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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부터 김유진, 류외향, 김근, 이재웅, 이영주, 김중일, 김서령, 김경주, 안현미,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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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산 작가들이 그들의 첫 책을 속속 출간하고 있다. '포스트 386세대'라는 성마른 명명까지 횡행하고 있는 터다. 네거티브한 명명법이라서가 아니라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문제다. 이 세대를 전통적인 방식의 세대론적 좌표, 예컨대 역사적 트라우마와 문화 체험의 공유라는 기준으로 묶을 수 있을 것인가. 전후세대, 4·19세대, 긴급조치 세대, 광주세대, 386세대라는 명칭들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의 경우 그들에게서 출생년도를 제외한 다른 세대론적 좌표를 도출하는 일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문학적 징후들이야 없지 않지만 그 차이를 만들어낸 근원적 요인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다. 어쩌면 더 이상 세대론적 좌표로 범주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세대의 유일한 동질성인 것은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는 이들 세대가 보여주고 있는 미학적 경향을 그 동일성을 중심으로 일별하되 이 세대를 과도하게 단일화하려는 우를 범하진 않기로 하자. 이 글은 차후의 본격적 세대론을 위한 브리핑이다.
편혜영(72년생), 김숨(74년생), 백가흠(74년생), 손홍규(75년생) 등이 올해 그들의 첫 책을 출간했다. 편혜영 소설의 테마는 문명의 병리학이고 그 테마를 실어나르는 토대는 도시공학이다. 문명의 병리성을 알레고리적 강렬함에 기대어 묘파하는 그녀가 가장 공들이는 것은 종말론적인 미장센의 구축이다. 이 빛과 어둠의 미장센은 집요하게 반복되면서 그녀의 단편들을 일관된 기획의 산물로 구축한다.
예컨대 '만국박람회'로 상징되는 빛과 문명의 장소가 있다. 그 빛의 세계 이면에는 비문명·반문명의 장소인 '저수지', '아오이가든', '맨홀', '서쪽 숲' 등이 있다. 그리고 어둠의 장소에서 빛의 장소로 '시체들'이 귀환하거나 혹은 빛의 장소에서 어둠의 장소로 누군가가 '문득' 실종된다(인용된 어휘들은 모두 소설의 제목들이다). 이 귀환의 실종이 빛과 어둠의 경계를 교란한다. 테마의 집요함과 스타일의 균질함은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 전반을 통어하고 있는 그녀의 특장이다.
백가흠의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의 라이트 모티프는 총체적 파국의 예감 속에서 자행되는 남자들의 폭력과 그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들의 비명이다. 끔찍한 것은 가학적인 남자들이 그 가학으로 인해 더욱 불행해진다는 것이고, 더욱 끔찍한 것은 학대의 대상이 되는 여자들이 더러 그 학대를 묵묵히 감내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사도마조히즘의 풍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조리한 세계의 끔찍함을 무대화한다. 취지는 알겠으니 그 정도로 끝내라, 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 작가는 더 격렬한 한 문장을 더 쓰고 더 끔찍한 한 단락을 더 쓴다. 그 한 문장과 한 단락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엽색獵色은 윤리적이다.
그런면에서 백가흠의 집요함은 영화감독 김기덕의 집요함을 닮았다. 역사와 실존을 각각 X축과 Y축으로 삼고 서사를 구성하는 리얼리스트 손홍규, 바로크풍의 시공간 속에서 여성성의 문제를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게 때로는 몽환적으로 탐구하는 김숨을 별도로 한다면, 편혜영과 백가흠은 70년대생 신예 작가들의 미학적 징후를 대표한다고 할 만하다.
