으로 만들어진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세브린느, 38년 후>는 두개의 세계를 관통하는 몸짓의 힘이 다시 재현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세브린느의 여정처럼 현실과 환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세브린느, 38년 후>의 마지막에서도 영화는 둘로 갈라지는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과부가 된 세브린느는 38년 만에 재회한 잇송(미셸 피콜리)에게 창녀로 일한 자신의 비밀을 남편에게 알렸느냐고 묻는다. 비밀을 밝혔는지, 함구했는지 잇송은 말하지 않는다. 두개의 가능한 현실이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세브린느는 눈앞의 현실이 가지는 모호한 가능성을 끌어안는 대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그 순간에, 창문 바깥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느리고 둔감한 잇송의 몸을 자극하는 종소리는 올리베이라적인 말년의 희극성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잇송과 세브린느는 너무 나이가 들었고, 늙어버린 몸을 누일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한 채 식당을 벗어난다. 이 영화에서도 종소리는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잇송에게는 돌아갈 만한 거처가 없다. 무수한 대화를 지워보면 이 짧은 실내극에서 우리가 보는 것들은 창문과 커튼, 거울과 액자, 그리고 촛불과 그림자와 같은 임시적인 영화의 장치들이다. 그리고 그 장치들이 배치된 자리를 모든 인물이 떠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끝에 다다랐을 때 모든 것이 어긋나고 사라진다. 이는 또한 영화의 운명을 모방한 희극의 형태다.
마지막으로 <세브린느>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만들어진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2010)에서 카리에르는 이름 모를 노인으로 출연해 연인과 언쟁을 벌이는 남자(윌리엄 시멜)에게 간단한 조언을 건넨다. 노인은 끊임없이 다투기를 반복하는 중년 남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함께 걸으며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노인은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덧붙인다. “두 사람의 문제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 해결될 수 있다네.” 주지하다시피, 키아로스타미의 역할극에서 ‘두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남녀간의 의견 충돌을 가리키지 않는다. 원본과 복제품의 대립, 현실과 허구의 중첩, 기억과 오인의 충돌을 포함하고 있다. 주술처럼 들려온 카리에르의 조언대로라면, 세브린느의 단호한 포옹이 그러했듯 어깨에 손을 얹는 사소한 제스처로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사랑을 카피하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두 남녀는 다시 과격한 말싸움을 벌이고, 여자(줄리엣 비노쉬)는 그만 밖으로 나가버린다. 혼자 남은 남자의 뒤편에 열린 창문으로 또 다른 종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면 남자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고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가 <세브린느>와 <세브린느, 38년 후>의 종소리를 의식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마지막 종소리는 두 사람이 방문한 장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역할극이 만들어내는 이중적인 현실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신호이면서, 또한 부뉴엘과 올리베이라, 그리고 세 영화의 프레임 안팎으로 연루된 카리에르의 자국을 환기하는 역할로, 달리 말하면 영화사의 태엽을 되감는 소리로 울려 퍼진다. 종소리가 들리는 동안, 서사 내부의 현실적 시간과 서사 바깥 영화의 시간은 취약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다른 의미에서 각자의 끝에 다다른다.
첫 문장에서 제기한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시나리오작가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을까. 긴 우회 끝에 답변을 찾는다면, 현실과 픽션의 영토를 꿰뚫는 이 작은 제스처와 반복된 종소리에서 나는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흔적을, 그리고 그와 교류한 감독과 배우의 터치를 짐작한다. 글 김병규(영화평론가) 2021-03-09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