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민중 속의 승려들
-장원심·자비·탄선·해선의 복지사업 (1406-1437년경)-
조선 초의 불교탄압 속에서 승려 지도층은 권력자나 관료와 타협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한편으로는 민중 속에서 민중과 고락을 나눈 승려들도 있었다. 세조에서 연산군이 집권하던 기간에 살았던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그러한 승려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용재총화>와 <태종실록>에 등장하는 장원심이란 승려는 키가 크고 거처가 일정치 않았다. 그는 사람됨이 익살스럽고 사심과 욕심이 없었다. 그는 남에게 무엇을 받으며 남에게 수없이 나누어주고 재앙이 닥치면 제자들을 모아 부지런히 기도하였다. 1406년 가뭄 때 장원심이 흥천사에서 5일 동안 기우제를 지냈으며, 일부러 미친 척하고 굶주린 자에게 빌어 먹이며, 헐벗은 자에게 제 옷을 벗어 입히며, 병든 이를 힘써 구완하며, 장사지낼 사람 없는 시체를 장사지내며, 길 닦고 다리를 놓는 등 가지 않는 곳 없이 두루 다니면서 사람 돕는 일만 하므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또 자비(慈悲)라는 승려가 있었다. 성질이 곧아 굽은 마디가 없어서 공경이나 재상이라도 모두 이름으로 불렀다. 남이 주는 것이면 귀중한 물건이라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으며, 남이 달라고 하면 죄다 주어버렸다. 자기는 그저 다 부서진 갓과 다 떨어진 옷만 걸쳤다. 날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었는데, 주면 먹고 안주 면 안 먹었다. 걸게 차린 음식이라 해서 좋다 하지 않고 거친 밥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다리와 길·우물을 수리하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았다.
또 조선 건국 초에 활동했던 탄선도 장원심이나 자비처럼 민중의 복지를 위해 진력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화엄종 승려로서, 도성을 쌓을 때 전염병이 돌자 성 쌓는 일꾼들을 돌보며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러한 민중의료 사업은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어, 조정에서는 1422년 축성 때도 성의 동쪽과 서쪽에 구료소(진료소)를 두고 탄선이 거느리는 승려 3백 명과 혜민국(국가의료기관) 소속 의원 60명을 배치하여 병자와 부상자를 치료했다.
또 세종 때 의료승인 천우·을유 등은 선종의 승려들로서 온천치료를 통한 민중의료에 힘썼다. 그들은 1427년,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 보(기금)를 만들어 병자들을 구제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온천치료 사업을 예조에서 관할하게 되었는데, 일종의 온천치료기관인 묵사는 '한증승'이라 불리는 이들 의료 승들에 의해 운영되며 1445년까지 존속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승려 해선은 서울 민가의 초가지붕을 기와로 개량하는 복지활동을 벌였다.
그는 1406년(태종 6)에, 당시 새 도읍지인 서울의 민가 지붕들이 짚으로 덮여 있어 대외적으로 나라의 위신이 떨어지고 화재 위험도 있다고 지적하며 기와를 구워 공급하는 일을 자청했다.
그는 기와를 구워 팔아 10년 이내에 성안의 민가지붕을 모두 기와로 덮으리라 서원을 하고 조정에 기와를 구울 가마인 '별요'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로 하여금 기와 굽는 일을 관장하게 하는 한편 각도에서 승려 장인 들을 뽑아 그 일을 하게 했다. 몇 년 안에 성안 민가의 과반수를 기와로 덮었지만, 계속된 흉년으로 경비를 대지 못하여 일시 중단하였다가 1416년, 다시 일을 벌였다. 1425년(세종 7)에는 굳이 조정에 의지하지 않고 해선이 스스로 모은 민간 곡식 1천 석을 밑천으로 호조로 하여금 '삼색지보(三色之寶)'라는 기금을 마련하게 하여 민가 지붕개량을 위한 기와 굽기를 계속했다. 이렇게 복지사업의 계속성을 보장하는 현명한 방안을 내놓아 정부의 복지정책을 관철시킨 그는 실로 조선 초기의 위대한 승려였다. 불교가 그토록 탄압받던 시기에 결코 숨거나 도피하지 않고 민중의 복지를 위해 스스로 나서서 조정에 복지정책을 제안하고 촉구하며 그 실천사업을 자청하여 20여 년이나 한결같이 실천한 해선이야말로 우리 나라 불교사에 뚜렷이 기록해야 할 실천적 승려의 모범이다.
민중복지를 위한 그러한 승려들의 불굴의 노력은 세종 때의 활발한 복지정책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 불교사 100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