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 KBS 1박 2일 프로에 성주 한개 마을을 소개하여 실시간 급상승 1위를 차지한것을 보았다 사실 응와 이원조와 한주 이진상으로 이어지는 일명 성산이씨 한주파 고장이다
지난 강동파에서는 사촌 마을도 언급하였다 강동파이야기를 하면서 사실 한산이씨 파보에는 해산공파에서 나온 세보파이다
또한 약와 이현정 일명 강동파 시조후손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만큼 현달한분이 많아서 모두다 서술하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제목을 바꾸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빨리 마지막회라는 제목을 부치고 싶지만 끝나지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후손이 현달하여 한산이문이 대유방가의 가풍과 기질을 유지할 수 있는것도 가정 휘 곡와 목은 휘 색으로 이어진 아지자손 백대지친의 유훈때문이 아닐까도 생각이 든다
시대를 지나 연이은 가문의 현달은 상문인 한산이문과 통혼을 하고싶은 풍산 류씨 서애 휘 성룡( 하회마을 )이 그시대 최고의 영재였던 해산공 휘 문영을 사위로 삼고 싶어 선조임금을 통해 중매로 통혼하여 해산공 휘 문영의 처부가 된 이야기도 모두다아는 이야기이며
그 시대를 지나 수은공파로 이어지고 대산 휘 상정 선조님이 출생하여 풍산류씨 족보 신도비 등 작업을 하셨으며 학봉 김성일의 파 세보를 이어 퇴계의 양대 제자 휘 성룡 휘 학봉의 완성인 대산학파의 시조가 되어 많은 후학을 양성한 1세기와 소산 휘 광정 약와 휘 현정의 2세대를 지나 거대 학문의 산맥이 이루어 진다
위에 언급한 성산이씨 한주파도 2탄에 걸쳐 소개한 강동파도 소산파도 이외 지역의 번성한 영남 일대는 대산학파의 소분파이며 유가의 제자들로써 영향이 미치지 않은 지역이 없다
현대에는 신분의 의미가 무의미할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의미를 고집하시는 분들 중에는 꼭 이야기하시는 말씀이 바로 안동은 양반이여 하면서 더이상 대적을 하시지 않으신다
이외에도 안동은 항일의병 즉 독립운동의 성지로 안동을 이야기하고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를 안동이라고 이야기하여도 아무도 반박을 못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정신 문화의 뿌리에 절대로 한산이문 수은공파를 제외하고는 위 모든 것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의 타성씨가 한산이씨를 빼고 영남의 명가를 이야기하더라도 타성씨 선대로 가면 대산학파 휘 상정 선조님의 제자로 연결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모든 분들이 궁금해 하실것이다 저의 가계보에서도 대은 이수영 선조님이 계셨다 휘 수영 대은의 부친 설죽 이병은 및 백부 신암 이병하도 천사 김종덕 및 정재 류치명의 제자였고 긍암 이돈우와는 족친이며 아주 가깝게 지내셨다
물론 선대로 가면 조부 휘 경까지는 대산학파 시조 휘 상정의 제자이며 제자였다는 제문도 있다
응와 이원조 최효술 < 박규수 제자 > 긍암 이돈우 족친이외 다수 위인들이 어쩌면 벼슬이나 관직도 없는 저자의 가계보에 묘갈명이외에도 엄청난 찬을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그 시대 대략 19세기 <1800년~1900년>까지 대산의 직계보를 이은 긍암이돈우와 강동파 시조 약와 이현정의 계보중 저자의 가계보 대은 이수영이 그시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대유학자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외 1860년을 지나면서 과거제도의 병폐가 심해져 과거제도의 의미가 퇴색되었던 1876년 과거제도로 휘 돈욱선조님이 나오시고 몇년 지나지 않아서 과거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처럼 유학 일명 유교의 정신 문화의 뿌리속에 그 제자이면서 친척인 분들이 선봉이 되어 안동의 독립운동이 시작되며 그선봉스승에 소호문중이 있었으며 안동의 독립운동 인물들의 제자 및 친척 외척이신분들이시며 독립운동 항일운동의 1세대 였던 것이다
안동의 독립 1세는 권세연이며 영덕의 1.5세대는 신돌석 그외 지역 등은 중략하겠습니다
그 분들에게 영향을 미치신분 들이 바로 한산이씨였던것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독립운동성지 출처를 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세계의 역사는 하나의 커다란 대립 구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라는 한쪽과 이에 맞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이라는 다른 한쪽이 부딪치는 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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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은 조선 말기 의병 항쟁이 시작된 1894년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의병 항쟁과 계몽운동 성격을 띤 구국운동으로 시작하여, 1910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해방운동으로 성격을 바꾸면서 쉼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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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한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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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대한민국을 세우고 나라를 운영할 임시정부를 세워 26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독립운동을 펼친 민족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유럽의 경우 독립운동은 대개 한두 해 정도 이어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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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지역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배경 안동은 조선 말기 의병 항쟁을 비롯하여 1894년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51년 동안 쉼 없이 독립운동을 펼쳐 온 곳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자정순국자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안동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인 데는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첫째, 조선 후기 남인의 정치 행로가 막힌 뒤 학문 생활에 몰입하던 안동의 유림들이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유림들은 주리론이 강한 성향을 따라 원리원칙에 집착하면서 정치적으로 문란한 정계에서 등을 돌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 정계로 다시 진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기회는 안동의 분위기 그대로 대의명분에 걸맞아야 했는데,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을 펴는 일은 여기에 매우 합당한 일이었다.
