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가운데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성벽은 크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분별의 성벽이고, 또 하나는 구별의 성벽이고, 또 하나는 방어의 성벽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교회 가운데 임하시기를 우리가 원하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 가운데 이러한 성벽이 세워지는 것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구별의 성벽이 세워지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분별과 구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그 성벽이 방어의 성벽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하나님이 불담으로 지키시는 그러한 방어의 벽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1. 교회 안에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합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서 세워지는 겁니다. 아모스 7장 7절과 8절에 보면 그 내용을 잘 볼 수 있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는데, 하나님이 다림줄을 쥐고 서 계셨습니다. 다림줄이란 건축 일을 하는 목수나 벽돌을 쌓는 분들이 원뿔모양의 추에 줄을 매달아서 수직을 보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도구를 말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림줄이 없으면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세워지는 것이 똑바로 세워지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똑바로 세워질 수 없고, 똑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조금만 요동해도 무너지기 쉬운 부실 건물이 됩니다. 그런데 아모스 7장 7절 그림에서 벽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경은 신약의 교회를 새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하나님의 교회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게 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수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그곳에 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축복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때는 다림줄, 어떤 때는 영적 분별력, 이 둘을 상호 교환적으로 쓰다보니까 그 말을 서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서 다림줄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 그러는데 이 정경이라는 말은 영어로 'can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ruler' 자라는 뜻입니다. 길이를 재는 자, 왜 성경 66권을 정경이라고 부르냐면 이 성경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준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역을 재는 자입니다. 그래서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으로서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분별력은 뭐냐? 바로 그 다림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 대신 둘은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기준은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을 잘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성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배우고 연구 할뿐만 아니라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반적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다림줄은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다림줄을 볼 수 있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그 다림줄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면 아무리 성경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다림줄을 볼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에서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고 오늘 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언어(원어)를 알았고, 성경의 배경을 알았고, 랍비들의 해석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요즘 신학대학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도 성경을 한 번도 안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신학대학의 교수님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도 온 분인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신학교 다닐 때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었다고 했답니다. 여기 목사님들 많이 계신데, 여러분 신학교 가면 여러분 생각에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많이 읽고 배우고 그럴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섬기러 왔다고 말씀 하시면서 나를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왔다. 영어로 ‘ransom'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대속물이라는 말이 예수님 당시에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했고, 예수님은 무슨 의미로 쓰셨고, 이 부분만 하더라도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한 구절을 연구해가지고 박사학위 받는 겁니다. 여러분이 웃으실지 모르지만 그 한 구절 연구하려면 신약의 언어를 알아야 되고, 구약의 언어를 알아야 되고,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알아야 되고, 이 대속물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해석을 알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부하는 양은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 결국 대속물에 관한 한 가지 의견을 갖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말을 하냐면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알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성경을 많이 읽은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언어를 알고 성경의 배경을 알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랍비의 해석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선 그 바리새인들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면서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고, 또한 바로 그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13장 14절에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 있으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지니까 그들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기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A. B. C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그들은 철저하게 영적인 눈이 가리어졌습니다. 본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마디로 너희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저들에게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저들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성경의 일점이라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는데, 그것은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글(성경)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나를 믿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면 아는 것, 믿는 것이면 믿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면 믿는 것,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면 사랑하는 것,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똑같은 성경 구절을 사용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성경적인 의미 자체가 가리진 것 말합니다.
그 한부분만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해서 교리적으로 누구보다 잘 아니까 본인들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인데, 그래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형용을 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면 다림줄이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림줄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져서 신앙생활을 하되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본인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림줄을 보려면 영적인 분별력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바로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집니다. 그래서 다림줄이 가려지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봅니다. 말라기 1장 6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그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하나이다.” 말라기서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시면 그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철저히 무너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타락 할수록 영적인 분별력이 무너지게 되어 있고, 반면에 영적인 분별력이 무너질수록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다림줄,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사는 게 중요한데 그 기준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어떻게 사는 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인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인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인지를 모르니까요. 자기 임의대로 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니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100m 달리기 하는 선수들을 보십시오. 앞에 골인점이 있고, 자기 트랙이 다 있습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 트랙을 따라 힘을 다해 뛰고 앞에 골인 점을 보니까 재대로 뛰는 거지, 만약 줄도 없고 골인점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뛰기는 뛰는데 어디로 뛰는지 모른다면 재대로 뛸 수 있겠어요? 그런데 여기 보시면 신앙이 타락할 때,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 당시 제사장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그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보시면 제사장들은 그 말을 듣고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했냐고 반문합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그 말을 듣고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느냐는 겁니다.
