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김유정 문학촌 .............솔새김남식
두여자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채 쓸쓸히 생애를 마친사람
소설가 김유정의 대표적 소설은 봄봄과 동백꽃을 들수가 있다
봄봄은 1969년도에 남정임 신성일 허장강 주연으로 김수용감독이
태창흥업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남정임의 데뷔 작품으로 이름은 소설속 주인공 이름이다
청량리에서 10시 무궁화열차를 타면 12시에 김유정 역에 도착한다
요금은 4500원이고 역은 시골의 작은 면소재지 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는 신남역이었는데 러시아에는 톨스토이역이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사람 이름을 역이름으로 쓴 곳은 바로 여기 단 한곳 뿐이다
역 개찰구를 나서면 바로 신동면 소재지인 실레마을로 김유정 문학의 현장으로
작은동산 아래에 있는 유택은 비교적 깔끔하게 잘 정돈되여 있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23에 설레마을로 돌아온 그는 야학과 농촌계몽 운동을 벌이면서
실제로 보고 느낀것을 작품의 소재로 하였기에 사실과 일치했다고 전한다
이곳은 그가 태어난 고향이자 생을 마감한 곳으로
1908년 1월11일에 설레마을에서 태어나 1937년 3월 29일에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데 그가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다른 견해를 보는 사람도 더러있기에 슬픔을 더 해주고 있다
즉 사랑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이 더 큰 원인이 아니였겠는가라는 이야기다
김유정을 떠올리면 그를 좌절케 한 여인은 박봉자뿐만 아니라
박봉자에 앞서 당대의 명창 박록주에게도 사랑을 구애 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두여인으로 하여금 받게 된 좌절감이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내라면 그 아픔을 충분히 짐작 할 수가 있다
누구나 김유정 생가를 가보게 되면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는걸 느끼게 한다
그래서 아마 그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역이름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었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록주이다.
어느날인가 박록주가 열연하는 명창을 구경하고는 죽자사자 쫓아 다녔다
네살 연상에 유부녀로 정말 피할 수 없는 업인지 매일 편지를 보내도 안되고
죽는다해도 안되고 그러던 어느날 하루가 멀다고 오는 편지를 보면서
록주에 친구인 원채옥은 재밌어하며 행랑 어멈을 시켜 유정을 오게한다
그런데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해서 되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기생의 몸 학생 신분으로 가당키나 합니까..?"
록주가 교복을 입고 온 유정을 조용히 타일렀다
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어느날
록주의 집을 찾아가 눈물로 사랑을 구애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록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래었고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김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려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드나들었다 한다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있게 되었는데 어느 날인가 편지끝에
녹주 내 너를 사랑한다란 혈서로 보냈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하였으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 마을로 내려와 잠시 내려와 마음에 안정을 찾는다
그런데 유정의 사랑에 구애는 여기서 끝난게 아니였다
유정은 박봉자라는 여자에게 한번 더 채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유정이 박봉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동기는 '신여성'잡지에 나란히 글이
실리게 된 인연으로 심신이 괴로운 그가 아픈 마음이나 달래볼까하고
혹시나 하는 이념으로 그리 생각한 ?P에 30여통에 편지를 박봉자에게
보내지만 단 한통의 답장도 받지 못하는 애정에 불운을 맞는다
더구나 그녀는 유정의 친구이며 동창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김유정을 실망케하였고 좌절로 그 충격이 대단 했을것이다
그로인해 상사병과 함께 지병인 폐결핵이 더 악화되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정 할수 밖에 없는 유교적인 사상이지만
박봉자라는 여자가 참으로 매정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참으로 남자를 모질게 했던 여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김유정이 아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니 그 충격이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박봉자는 왜 그렇게 매정하게 그랬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으며
김유정은 두여자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채 쓸쓸히 생애를 마치게 되는데
지병인 결핵과 늑막염 치질로 1908년 1월 설레마을에서 태어나 1937년 3월 서른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하여
서대문밖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다고 한다
김유정 최후의 글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따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필승은 김유정의 평생지기였던 안회남의 본명이다
김유정은 이 편지를 쓰고 11일후에 죽는다.
죽은지 10여일이 지나서야 현경윤에 의해서 문단에 소식이 전해졌다
이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눈물이 피잉돈다
그 만큼 김유정은 쓸쓸하고 힘겨운 짧은생애 였다
사진 / 필자 솔새
문학관이 아닌 문학촌으로 명명하게된 동기는 그에 유품이 남아
있지않아서라고 하는데 문방친구인 안희남이 김유정의 유품을 보관하던중
625때 그것을 갖고서 越北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승용차로 갈 경우에는 춘천 가기전
4차선 외곽우회도로 양구 소양땜 이정표로 진입을 하자마자 곧바로
김유정문학촌 이정표를 만날 수가 있으며 4차선 도로에서 300여 미터이다
기념관에는 쓸쓸히 생애를마친 그의 일생을그린 비디오영상물과 홍보화일링
그리고 그의 소설 작품을 판매하고 있었으며 그시절에 농촌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경춘선 복선이 완공 되는날 그의 동상도 김유정역으로 옮기고 김유정의 순수한
농촌계몽사업과 관광문학사업으로 대대적인 홍보와 할 예정이라고 전한다
춘천시내 어디서든지 김유정문학촌의 이정표를 쉽게 만날 수가 있으며
매년 5월 초에는 각계에서 김유정 문학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고 평상시에는
주로 초중고 단체에서 많이 견학을 온다고 하니 혹 지나는 길에 들려서
쓸쓸히 생애를 마친 그의 삶을 잠시 돌아 보는것도 괜찮을듯하다
그러나 남자들에게 유독 표독한 사랑을 했던 여자는
이곳에 가지 마세요 ㅎㅎㅎㅎ
영화를 좋아하던 그 시절
스무살 남짓해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아주 또렷합니다
그때는 김유정에 대하여 깊이 알지를 못했고 천박하게 농사를 짓던 그시절
4H운동이니 새마을운동 하면서 재밋게 코믹하게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유정.두여자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채 쓸쓸히 생애를 마친사람
김유정문학촌을 다녀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