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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세 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 왕건(王建)의 창업을 도와 삼중대광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 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경주계(慶州系),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전주계(全州系), 또 다른 한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강화계(江華系)다. ![]()
최필달계(崔必達系)는 낭장공파(郞將公派)ㆍ양근파(楊根派)ㆍ비인공파(庇仁公派)ㆍ용연동파(龍淵洞派)ㆍ행정파(杏亭派)ㆍ안동파(安東派)ㆍ수헌공파(睡軒公派)ㆍ문정공파(文正公派)ㆍ해창공파(海窓公派)ㆍ춘천파(春川派)ㆍ황주파(黃州派)ㆍ고성파(高城派)ㆍ정선파(旌善派)ㆍ생원공파(生員公派)ㆍ신리파(新里派)ㆍ경성파(鏡城派)ㆍ태안파(泰安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ㆍ충주파(忠州派)ㆍ장단파(長湍派)ㆍ냉정파(冷井派)ㆍ의주파(義州派)ㆍ덕원파(德源派)ㆍ능주파(綾州派)ㆍ사간공파(司諫公派)의 25개 파로 분파되었다. ![]() 최필달(崔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최필달(崔必達)의 13세손 한주(漢柱)는 강릉 최씨(江陵崔氏)가 자랑하는 ‘삼군(三君ㆍ경흥부원군 必達·명주부원군 崇彦·명주군 漢柱)’ 중의 한 사람이다. 수헌공(睡軒公) 응현(應賢)의 신도비문을 인용하면 몽고의 임금이 고려를 시켜 일본을 치게 할 때 넓은 바다에서 회오리 바람을 뜻밖에 만나 쇠닻이 바다 밑의 바위틈에 걸리는 통에 바람에 닷줄이 끊어지려 하자 수군 장졸들이 모두 기가 죽어 실색했는데, 한주(漢柱)가 향을 피우면서 하늘에 호소하기를 “이 한 몸을 희생하여 여러 목숨을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빌기를 마치자 쇠망치와 정을 가지고 짐작하기도 힘든 틈이 벌어진 바위를 찾아서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닻을 빼내는 일을 해냈다. 몸을 솟구쳐 물 위로 올라와 보니 배는 이미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떠다니는 널판지를 얻어 죽지는 않았다. 혹은 자라 등에 업혀 뭍에 나올 수 있었다고도 전한다. 고향 사람들이 그 사실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도 울진에 있다.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며, 출생 및 사망에 대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울진(蔚珍) 죽포사(竹浦祠)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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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평소에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왕이 절주(節酒)하라는 친서(親書)를 내리자 벽에 걸어 놓고 출입할 때마다 이를 보며 자성(自省)했다.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우, 부인이 머리를 들어주면서 어찰(御札)이 붙은 벽을 가리키면 아무리 취중이라도 번번히 사죄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느껴서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賢ㆍ1428~1507)은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헌(睡軒), 세종 30년(144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단종(端宗) 2년(145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직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이를 사양하고 자청하여 강릉훈도(江陵訓導ㆍ종9품)를 지낼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후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 및 박사(博士)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성종 11년(1480년)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대사헌(大司憲)ㆍ경주부윤(慶州府尹)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및 공조ㆍ형조ㆍ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연산군 11년(1505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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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현(應賢)의 셋째 아들 세절(世節ㆍ?~1535)은 호는 매창(梅窓)으로 연산군 4년(1498년)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급제하고, 연산군 10년(1504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중종 원년(1506년)에 왕에게 상소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정6품)에 올랐고,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으면서 호당(湖當ㆍ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다. 그후 이조정랑(吏曹正郞) 및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있으면서 승정원 지제고(承政院(知制誥)의 업무도 맡아 임금의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일도 겸하였다. 중종 15년(1520년) 동부승지(同副承旨),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 그해 11월에 좌부승지(左副承旨) 겸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일했다. 그후 황해(黃海)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대사헌(大司憲)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판서(戶曺判書)에 올랐으나 주위의 모함을 받자 판서직(判書職)을 사양하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인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있다가 중종 30년(153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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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현(應賢)의 손자로 생원(生員) 세효(世孝)의 아들인 수성(壽城ㆍ1487~1521)은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 또는 북해거사(北海居士)로 어려서부터 의지와 기개가 남과 다르고 지혜가 뛰어나 9살에 이미 문장에 일가를 이루어 주위 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받았다. 당시의 시인 홍유손(洪裕孫)이 그를 보고 경탄하며 “이 아이는 세속 바깥의 인물이므로 마땅히 깊은 골짜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문장과 서예와 미술ㆍ음악 네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사람들은 그를 ‘사절(四絶)’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에만 열중하고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았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과 함께 학문을 닦고, 혼탁한 세상에서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며 전국 명산을 찾아 다니며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며 선비의 도를 지키고 거문고로 산해곡(山海曲)을 타며 회포를 풀었다. ![]()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주위의 모함으로 조광조(趙光祖) 일당과 음모하였다 하여 문초관(問招官)이 문초하니 고문을 받으면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광조(光祖)와 당을 이루어 국정에 참여하다니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일생 배운 바는 오직 충(忠)ㆍ효(孝)뿐이다.”라고 했다. 동지들이 처형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명산을 유람하다가 중종 16년(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가로지르고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려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강릉의 향사에 배향되었다. ![]()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城)의 손자인 기벽(基鐴ㆍ1573~1645)은 광해군 4년(161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생원(生員)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년)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로 있으면서 이이첨(李爾瞻)의 심복들이 여론을 조작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상소하자 대궐에 나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라고 반대하다가 당시의 세도가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고 동생 기백(基銆)과 함께 금고형(禁錮刑)을 받아 원주(原州)로 내려가 살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그 억울함을 풀었다. 후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갈 때 호위하였다. 숙종 2년(1676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
기벽(基鐴)의 슬하에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셋째 문발(文潑ㆍ1607~1673)은 호는 취석(醉石)으로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 같은 시(詩) 3권 2책에 담은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막내 문식(文湜ㆍ1610~?)은 인조 8년(1630년)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과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ㆍ승지(承旨)ㆍ대사간(大司諫)ㆍ예조참판ㆍ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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