또한 3장 7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 즉 내게로 돌아오라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여기보시면 영원한 하나님의 법칙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신다.’ 그러니까 저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리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여기 보시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도 떠나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대도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반문하는 겁니다. 분별력이 가려지면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 할수록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눈이 멀면 자기가 눈먼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영적으로 눈이 멀면 자기가 눈먼 것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가 눈먼 것을 몰랐듯이 이 제사장들이 눈 먼 것을 몰랐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눈이 멀면 우리가 눈 먼지 모릅니다. 육적으로 눈먼 것보다 영적으로 눈 먼 게 훨씬 무서운데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자기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결과는 더 심각합니다.
에스겔서 22장 26절을 봅니다. 에스겔서 배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여러 차례 심판을 경고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은 고로 하나님의 심판이 예레미야 시대에 최종적으로 임해서 B.C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그리고 유대 땅에는 바벨론 왕이 동방에서부터 다섯 족속을 데려다가 풀어놔서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그래서 유다가 완전히 패망하게 되는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에스겔 이였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예언하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의 일입니다. 그 배경에서 지금 에스겔서 22장 26절에 그들에게 심판이 임했던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제가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분변이라는 말은 분별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를 보면 그들에게 심판이 왔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뭐냐면 그들 가운데 분별의 벽이 무너져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거룩한 것이고, 무엇이 속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한다고 말하면서 그 아래 첫 번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말씀드렸고, 그 다음에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반드시 교회 안에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지난번에 보았던 레위기 9장과 10장입니다. 대조해서 보면 너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9장 15절입니다. “그가 또 백성의 예물을 드리되 곧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취하여 전과 같이...” 바로 그 위에 했던 것과 같이, 첫 번째 희생물을 드렸던 것과 같이, 그 말입니다. 그럼 첫 번째 희생물을 어떻게 드렸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한 대로 드렸습니다. 그 다음 16절입니다. “번제의 희생을 드리되 규례대로 드리고.” 그 다음 쭉 보시면 백성을 위하여 이러 이러한 제물을 잡으매, 그러면서 21절입니다. “가슴들과 우편 뒷다리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요제로 흔드니 모세의 명한 것과 같았더라.” 여기 지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되 세 차례에 걸쳐서 반복되게 있는 게 뭐냐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규례대로 행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준과 방법을 따라 행했더라.’ 그 말입니다. 그랬더니 21절입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하므로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느니라. 모세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온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에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사실 제사만 하더라도 이런 부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방법을 따라, 그 말은 기준을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그 곳에 임했다고 그랬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그게 하나님의 부흥이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부분적인 성령의 은사, 이런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통치하시며 혹은 이 나라 가운데 오셔서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그러한 날을 우리가 소망하는데 그러한 소망을 향해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부분적인 은혜로 만족하지 말고, 안일하게 말고, 거기에 마음이 높아지지 말고, 이 정도면 됐다는 그러한 생각을 버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그 날 까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나아가야 되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실 때에 여기를 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가 세 차례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 축복할 때, 하나님이 임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끝나자마자 이제 다른 사건이 대조해서 일어납니다. 이 사건과 대조되어 있습니다. 10장에는 아론의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가 나옵니다. 이들도 제사장입니다. 당연히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되 어떤 방법으로 드렸냐면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져다가 드렸다고 그랬습니다. 다른 불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규례와 규칙을 따라 행한 게 아니라 자기 임의대로 행했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그들을 그 자리에서 살라 죽였습니다. 그리고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아론에게 하나님은 머리를 풀고 곡하는 것도 성전을 떠나는 것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8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 갈 때에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리라.”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나가야 되는데,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광으로 임하셔서 복을 주셨는데 이들이 독주로 인해 분별의 벽이 무너져 무엇이 하나님 앞에 정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 앞에 속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무엇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인지, 무엇이 세상적인 것인지, 무엇이 자기의 지혜인지, 무엇이 자기 방법인지, 전혀 분별되지 않은 상태로 임의로 행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여기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나는 예외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은 호되게 다루시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나는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보시면 나답과 아비후에게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10절을 말씀하시기 전에 3절에 하나님께서 그 전에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였냐면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은 거룩함이 요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구절을 다른 데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 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이번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배경은 물이 없어 불평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앞에 있는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하라고 그랬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화를 내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물을 내랴 하면서 분노 가운데 전에 했던 습관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그래서 물은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그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이시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다. 이걸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모세조차도 예외로 안 삼으셨습니다. 모세가 어떤 분인지 우리는 다 압니다. 그 희생, 그 믿음, 하나님을 향한 헌신, 그 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의 형용을 보았고, 친구와 대화하듯 하나님과 대화했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한 민족을 해방시키셨고, 그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그 모세,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도 예외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도 예외로 삼지 않은 정도라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여기보시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뭐가 요구 되는가? 더 큰 거룩함이 요구 됩니다.
