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화기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더니 음악이 울려 퍼진다. 반사적으로 들어 화면을 밀었다. 검은 바탕에 몇 글자가 보인다. " 가을 단풍 보고 싶습니다." - 언제?- "결심을 주시는 날이면 다 좋습니다" - 그래요, 잠시 후 전화하죠 _ " 감사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호형호제하던 사람인데 소원하게 지냈다는 생각이 앞섰다. 생각을 정리해 보니, 평소 느끼지 못했던 행위를 본 후 일정 거리가 생긴 것이다. 우주만물은 무엇이든 변화기 마련인데.. 그리고 나 역시 자신만 모르는 많은 변화가 상대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해 보니 동안 내가 편협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들어 메일 웹을 찾아 글을 적었다. - 좋아요. 이날 망월사역에서 만나 오르지요- 즉시 답이 날아왔다. " 선배님 고맙습니다" - 잘 준비하시고, 옛길을 걸어봅시다. 40 여전 걸었던 마음과 행복으로~~^^ -
내가 거처하는 곳에서 망월사역으로 가려면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야 한다. 도착한 역, 반색을 하며 반긴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 후 걷기 시작하였다. 늘 그렇다. 후배들은 나를 만나면 산행코스 선택은 나에게 거의 맡긴다. 꼭 그날의 주제가 담긴 곳을 선택하여 오르며 들려주는 산 이야기가 좋다 한다. 오늘은 원도봉산 기슭에서 시작하여 능선을 타고 오르다. 포대능선을 마주 보며 오르려고 계획하였다. 삼각산이나 도봉산, 원도봉산에 가서 걷다 보면 위험구간에 철심을 박고 쇠줄로 연결해 놓은 곳을 볼 수 있다. 이런 설치된 곳은 아주 오래된 등산로다. 아주 오래된 이 길은 젊은 날 기슬링을 매고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넘어 선인봉 북측면으로 가던 길이다. 도봉산 암 군이 제대로 보여 늘 나의 마음은 바위 군을 보는 것만으로도 산악인으로서 명쾌한 즐거움을 을 얻을 수 있어 좋아하던 등반 길이었다.
아주 급경사, 여러번 끊어서 올랐다. 작은 암릉에 올라 선 후 마들평야가 있던 중랑천 주변을 조망해 보았다. 그리고 원도봉 중랑천 주변도 천천히 살피며 옛 삼양라면, 원풍모방 자리도 떠 올렸다. 도시의 팽창으로 옛 흔적은 전부 사라지고 대신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 찼다. 호원동 앞에는 육군 보충대도 있었는데 그 자리도 아파트가~~ 이복동생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방원, 함흥으로 떠난 이태조, 옥쇄를 받기위하여 방원은 함흥으로 지속적으로 차사를 보낸다. 그러나 가는 족족 이성계의 신하들은 방원의 차사를 죽인다. 그래서 심부름을 가서 소식이 없는 사람을 두고 함흥차사라하는 말이 생긴 것이다. 망월사역 다음역 이름은 회룡(回龍)역이라 부른다. 용이 돌아간 역이란 뜻이다. 방원은 제대로 군주가 되려면 옥쇄가 필요하였다. 무학대사의 간청에 상왕 이태조는 한양으로 되돌아 온다. 그러나 변심한 그는 회룡역에서 되돌아가 소요산 사찰로 가 머문다. 왕이 바로 용이다. 용이 발길을 돌린 곳이라 하여 그날부터 백성들은 회룡이라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나라를 세운 이성계 즉 상왕이 진짜 왕이라 생각하였고 방원은 상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산이름도 도봉산과 원도봉산이라 구분하여 부르기 시작한다. 방원이 있는 곳은 도봉산, 이성계가 있던 곳은 원도봉산이라 한다. 다른 일설에는 원(院)이 많이 있던 산기슭이라 원도봉(院 道峰山) 이라 했다는 설도 있지만 議政府라는 지명이 시사하는 것을 추론하면 전자의 이야기가 정확하다. 태조는 결국 방원의 책사 하륜의 의도에 의하여 방원을 죽이지 못한다. 옥쇄를 던져 줘버리고 한양도성으로 들어와 상왕신분으로 살다.결국 동구능에 묻힌다. 도봉이란 뜻은 당시 경기도에서 대표적인 봉이란 듯이 포함된 가장 높다는 의미가 깃든 산이다.
맨 왼쪽이 천축사 뒤에 있는 선인봉(仙仁峰)이다. 길쭉하게 붙어 있는 곳이 선인봉 남측으로 침니와 뜀바위가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그 옆은 허리길로 펜드럼 후 슬랩을 올라 대침니로 서서 올라서면 만나는 테라스다. 이곳 테라스는 표범길, 박쥐길을 오른 후 만나는 아누 넒은 공간이다. 테라스에서 곧장 직벽인 40m 크랙을 올라 동굴침니를 빠져 나가 만장봉(萬丈峰)에서 하산하는 방법과 누운침니를 이용하여 곧장 오른후 십자로 피톤에 자일을 걸고 펜드럼으로 넘어가 역시 동굴침니를 이용하여 오른 후 만장봉으로 넘어간 후 하산하기도 하였었다. 일직선으로 내려온 크랙이 있는 곳 까지가 선인봉이며 사각형처럼 생긴 곳은 만장봉이다. 그리고 우측에 있는 높은 곳, 사각 주기둥처럼 생긴 봉이 자운(紫雲峰)봉이다. 노을이 질 때 자색구름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옆은 신선대(神仙臺) (서쪽방향에 있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봉(柱峰), 칼바위가 있고 게속 우이동방향으로 다리다 보면 소귀를 닮은 형상인 우이암(牛耳岩) 나온다. 그런데 주봉과 칼바위 사이 능선에서 서북방향으로 뻗은 맥이 하나 더 있다. 그 주능을 따라 가다보면 다섯형제가 올망졸망 나란히 서있는 암군(岩群)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오봉이다. 그리고 우이동에서 고양으로 나가는 산 길이 있어 옛적엔 사람과 우마차가 넘어 다니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막혔지만 신청자에 한하여 통행이 가능한 우이령이다. 비로서 도봉산의 지맥은 우이령에서 끝이지만 산맥은 계속 이어서 달려 삼각산(三角山)을 이룬다.