둘째, 학문적으로 안동은 퇴계학맥이란 큰 틀을 갖고 있었다. 안동은 퇴계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퇴계로부터 학맥이 형성되면서 여러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이 세워지고 문집 발간을 통해 학문적으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었다.
퇴계학맥의 규모는 매우 커서 안동 지역과 인근을 합친 안동문화권에서 문집을 남긴 인물은 400명을 헤아렸고, 이것은 바로 힘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도 유림의 여론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았다.
전기 의병에서 김흥락(金興洛)과 류지호(柳止鎬)가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지명했던 경우가 한 예인데, 이 점은 계몽운동이나 농민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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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안동 사회가 통혼권을 통해 양반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동성·동족 간의 결집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병 항쟁에서 계몽운동을 거쳐 광복에 이르기까지, 또 좌파와 우파를 가릴 것 없이 안동 지역의 독립운동이 문중적인 결속을 강하게 가진 배경이 되었다. 안동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위상 첫째, 안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독립운동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고,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년에 안동에서 일어난 갑오의병(甲午義兵)이다. 이후 안동은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안동은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시·군 단위 독립유공자 수는 평균 30명 안팎인데 안동의 독립유공자 수는 2009년 현재 321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더구나 포상되지 않은 인물 가운데 빛나는 투쟁 경력을 보인 인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아, 2009년 현재 확인된 미포상자는 700명을 넘는다.
셋째, 안동은 가장 많은 순절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1905년(을사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자결하여 일제에 항거한 인물은 전국적으로 약 70명에 이르는데, 그중 안동 사람은 김순흠·이만도·류도발을 비롯한 1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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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지역 독립운동의 특성 안동의 독립운동사는 세계사 차원에서 볼 때 ‘유교 문화권의 식민지해방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주도 세력이 대부분 유학자들이거나 그 바탕 위에 성장한 인물들이었고, 행동과 사고 양식도 그러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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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안동에서는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도 유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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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사상적인 면에서도 안동 독립운동은 유학적인 특성을 유지했다. 위정척사사상 단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고, 그 틀을 깨는 혁신유림의 등장은 안동 독립운동사에서 ‘1차 혁명’이라 부를 만하다. 안동문화권의 사상적 혁명을 달성해 나간 인물이 모두 퇴계학맥을 잇는 중심축에 서 있었고, 제2의 혁명이라 평가할 만한 사회주의 수용과 민족 문제 해결 노력에서도 퇴계학맥을 계승하는 인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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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사람이 펼친 독립운동을 한 지역의 특성을 넘어서서 한국 독립운동사를 구성하는 한 영역의 특성으로, 더 나아가 세계 식민지해방운동사라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개념화하고 성격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즉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하고 특성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문헌 김희곤,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 2001) 『안동문화 바로알기』(한국국학진흥원, 2006)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 2007) 한국국학진흥원, 『안동문화의 수월성과 종합성』(안동시, 2007)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기록은 온라인등의 사료 정보를 볼때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많은 연구를 하여 밝힌것 같다는 유추를 해본다
위의 자료에서도 알 수도 있듯이 안동의 독립운동은 바로 대산학파의 후손들이 이룬 업적이며 지면이 너무 길어져서 중략을 많이 한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 선봉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신 분이 바로 안동의 관직이나 학문으로 그시대 최고이신 대산학파 유학의 마지막 거장이신 긍암 이돈우이며 한산이씨 문양공파 판중추공파 해산공파 수은공파의 세보를 이은분으로 긍암의 호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 정신의 독립운동의 뿌리 중심이였으며 바로 족친 대은 이수영과는 매우 학문적인 교류 및 문집간행 등 엄청난 일을 많이 하셨다
저자의 가계보에도 대은 이수영의 영향을 받은 영덕 존암종택 후손 이수악과 신돌석 독립운동을 하신 설죽 이병은의 자중 아들 수영 수문과 따님(여식 딸) 등 친척 및 외척등의 기록 고증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하였지만 글을 기록하다보니 신암 이병하와 설죽이병은 및 대은 이수영등과 관련된 돈암 이돈우 이야기등 고증된 내용은 게시를 하지도 못했다
서술하다보니 지면이 늘어나서 중략하며 아쉬움이 남지만 안동독립의 역사를 보는것과 안동시사에 나온 위인의 짧은 약력을 게시하고 다음편에 게시하려고 한다
이돈우(李敦禹):1807(순조 7, 정묘)~1884(고종 21, 갑신). 본관 韓山. 자는 始能. 호는 肯庵. 象靖의 현손. 秀應의 子. 류치명 문인. 1850년 문과 급제. 승문원정자․전적․교리를 거쳐 형조참의․이조참판 역임. 저서:肯庵集. ▣참고:「行狀」(權璉夏 撰) 집필:이원걸
이수필(李秀弼):1800(정조 24, 경신)~1837(헌종 3, 정유). 본관 韓山. 자는 匡國.