거룩함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덕적인 거룩함으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도덕적인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함 하면 이런 도덕적인 거룩함만을 생각하는 데, 본문에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정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따라 행하지 않은 그것이 속된 것이고, 죄인 것이고,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인 거룩함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속한 거룩함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그랬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적인 순결함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회복되려면 분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되는데, 분별의 성벽이 세워지려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뭐냐면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반면에 사단에게 혹은 세상에게 혹은 죄에게 혹은 육신에게 혹은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 무엇이 사단과 세상과 죄와 육신과 사람의 방법인지, 무엇이 사람의 사단과 세상과 죄와 육신과 사람의 길인지를 분별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하라는 그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 대한 부분을 보면 선명히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루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길, 혹은 사람의 길, 이런 부분을 알기 위해서 컴퓨터에 있는 성경 프로그램에서 성구를 검색하면서 영어 성경에 들어가서 ‘way’(길) ‘ways’(길들)라는 단어를 쳐서 클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쫙 나오는데 작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 해보세요. 목사님들 같은 경우에는 진짜 많은 부분들을 한편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가장 큰 명령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길에 행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가 분별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을 알지 못하면 표면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주님, 저는 저 간음하는 자들, 토색하는 자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전혀 간음하지 않고, 전혀 토색하지 않고, 그토록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철저하게 구제하고, 철저하게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본인은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를 보면 하나님의 길에서 천리만리 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도 표면적인 말씀에, 어떤 도덕적인 거룩함에 대해서만 얘기했고, 그 도덕적인 거룩함도 자기 관점에서 선별적으로 이해해서 자부심을 갖고 그렇게 기도 할 때, 그는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를 심지어 세리보다도 더 못하게 취급하셨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날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세리였지 그 바리새인이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은 표면적인 것으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세리보다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길’ 혹은 ‘길들’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길도 나오고 사람의 길도 나오는데 성경에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겁니다. 여호수아서 22장 5절입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라. 하고.” 여기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이 두 개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신명기 9장 9절도 똑같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16장 1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왜 여러 곳에 그런 부분이 나와 있나요? 그것은 단순한 문자적인 복종만 가지고 부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명령과 규례를 문자적으로 복종한다고 해서 충분치 않은 걸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게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는 게 가능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치 않으면서 순종하는 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계명을 지켰다고 해서 본인은 순종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사랑함이 없이 실제로 온전한 순종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방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길로 행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올바로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단순히 표면적으로 나타난 몇 가지 규례와 명령을 그저 지키는 그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요. 열왕기상 11장 33절입니다.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며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로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치 않는 것과 하나님의 길로 행치 않은 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의 길로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반복적으로 구한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길을 내게 보여 주세요. 였습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가장 핵심이고 거기에 포함된 중요한 한 부분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의 길이 가려지면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속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세상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무엇이 사단이나 사람에게로부터 온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그걸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할 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길로 행할 수 있고,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또 다른 말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너무너무 필수적입니다. 신명기 8장 6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the ways' 그 길을 따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또 시편 128편 1절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똑같습니다. “그 길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나니.” 제가 두 구절만 적어 놨는데, 그 외에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 신앙의 필수인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속에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게 들어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 나에게 나눠지지 않는 한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고 나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사 나로 그리로 행케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행사를 40년 동안 보면서도 그 동일한 40년 동안 왜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분노케 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내가 여호와께 은총(신임)을 입었사오면 하나님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나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필수임을 볼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모세도 다윗처럼 줄기차게 여호와여 나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구약성경을 지금 말하는 겁니다. 