우이령 마루에서 치고 삼각산으로 달라 붙으면 상장능선을 만나고 남으로 향하여 계속이어가면 인수봉 맞은편 영봉을 만난다. 내려서면 하루재(하루재는 사실 암자를 다닌던 사람들만 넘던 마루였다. 깔닥고개가 너무 황폐해져 등산로를 페쇄하자 지금처럼 하루재가 넓어진 것이다.)를 그리고 다시 오르면 그 유명한 깔닥고개를 만날 수 있고 다시 치고 오르면 만경대와 연결되어 우측 암릉을 이어가면 위문을 거쳐 백운대와 숨은벽, 인수봉을 접하게 된다. 대신 좌측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병풍암을 지나 용암문, 엠포산장, 대동문, 보국문, 대남문 문수봉을 만나 지맥은 다시 갈라져 용혈봉, 북한산성문으로 가고 곧장 따라가면 진흥왕순수비로 유명한 비봉, 사모바위, 향로봉, 유두봉을 지나 삼각산 끝자락을 만나고 대남문에서 남쪽으로 갈라진 지맥을 향하면 보현봉을 지나 북악산을 따라 걷게 되는 것이다. 북악산은 다시 인왕산을 만들고 이어서 안산을 만들어 놓았다.
원도봉산 기슭은 활엽수의 단풍잔치가 절정이다. 오늘 치받는 급경사를 밟은 이유도 원도봉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선에 올라서기 위함이었다. 오랜 세월 산을 사랑하고 살아 온 덕택일까? 어느산이든 절기가 변하는 때를 거의 기억하고 있다. 때를 맞춰 산행일정을 계획하면 산이 안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차경(借景)할 기회가 온다. 각종 공해에 시달리는 도시환경에서 이만큼의 가을정경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단풍나무, 참나무, 옻나무 등등 만추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엇다. 개인적으로는 만추로 가는 추색보다 옛일이 떠올라 추억을 되새김하는 일이 더 즐거웠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릿지를 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균형을 잃으면 앞으로 넘어지거나 옆으로 쓰러진다. 그 다음은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추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3명이 한조를 이뤄 자일로 서로 연결하고 릿지를 넘어가며 위험구간이 나올경우 자일을 풀어주고 당겨주고 서로 앙카를 보아주며 넘어가곤하였다.
그 지점에서 옛일이 떠 올라 손잡이를 찾고 발디딤 할 곳을 찾아 살핀 후 트레버스를 시도하였다. 충분한 발디딤 확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다음 동작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자신감보다 불안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힁단하면서 순간적으로 왼발에 힘을 주고 오른손으로 언더홀드를 움켜쥐면 된다. 호홉을 정리하는 순감 왼발을 축으로 삼고 오른발을 턱걸이 식으로 걸은 후 동시에 몸을 앞으로 밀며 언더홀드를 잡았다. 오른손으로 홀드를 잡으니 디음 동작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바위 정상에 섰다. 망월사가 산 안부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이고 포대암릉이 시작되는 민초샘 부근도 멋진 단풍이 들어 아름다웠다.
다시 호홉이 거칠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곳만 올라서면 자운봉과 신선대 사이를 빠져 만장봉과 선인봉 남측으로 갈 수 있다. 신선대를 올라 삼각산을 보고 싶었다. 원래 북한산이란 이름은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관료의 잘못으로 굳어진 이름이 바로 북한산이다.
삼각산을 바라 보며 끝까지 싸움을 주장한 김상헌은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지어 친구에게 준 시조가 떠올랐다. 남한산성은 종종 찾아 걸음 여행을 하는 곳이고 요즈음 남한산성이란 영화로 인하여 병자호란 당시 이야기가 회자 되는 이유에서일까, 불현듯 삼각산을 통하여 김상헌의 시가 떠오른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기억이 떠오른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보쟈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냐마는
시절(時節)이 하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어두움이 내리기 시작하여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조금 서둘러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헤드렌탄을 쟈겟 상단에 있는 큰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일몰 후 산행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서로 조심을 다독이며 석굴암을 경유한 후 다시 도봉구조대 옆을 지나 걸음을 재촉하며 도봉서원을 지나 도봉 탐방안내소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다니던 집을 찾아 옛 도봉산으로 가던 구길을 걸었다. 모여 앉아 감자탕을 시켜 놓고 약 두 시간 술추렴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의 집을 향하였다. 아주 오래된 산악과 관련된 것은 늘 추억을 생산한다.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순수한 열정을 바탕으로 자연과 일치속에서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소원하였는데 후배의 간청이 따라붙는다. 형님 자주 뵙고 싶습니다. 그러라하며 미소로 화답하고 손을 꼭잡았다. 오늘 다 듣지 못한 도봉산 이야기는 다음에 듣겠습니다. 하고 중간에 전부 내리고 나니 객차가 텅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남은 나는 왜 산을 사랑하였는가? 자문해 보았다. 자연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온유한 배려와 포웅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산은 산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나를 받아 준적이 없었다. 늘 산은 그곳에 그대로 항상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