顯靖의 증손 . 헌종조 사마시 합격.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
이수영(李秀瑩):1807(순조 7, 정묘)~1892(고종 29, 임진). 본관 韓山. 자는 章國. 호는 大隱.
顯靖의 증손 雪竹 李秉殷의 子. 류치명 문인. 禮說에 뛰어남.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
대은 이수영 후손 현조부님을 기리며 이대원 삼가글을 게시하다
첫댓글 자랑스런 안동의 독립투사들 얘기 잘 읽었소. 2011년도에 안동을 찾았을때 한국의 정신문화의 본고장이란것을 새삼 느꼈다네. 미국에 돌아와 테네시대학 경영학과지에 영문으로 안동을 소개하는 글을 올려 한국정신문화의 우수성을 알린적이 있다오...
아직 독립 투사인물 제대로 게시도 못하고 존함만 관련된 서막전 정신뿌리가 한산이문이다라는 것만 잠시 다루었습니다 다음편에 조금씩 인물관련 친인척 외척 게시 예정입니다 1988년 요약본은 몇장안되니 스캔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휘 승학방조의 기록과 후손거주지를 아시면 ? 구미 산동 문중의 목은선생연보 판각에 동참하신분으로 저가 증보출간한 국역 목은선생연보 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계는 알고 있습니다 만 후손 연락이 어렵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잘 배우고 있습니다.
운계 희준 입니다.
운계 교수님 좋은 날되십시요 혹시 문혜공 부사과공 호나 휘 승학 친인척 조금 더정보주시며 찾아보고 할 수 있다면 게시해보겠습니다
@대원 휘 승학방조는 소산공의 종증손으로 연보발문 에 우리 문중의 휘상우방조 직자 향렬로 저의 오대조와 재종간이십니다ㅡ1796 병진ㅡ과 같이 승오방조가 쓴 기록이 있으니ㅡ시조할아버지 비문 찬하신 양경공 후손ㅡ참고하시고 함자 할아버지 는 문혜공의 두째 손자로 산소는 북한에 있어 아드님 휘 윤혜 산소옆에 휘보기 와 3형제분 제단비로 영모리에 봉심하고 있읍니다. 사직공 휘서와는 생가 종방간이나 왕조실록상 휘보기할아버지 가 문혜공 과전 상속기록이 있어 최초 양자 선례와 같이 제종간이 시죠. 자료를 찾아보고 써야 되는데 문혜공집 집필한 사람이 급한 마음에 몇자 적었으니 양해바람 저는 휘함의 6대손 휘민ㅡ홍조동항 후람임
@운계 준 네 찾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주원씨가 한산이문의 방대한 과거기록을 정리중입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날 되십시요
@운계 준 구미 산동 문중 후손들은 지금 몇명이나 되는지 궁금하군요. 몇달전만하더라도 구미쪽에 한산이씨 집성촌이 있었는지도 잘 몰랐네요..
