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읍성은 많이 허물어져 있지만 여기저기 석벽의 흔적이 남아 있어 성의 형태를 짐작할수 있다. 복원중이라 아쉽지만 언제가는 복원된 모습을 우리앞에 보일 것이다.
울산의 읍성은 성벽조차도 없어 복원에 어려움을 주지만 경주는 읍성 사진이 남아 있어 복원 하는데는 많은 도움이 될것으로 본다.
읍성에서 100m 거리에 있는 집경전 터로 갔다.
전주.평양,경주에는 조선 태조 어진을 모셔둔 전각이 있었는데 전주에 경기전만 남아있고 경주와 평앙은 없어졌다.
집경전 자리에는 커다란 장대석으로 돌을 쌓아 방을 구성하였다.
이 석재들은 통일신라의 폐사찰의 장대석이라는 설과 현 집경전 자리가 주전소 자리였다는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쟀든 이 집경전 자리의 석재에는 당간지주도 보이고 장대석의 크기는 달라 여러곳에서 모아서 쌓아 만든것이 아닌가 싶다.
통일신라 시대 이궁이었 조선시대에는 태조어진을 보관한 장소 였고 나중에는 돈을 만드는 장소 였다하니 몇 안되는 커다란 장대석으로 많은것을 유추 할수 있는곳이다.
바로옆 경주 여고에는 집경전 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집경전을 뒤로하고 서경사로 갔다.
예비 답사시 서경사를 찾을때 쉽게 찾지 못해서 약간의 수고를 했는데 서경사를 보니 군산 동국사가 생각난다
같은 일본 절이지만 많은 차이가 나서 이런 사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를 보지 못하는 것이 맘에 걸린다.
지붕과 망새 형식은 일본 장수 갑옷을 닮았고 처마에는 코끼리 모양도 보여 아무런 장식이 없는 동국사와는 비교가 많이 되는 사찰이다.
서경사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며 간단하게기념사진 찍고 나서 동리생가로 향 하였다.
동리 생가는 서경사에서 대로를건너 10분거리 에 있다. 지금은 다른사람의 집에 되어 들어갈수는없지만 (운 좋으면 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 갈수 있다.) 동리 생가으 ㅣ흔적은 우물만이 그모습을 상상 해줄 뿐이라서 아쉬운 생각이 앞선다.
짧게 이야기를하고 점심을 먹으러 준비를 하는데 경주 역전 시장에서 먹거리를 준비해서 황성공원으로 갔다. 맑은 날과 춥지않는 이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정자에서 배불리먹 었는데 어묵,떡볶이,김밥, 막거리 등등 아주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서 다음 답사지로 ......경주시내를 가로질러 도착한곳은 동천동 백률사이다.지금은 자추사로 바뀌었지만 옛적에는 백률사로 불리워 졌다. 거기엔 신라의 불교를 공인한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곳 이라 한다.
순교비는 경주 국립박물관에 남아 있지만 여기엔 그 당시의 흔적은 사찰의 기단 뿐이다.
이 자추사를 올라 가기전 에는 사면불상이 존재한다. 커다란 바위에 동서남북으로 새긴 이 사면불상은 동천동의 문화재중 당연 히 압권이다.
아쉬운 것은 남쪽면의 불상의 머리는 일본인들이 다떼어 보기 안좋다.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다고 했것만 .......
굴불사지도 보고 자추사도 보고나서 소금강 이라는 자추사 뒤의 산으로 오른다.
에전에 왔을때에는 한 여름이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 갔는데 이제는 같이 오르는 사람도 있고 덥지는 않지만
숨은 차다. 간만에 등산을 하니 그런가 한 15여분 지나 정상 부근에 오르니 여러가 운동기구가 많다, 산불 감시 초소도 보이고 저멀리 경주 시내도 보인다.
꽃 구경온 차들은 경주 시내를 꽉꽉 메워 도로가 상당히 복잡하다.
잠시 내리막 길을 걸어 가니 동천동 마애불이 보인다. 삼존불인데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이 굴곡이 흐미하다.
다들 모여서 동천동 마애불을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한다. 그늘에 자리잡아 흐리고 잘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땀을 흘리고 다리품 팔아 올라온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