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제3장 행원의 노래-아버님과의 인연
아버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아버님께서는 79세를 일기로 작년 이른 봄 돌아가셨다. 아버지라고 하는 위치가 자식에겐 어떠한 것일까.
나보다 먼저 부친을 여읜 친구들로부터 아무리 자식에게 나쁘게 대한 분도 돌아가시고 나면 생각이 많이 난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속정 깊으시고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신 분이야 오죽하겠는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아버님만 생각하면 마음엔 슬픔이 인다.
아버님은 3․1 운동 다음 해에 태어나셔서 평생 법관이 되는 것이 꿈이시던 분이었다. 그러나 법관은 무슨 법관, 면장이나 되라는 완고하신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할아버지 모르게 공부를 하셔야 했다. 도저히 시골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아래 일본 유학을 결행하셨을 때도 어머니가 숨겨 둔 노자돈을 받아 쥐고 할아버지 모르게 도주(?)를 하셔야 했고, 일본에 가셔서도 일체의 학비를 할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하셨다.
하지만 갖은 고생에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법관의 꿈을 이루지 못하신 아버지께서는 법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셨다. 6․25가 일어나서는 인민군을 피해 뒷산으로 도주하시기도 하셨으며, 그 후에도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기셨지만 다행히 평소에 덕이 있으신 분이라 주위의 도움으로 무사하셨다.
1980년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평범하게 지내시던 아버님께선 정년을 1년 남긴 채 공직생활을 타의에 의해 그만두셨고, 그 후 1년 뒤 뜻하지 않게 뇌졸중이 찾아와 나머지 생애를 오른쪽 팔다리가 불편하신 채 보내시게 된다.
몸이 불편하신 아버님께선 말년을 오직 몸 낫겠다는 일념으로 보내셨다. 한번 죽은 뇌신경이 돌아올 리 만무하건만 아버님은 늘 완쾌를 기대하셨다. 아버님은 팔다리가 불편하신 것 외엔 다른 후유증은 전혀 없었다. 말씀도 또렷하셨으며 눈도 안경 쓰지 않고 신문을 보실 정도였으며 의식도 맑으셨다.
그렇지만 늘 아버님께서는 내가 환자다라고 주장하셨다. 내가 보기엔 전혀 환자가 아닌데. 오른손 오른 다리만 움직이기 조금 불편하실 뿐인데...
그러나 당신께서 스스로 환자라고 하시는 이상 당신의 삶은 환자의 삶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그 병은 낫지 않습니다. 이만하기 다행이니, 이제 이런 불편함은 잊으시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 보세요 하는 자식들의 말에도 다 낫고 나면 하시겠다는 일념뿐이셨다.
아버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묵언과 인욕행의 대가이셨다. 초등학교 시절 일요일 집에 계실 때면 두 손을 잡으시고 하루 종일 말없이 앉아 계시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무슨 생각하셔요? 하고 여쭈면 아무 생각 안한다 하시며 그냥 웃으시곤 했는데 지금 보면 아마 과거생에서 좌선하시던 버릇이 남았던 게 아닌가 싶다.
풍이 오고 나서 아무것도 안하시는 아버님께 나는 잔소리를 잘 드리는 편이었는데, 아무리 심한 말씀을 드려도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눈만 꿈벅이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께서 당신은 전생에 소였소? 왜 아무 말도 안하고 눈만 껌뻑거리오? 하고 놀리시곤 했는데 그러면 그때서야 멋적은 웃음을 싱긋 지으실 뿐이었다.
건강하시던 아버님께서 갑자기 나빠지신 것은 생신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1997년 11월 초순. 변비가 생긴 것이 장을 막아 장폐색을 일으켜 위험한 고비를 넘기시더니 장이 풀린 후에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이 세상 인연이 다해 가는 것 같았다.
본래 아버님은 종교를 갖지는 않으셨으나 늘 어머니께 내가 절 하나 지어주마라고 호언장담하셨다. 하지만 아버님께 경전을 읽어 드리거나 염불을 같이 권할라치면 아예 거부하시거나 마지 못해 하시게 되더라도 별로 탐탁찮은 눈치셨다. 이런던 아버님께서 입원하신 이후에는 부처님 말씀을 들려 드리겠다 하면 그래 해 봐라 하시며 흔쾌히 허락하시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통증에 잠 못 이루시는 밤에도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거나 금강경 독송할 때면 코를 골고 한 밤을 푹 주무셨다. 이를 보고 주위분들은 아버님께서 막내아들이 하는 염불 소리가 듣기 싫어 눈 감고 계시는 거라고 하셨지만, 나는 아버님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여실히 느꼈다.
해를 넘기며 아버님은 급격히 나빠지셨다. 나는 아버님의 마지막 두 달 모습을 잊기 어렵다. 이제는 말이 나오지 않으시며, 고통에 잠 못 드시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가끔 헛것이 보이시는지 허공을 향해 손을 젓기도 하셨고, 때로는 아부지, 나 데리고 가이소. 오메, 이리 오이소 하는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아버님이 도저히 올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아버님이 올봄은 넘기셔서, 이 때까지 못하셨던 부처님 공양 제대로 하시고 고향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신 후 떠나시게 하고 싶었다.
청불주세라, 선지식이나 우리 주위의 가까운 이들이 어려울 때는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무르시기를 간절히 청하라고 부처님은 가르쳐 주셨다. 열반에 들지 말기를 인연 깊은 중생들이 주위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간절히 청하면 그 분은 열반을 늦추시고 이 땅에 더 오래 계셔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 주위엔 그러는 분이 별로 없었다. 아버님은 생사가 내일 모레라 말씀도 못하시고 힘들어 하시는데, 법문 하나 해주실 스님 한 분 안 계시고, 뵙는 분들은 그저 오래 사실 거라는 말씀만 드릴 뿐 꺼져 가는 삶을 감추기에 바빴다.
그리고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시면 옆에서 안타까워하시기만 할 뿐 기도나 독경하시는 분은 없었다. 심지어 내가 옆에서 기도를 올리려 하면 못하게 말리시는 분도 계셨다.
나는 아버님께 금강경 소식은 알려 드린 뒤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행여나 금강경을 다 알려 드리면 그 즉시 떠나실까 봐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서 더 나가지 않았는데,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금강경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으셨던 아버님이지만, 아버님, 이제 가서 할아버지 만나시면 금강경은 들려 드리셔야지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아버님께선 그래야지 하시며 고개를 끄떡이셨다.
아버님, 여래를 형상으로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을 땐 한 번도 금강경을 들어보시지 못하셨을 아버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그리고 다른 때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겨우 몇 마디 하시던 분이 이 때만은 병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못 보지! 라며 확신에 찬 듯 외치셔서 나를 놀라게 했다.
평소 건강하실 때 여생을 정리하시고 부처님 말씀 잘 들으셔서 앞날을 준비하십시오 하고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아버님께서는 죽음은 전혀 남의 일로만 여기셨다. 그렇지만 결국 그렇게 더 사시고 싶어하셨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잠깐 자식들이 옆에 없는 사이 주무시듯 가셨으니 이 한을 어이하랴!
평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면 금강경 독경소리 들으시며 가시게 하고 싶었는데 임종도 못해 드렸으니 이 불효를 어찌할 것인가...
-보현선생님의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에서, 불광출판사 刊
첫댓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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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을 발원하옵니다. ()()()
.좀더 깊게 와 닿습니다. 아버지. 부처님 품안에서 환히 웃으시길 스스로 기도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