신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구약은 단순히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키는 게 구약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구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함이 연결되어서 그 가운데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더 이 부분에서 살펴보기 원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게 필수입니다. 여기 신명기 28장 9절을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저는 이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보증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하나님의 맹세하신 것에 있어서도 그 맹세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반면에 한 가지 그 반대로 살펴볼게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길을 사람의 길이 대체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ways’ 나 ‘way’란 구절을 한번 컴퓨터에서 한번 검색해 보세요. 신앙이 타락 할수록 저들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한 게 아니라 자기의 길, 곧 사람의 길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길이 악한 겁니다. 그게 속된 거고, 그게 죄입니다. 성경이 거룩함을 말할 때, 도덕적인 거룩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을 말하고 사람의 길을 따르게 될 때, 그게 악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고 타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몇 구절을 더 찾아보기 원합니다.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길을 떠나 자기의 길로 행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처럼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다른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의 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악한 것입니다. 그 앞 절인 55장 7절에 보시면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래서 자기의 길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악한 자이고, 자기의 생각을 따라 행하는 자가 불의한 자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타락이 자기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의 길을 따라 행하는 그게 악한 것입니다. 그게 타락의 본질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은 그 길을 불의 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내게 오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과 내 길은 너희 길과 너희 생각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여러분 이사야서 56장 10-11절을 보면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여기의 핵심은 분별력이 없다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무엇이 속된 것인지가 분별이 안 된다는 겁니다. 9절부터 보겠습니다. “9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짓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즐겨하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며 족한 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행하며” 분별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아니하고 각기 제 길을 따라 행했다고 했습니다. ‘탐욕이 심하며’란 말은 사역이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진 것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왜냐면 분별력이 가려졌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그 하나님의 길에 맞추어 자기 길을 비춰보게 될 때, 자기가 하나님께 떠나 있는지 알 텐데 하나님의 길을 모르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그릇되게 가면서도 틀린 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그래도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해서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냐고 그러는 겁니다. 문제는 눈이 가려져서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고, 나아가 자기 길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호세아서 4장 9절을 봅니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하리니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영어 NIV성경에는 소위라는 말이 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I will punish both of them’ 내가 그들 둘 다를 심판하리라.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for their ways’ 그들의 길들을 인하여 내가 그들을 심판하리라. ‘and repay them for their deeds.’ 그리고 그들의 행위들을 인하여 내가 그들을 갚으리라. 여기에 중요한 게 나오는데, 성경적인 지식에 따라 우리의 행위가 바뀌는 게 아니고,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길을 아는 만큼 행위가 바꿔집니다. 우리가 누구의 길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두 개는 나눠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거듭 반복해서 나오는 게 무슨 길을 따르느냐에 그 행위가 나옵니다. ‘ways’ 길과 ‘deeds’ 행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라기에서 타락한 제사장들의 얘기가 나올 때, 그들이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서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 길로 행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행동들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면 길과 행동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백성들이건 제사장이건 일반이라. ‘내가 그 둘 다를 심판 할 텐데 그들의 길을 인하여 심판할 것이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길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말라기 2장 9절입니다. “너희가 도를 지키지 아니하며.” ‘길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면’ “So I have caused you to be despised and humiliated before all the people.” 내가 너희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멸시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게 만들었다. “because” 왜냐하면 “you have not followed my ways” 너희가 내 길들을 따라 행치 않기 때문이다. 이제 좀 감이 잡히시나요? 하나님께서 ‘내게 오는 자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하여야 할찌니라.’ 에스겔서에서 바로 그 분별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흩으셨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그런데 다음에 세워져야할 성벽이 구별의 성벽입니다. 그걸 넘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길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그게 뭐냐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라고 그랬는데, 거룩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길이고, 속된 것들은 더러운 것, 죄악 된 것이 사람의 길인데, 이 사람의 길이 성경에 보면 이게 사단의 길이고, 이게 세상의 길이고, 이게 자기의 길이고, 이게 육신의 길이고, 죄의 길입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한 가지 더 넘어가지 전에 살펴보기 원하는 거는 이 길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전통입니다.