젊은 시인들의 목록은 더욱 다채롭다. 문태준, 진은영, 김행숙, 진수미, 황병승 등 70년생 동갑내기들은 현재 한국 시단에서 가장 유니크한 시를 써내는 그룹이다. 문태준과 황병승은 이 그룹의 양극이다. 문태준(『맨발』,2004)은 서정의 내부에서 서정을 갱신하고 있으며,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2005)은 서정의 외부에서 '다른 서정'(이장욱)을 창안하고 있다. 전자가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을 도모하는 서정의 윤리에 충실하다면, 후자는 언어의 모험과 정체성의 실험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믿는 전위의 윤리에 충실하다.
한편 진은영, 김행숙, 진수미의 언어는 그들이 슬플 때조차도 눈부시다. '견습생 마법사'의 황당하고 아름다운 언어(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사춘기'의 아이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분열적이면서도 시적인 언어(김행숙, 『사춘기』,2003), 예컨대 배수구에 살고 있는 인어人魚를 '아비뇽의 처녀들' 풍의 이미지로 사로잡는 언어(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2005) 등은 그녀들의 것이고, 상상력의 비합리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도 고리타분하게 합리적 인과관계를 따지는 굳은 정신은 그녀들의 것이 아니다.
이 70년대생 선배들 밑/옆에서 그들과 닮았으면서 닮지 않은 일군의 그룹들이 시를 쓰고 있다. 서정의 사도들, 환상의 연금술사들, 언어의 일렉 트로니카들의 각개약진이 장관이다. 먼저 서정의 사도들, "사랑하는 일이 드물다는 혹성에서 / 철공소의 쇠망치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눈물이 흘렀다"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시 「심장의 타종」을 쓴 이는 박판식(73년생)이다. 그가 연전에 출간한 시집 「밤의 피치카토」(2004)는 1인칭의 칭얼거림 없이 울고, 신파에 의지하지 않고서 울린다. 신용목(74년생)은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와 같은 문장을 쓰는 가인歌人이다. 그의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2004)에 자욱한 순정한 감성은 좋은 의미에서 클래시컬한 것이어서 세간의 허투른 말재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환상의 연금술사들. 최근 출간된 김근(73년생)의 첫 시집 『뱀소년의 외출』(2005)에는 느슨한 대목이 별로 없어서 슬렁슬렁 읽을 수가 없다. 이는 김언(73년생)의 두 번째 시집 『거인』(2005)도 마찬가지인데, 환상성을 현실 도피와 언어유희로 간주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환상이 어떻게 치밀한 지적 조작의 산물일 수 있는지를 두 시집을 통해 확인할 일이다. 환상성을 탑재한 여성시인들로는 역시 올해 첫 시집을 출간한 동갑내기인 유형진(74년생)과 이영주(74년생)이 돋보인다. 유형진의 시집(『피터래빗 저격사건』,2005)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의 상쾌한화법과 「피터래빗 저격사건-의뢰인」의 매혹적인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 이영주의 시집 (『108번째 사내』,2005)에는 「바람 파는 가게」나 「내가 사랑한 배관공」같은 가편佳篇들이 수록되어있다는 것을 여기에 적어둔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일렉트로니카들. 『질 나쁜 연애』(2004)의 시인 문혜진(76년생)은 로커이거나 록애호가다. 스매싱 펌킨스, 제니스 조플린, U2이거나, 그들을 좋아하는 좌충우돌 판타스틱 소녀쯤 된다. 그녀의 언어들은 락만큼 자유롭지만 그녀는 늘 '더 많은 자유를!'이라고 외친다. 그녀라면 호면湖面 같은 내면의 시인들을 미사리풍 후위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리는 그녀의 위선 없는 서정은 감성의 전위다. 문혜진이 로커라면 김민정(76년생)은 랩퍼다. 전자가 자유의 언어를 연주하여 억압을 희롱한다면 후자는 고통의 언어를 토해내면서 어떤 적대anatagonism를 실연한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2005)에서 들끓고 있는 김민정의 에너지는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어떤 적대를 집요하게 극화하는 데서 나온다. 그것은 나와 또 다른 나의 적대이기도 하고 나와 타자 사이의 적대이기도 하다. 적대를 무대화하기 위해서 그녀는 흔히 갈등의 서사를 가동하고 그 적대를 물고 늘어지는 와중에 비속어를 동원하며 그 적대를 돌파하면서 검은 유머를 구사한다. 제한 시간이 없는 프리스타일 랩배틀이었다면 그녀의 긴 시들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거칠게 명부名簿를 훑었다.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면 70년대생 소설가와 시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어떤 '과잉의 에너지'들이다.