@이주원 (周遠) 문혜공 후손 ㅡ 구미산동면
인재공후손 ㅡ 구미고아읍 도개면
집성촌 이루고 살다가 인근 대구나 부산 서울로 이주해 살고 있습니다 서울 대종회에서 춘추 제향에서 각문중 문장어른 들을 뵙습니다 저도83년도에 서울와서 살고 있습니다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운계 준 휘 승학 24세 선조님은 한산이문에만 한자 이름 같으신분이 대략 50분 정도 입니다 조부나 부친 함자라도 이야기해주셔야 검색 테이타베이스 자료가 더 정확합니다 시대가 비슷하여 연대가 중요합니다
대원 일가님 휘함 부사과공 을 부사정공으로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신지요 저의 20대조 할아버지 로서 사직공 방조를 도와 할아버지 과전으로 큰댁으로서 위선 사업을 많이 하신 분이시죠
예 그때 빨리 타자친다고 오타쳐두었는데 수정한다고했는데 그만 ㅎㅎ 자료를 찾아보고는 있는데 휘 윤혜의 자 세분 중 어디 쪽으로 가야 휘 승학 선조님이 나오시죠 한자 비슷하신분이 몇분계시고 승오 선조님은 자료가 넘쳐나고 해서요 연도도 비슷하신분이 있어서 조금더 신중을 위해 파보 족보 정보를 보고 싶어서그렇습니다
부산화수회 문혜공파 후손되시는 어르신이 몇분 계십니다 자주 방문하여 서로 알고 지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대원 휘 승학방조님은 안동 수은공 후손이시며 소산공의 종증손이심 원화ㅡ경청 ㅡ정 ㅡ영지ㅡ승학의계도임
그리고 보기ㅡ 부사과공 ㅡ 윤혜ㅡ제ㅡ대숙 ㅡ영ㅡ만운 ㅡ민 ㅡ효정 ㅡ태신 ㅡ진발 ㅡ후창 ㅡ세춘 ㅡ익체 ㅡㅡ 주 ㅡ상우 방조와 승학방조께서 발문에 나오듯이 판각 증보에 주역으로 할동하심
@대원 목은선생연보 판각시종기가 위계도보의 휘진발 할아버지가 쓰셨습니다 대산소산 시대 교류하심 그리고 후대 다시 판각 증보하실때 위 안동의 휘승학방조 백곡종인 상우께서 하신 것으로 보아 서문과 발문은 시간차이가 있음
@운계 준 안동 수은공파에 휘 승학 3분 중 1분 이시군요 실제는 2분 저는 문혜공파 쪽 만 찾고있었습니다 작은 숙부가 휘 영필이며 영필의 자도 승학입니다 이중 영필의 자 승학이 영지의 후사를 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주원씨와 매우 가깝습니다
파보
생부
구파보는 집에 있어서 대조는 못해보았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다음에 대조해보고 다르면 게시해드리겠습니다 추가 자료 제문이외 하나정도 있는데 다음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주원 대원 두분 일가님 모두 석자 화자 향렬 에서 승학 방조님과 분파된 댁으로 혹시 그분 후손의 연 락처를 알면 부탁드립니다 주원 일가님 은 대산 후손으로 위선지심이 대단하신 댁으로 가까운일가님 지복어른께서는 저의 구미산동 영모당 제실낙성운에 크게 도움을 주신 분이십니다ㅡㅡ신축년 1961ㅡㅡ 저의 직계는 영ㅡ만운 ㅡ이하 이고 그위 제ㅡ대연 ㅡ영 서천 월기리 문혜공 후손으로 문혜공 시제를 모시고 있습니다 호군공 휘 준과 장사랑공 휘지 후손이 외지에서 간혹차여하며 대숙 ㅡ영 ㅡ만령과 저의 할아버지 만운도 4촌간으로ㅡ구미산동 ㅡ참여하려 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운계 준 제가 몇년전 성묘가는길에 잠시 들러 수은종택 휘 장원 의 자 동수 종손 전화번호입니다 위 전화번호 이외는 현재 없어서요 안동내러온지 오래되어서요
제 생부가계도를 살피면 원화-경정-제-영필 (형=영지)-승학-휘직-대규로 내려오니 휘 승학 할아버님은 저의 5대 생조부가 되십니다. 증조부 대자규자 할아버지가 출계하여 대산선생 계보를 잇게되지요. 죄송스럽지만 승학 할아버님의 후손들 연락처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가까운 6촌형제네가 (5촌당숙을 서울에서 한번 뵌 적 있음) 아직 안동에 살고 있는것은 알지만 그쪽도 연락처를 모릅니다만...
주원일가님 6촌 형제내가 안동 일직 어디에 사시는 지요 족보수단시 갑오생으로 등재되어 있습니까 우리 구미 산동하고는 휘승학 방조께서 많이 관계가 되는데 꼭 여낙이 되면 국역 목은연보 판각 탁본 첨부를 구경시켜 드릴까 합니다 그리고 보학에 대단하신 휘승학방조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운계 준 저희 당숙이 일직에서 과수원을 운영하셨으니 6촌형제도 가업을 이어 그대로 일직에서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지 않나 쉽네요. 등재되어 있는 것은 일전에 봤습니다…아마도 갑오생이 맞는것 같은데요...
@이주원 (周遠) 휘 대규님의 생가 후손 ㅡ영복, 웅복, 원택 당숙, 재종에 대해서 연락해주었으면 그리고 주원일가님도 앞으로 자주 보학이나 문헌에 대해 구미 산동문중과 교환했으면 합니다
@운계 준 예. 제가 나중 한국 방문하면 안동들려 6촌네 연락처를 알아볼테니 입수하게되면 알려드리지요.
@이주원 (周遠) 감사합니다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