열왕기상 15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제가 컴퓨터로 “죄”를 찾아보니까 많은 표현들이 여로보암의 길, 다윗의 길, 그 아비의 길, 누구누구의 길, 이런 표현들이 많은 걸 받습니다. 그 아비의 길이란, 여로보암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길을 따라 행했는데 그 악을 행한 길이 그 사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많은 자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행하는 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전통이라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내려 왔으니까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걸로 생각하니까. 안보일 수 있습니다. 기준이 가려지면 그게 무서운 겁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에게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주님께서도 전통이 우리의 행하는 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가 그 아비의 길로 행하여 악을 행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길이 아닌 자기의 길을 따라 살면서도 왜 모르는지 아세요? 전통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전통이 다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둘째, 그 당시의 팽배한 신앙관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마틴 루터, 시대를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 개인의 지식이나 경험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그 말은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을 따라 갔다는 겁니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경험을 따라 갔다는 겁니다. 그게 악한 길인지도 모르고, 이 길에 영향을 미치는 게 뭐냐면 자기 경험입니다.
넷째, 세상적인 가치관입니다.
사단의 가치관입니다. 신명기 18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지니라.” 우리말로 번역하면 행위라는 말이 원래는 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NIV성경에는 “do not learn to imitate the detestable ways of the nations there.” 거기에 있는 나라들의 길들을 본받지 말라.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예수 믿기 전의 삶을 말하면서 “그 때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전에는 우리가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였더니.” 그 뒤에 사단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주석에는 이 말은 당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너희는 로마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말한다면 ‘너희는 안 믿는 한국 사람들처럼 살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합니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세상의 길이 버려져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삶이 버려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니까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다 그렇게 사니까요. 이처럼 우리 가운데 분별의 벽이 세워져야 합니다.
2. 교회 안에 구별의 성벽이 세워져야 합니다.
에스겔서 22장을 보시면 분별의 성벽이 무너져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보면 구별의 성벽이 무너져 있습니다.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제사장들은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고, 반면에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다. 그랬는데, 똑같이 분변의 법도 되지만 구별의 법도 될 수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y do not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않았다. “they teach tha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unclean and clean." 그들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을 구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을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구별의 법보다 분별의 법이 먼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 하나님의 길과 세상과 사람과 자기와 육신과 죄와 사단의 길이 분별되어지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의 방법을 취하고 세상의 방법을 교회에서 신앙에서 철저하게 버려야 되는, 그게 구별의 법입니다. 이 구별의 법이 있으려면 먼저 분별의 벽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분별의 벽이 있다고 해도 철저하게 버리지 않으면 먼저는 성벽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게 심각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되고, 무엇이 사단과 세상과 죄와 육신과 사람의 길인지, 사람의 방법인지, 사람에게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면서 사단과 세상과 사람과 죄와 육신에 속한 것들을 철저하게 버려야 됩니다. 표면적인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속한 것, 세상에게 속한 것 중의 대표적인 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철저하게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30절에 보면 바로 그 율법주의를 하갈과 이스마엘, 이삭과 사라를 비유로 말하면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으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과감하게 내어 쫓으라고 하셨듯이 우리의 삶에서 거짓신앙을 과감하게 몰아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55장 7절에도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게 구별의 성벽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는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고, 여태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그것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성경에 나오는 표면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준이 분별되어져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세상의 속한 것들, 육신에 속한 것들을 분별하여 그것을 철저히 내어 버리는 것이 회개에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하 7장14절에 “너희가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면.” 그 악한 길에서 떠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며 그 땅을 고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이 책에 저자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165쪽입니다.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에는 뜻, 마음, 의지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회개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회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성격에 대해 하나님과 동의해야 합니다.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완전한 회개를 이루려면 죄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우상을 허물어 버리는 것, 행동양식의 변화, 전통을 버리는 것, 재산과 물질을 파는 것, 잘못된 일에 대한 보상, 다른 사람들과의 화해 혹은 하나님이 용납한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들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부터 잘할께요’ 라는 말로는 불충분합니다. 