앞서 거론한 소설가 들의 경우 내면 성찰, 지적 통제, 예술적 균형 등으로 요약되는 아폴론적 덕목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전적인 내면 탐구에 대체로 무심하고, 지적이기보다는 감각적·직관적이며, 왜상歪相과 과장이 진실에 접근하는 적절한 방법론이라 믿는다. 엽색과 엽기, 몽환과 우의愚意가 그들의 세계다. 물론 이들의 과잉의 에너지는 현실reality 너머의 실재the real에 가닿으려는 미학적 급진주의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폭풍과 저수지가 인간들을 집어삼키는 이 슬픈 엽색/엽기의 서사에서 적잖이 발견되는, 환경과 투쟁하기보다는 그에 일방적으로 삼켜지고 마는 주체성의 무기력은 더러 자연주의의 무기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세계상이 격렬할지언정 얼마간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다. 그들의 작품을 두고 운위되는 근대적 이성 비판, 문명 비판 등등의 언사에서 저 '근대적 이성'과 '문명'이란 실상 근대와 문명의 캐리커처는 아닐 것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보다 복합적인 '실재의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2000년대의 문학이 1990년대의 안티테제이기를 넘어서 1980년대의 진테제여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제 시는 1인칭의 세계가 아니라 무인칭 혹은 다인칭의 세계다. 자아가 없거나 너무 많다. "엉망진창 물고기인간"(문혜진), "캔디바를 물고 있는 폭풍 속의 하록 선장"(유형진), "잠들어 거울 속에서 눈 뜬 검은 나나"(김민정), "해프닝-아홉소(ihopeso)씨氏의 금빛 머플러"(황병승) 등에서 물고기인간과 하록선장과 나나와 아홉소씨란 과연 누구인가? 서정적 자아의 고백과 재현의 언어를 대체한 것은 복수적인 주체들의 다성적이고 탈재현적인(혹은 환상적인) 언술들이다. 시를 통해 시인을 이해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나'를 서정적인 것의 처소가 아니라 시적인 것의 감옥이라고 믿는 이들의 탈옥 때문이다. 이 탈옥은 일단은 해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이들은 이들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진보적인 이들은 이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의심한다.
어느 시대나 전위들의 운명의 비슷하다. 우리는 그 운명을 지지한다. 그러나 서정적 '나'의 천편일률을 거부하는 전략들이 역설적이게도 대동소이한 세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현황은 이들의 딜레마가 될 것이다. 보다 정련된 '정체성의 정치학'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소설과 시들을 1990년대 문학과 대비하여 각각 '탈내면의 상상력'과 '탈서정의 시학'이라 명명해보는 일은 꽤나 유혹적이지만 그 규정이 해명해 주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잠정적 규정들이 새로운 세대의 미학적 징후를 아직 문학사회학적으로 엄밀하게 범주화하기 어렵다는 곤경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복합적인 세계인식에 근거한 실재의 정치학을 탐구하여 산문정신의 진경을 보여주고, 새로운 시학의 징후를 정체성의 정치학과 결합시켜 보다 체계화된 형태로 구축·발산하길 기대한다. 그때 새로운 세대의 문학은 '탈-'이라는 부정적인negative 에피세트와 결별하고 긍정적인 positive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전위는 전진한다.
신형철 ㅣ 197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문과 졸업했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계간 문학동네 2005년 봄호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신대 등에 출강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