회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내일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방법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또 108-109쪽입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그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신할 것을 둡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던 것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으므로, 세상것으로 대치합니다.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하나님의 임재를 대체하는 것들,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론, 프로그램, 그리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영적 성장과 교회의 성장을 이루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그것들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도 한다.” 저는 이 말에 100% 동의합니다. 그럼 교회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앉혀 놓으려고, 붙잡으려고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한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인가? 그런데 그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대신하는 인간의 길이요. 육신의 길이요. 그 뒤에 사단이 있다는 겁니다. 중립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가려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되는데, 무엇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길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분별해야 되고, 무엇이 세상과 육신과 사단과 자기에게 속해 있는 자기의 길이고, 무엇이 자기 방법이고, 무엇이 세상의 길이고, 무엇이 세상의 방법인가를 분별하여 그것을 버리는 것이 구별의 성벽이 세워지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읽은 이런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누가 바람피웠다. 그러면 그것이 죄인 것은 금방압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이 죄인 것은 모릅니다. 해놓고는 다 주를 위해서 하는 건데 이게 무슨 죄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대신 하는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차원에서 오늘 날 교회를 보면,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왜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었는지는 너무나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라도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조된 감정, 화려한 의식, 그리고 종교행사가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를 이러한 것들로 대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예배하러 나올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친밀함을 구하기보다 매우 화려한 예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찡한 예배, 그야말로 장엄한 찬양과 주악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그러한 예배, 그것이 만약에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찾고, 하나님 그 분의 얼굴을 구하며, 그 하나님의 길과 목적을 구해서 자신의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기를 구하는 그 예배의 본질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악한 길이요. 그것은 세상의 길이요. 그것은 육신의 길이요. 그것은 죄의 길이요. 그것은 사단에게서 나온 거라 그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를 원한다면 분별의 벽이 세워져야 되는데, 분별의 벽이 세워진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오는 거룩한 것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속한 것이 분별해야 되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속된 것들이 철저하게 제거 되어야 합니다. 그게 구별의 법입니다.
“하나님을 대체한은 것들, -하나님은 침례식과 혹은 세례식과 주의 만찬 식을 통해 공개적으로 간증을 나누며, 주님을 기억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전통이나 종교 차원으로 하락 시킨다.” 이게 세상의 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의 대 부분을 이기적인 즐거움을 누리는데 허비하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공의와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관심사들에는 무심하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구원을 얻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교회 출석률 향상 목표 달성을 위한 전도 심방에 심혈을 기울린다.” 전도는 전도인 것 같지만 방법과 목적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따라합니다. 그게 악한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길들을 대체하는 것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산다.” 돈은 잡히는데 하늘나라는 안 잡히고, 차나 집은 잡히고 권력은 잡히는데, 하나님은 안 잡히고, 주일 날 아무리 열심히 나와서 예배드려도 자기 길을 따라 살면 절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심판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자기와 자기의 입지를 먼저 챙긴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자기 삶을 투자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씨앗을 심지 않고, 우리 자신이 거기에 헌신됨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니까 그냥 있으면 될 것 같습니까? 성경은 너희가 썩어지는 하나의 밀알이 되라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드림이 없이는 하나님이 아무리 놀라운 은혜와 역사를 베푸셔도 우리는 거기에 마음도 관심도 없고, 그저 받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높인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라고(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구원코자(우리가 가진 것을 움켜지려고) 애쓴다.” “-하나님은, 주님께서는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교묘히 조정하여 봉사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들이 다 하나님의 길을 대체하는 인간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별의 벽이 세워진다는 말은 이처럼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명령을 지키고 안 지키고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선한 것과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것을 분별하여 그 사단과 세상과 자기와 육신과 죄에서 나온 방법과 길과 거기서 오는 것들을 철저하게 우리 가운데서 버리는 것, 그것이 구별의 성벽이 세워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질 때, 하나님의 방어의 성벽이 세워질 것입니다.
3. 교회 안에 방어의 성벽이 세워져야 합니다.
스가랴 2장 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그런데 기억하실 것은 분별의 벽이 세워지고 구별의 벽이 세워져야 하나님이 방어의 벽이 되십니다. 이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벽이 되시면 사단이 함부로 틈타지 못할 것이고, 죄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세상과 사람의 방법과 생각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이 친히 그 가운데서 왕 되시며 운행하시고 통치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그렇게 회복시키시기 원하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분별의 벽, 구별의 벽이 세워지기 원하시고, 그렇게 세워질 때,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불 성곽으로 보호의 벽, 방어의 벽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영적인 눈을 밝혀 주심으로 우리 가운데 분별의 벽이 세워질 수 있기를 소원하며, 우리 가운데서 세상의 방법, 세상의 길, 사람의 방법을 철저히 버림으로 구별의 벽이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