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화의 포스트모던적 접근에 대한 반성
1. 한때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가 학술분야나 일상적 지식에서 유행처럼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가져온 ‘모더니즘’적 사고를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부각되었다. 모더니즘은 신과 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성과 과학의 효율적 활용 속에서 진보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사고와 함께 현재의 우리를 정확히 재현하고 때론 표현할 수 없는 숭고까지도 드러내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모더니즘적 사고는 분명 수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와 진보의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자본주의적 사회체계와 결합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끌었다.
2. 하지만 모더니즘적 문화는 발전과 함께 심각한 문제도 같이 발생시켰다. 우선 거론되는 것이 ‘복제(시뮬레이션)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다양한 대상을 손쉽게 복제하였고 기술적 복제는 문화적 복제로 연결되었으며 결국 문화 그 자체를 복제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현대의 시뮬레이션은 이처럼 다른 스펙터클로부터 복제되는 복제를 통해, 원본보다도 훌륭한 저 원본없는 복제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원본의 아우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시각적 효과를 자극하는 ‘스펙터클’의 강조였고 그것을 활용한 미디어의 통제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상품이고 그것이 상품인 한 사고파는 상거래를 통해서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라면 스펙터클은 그것을 통해 모든 사회적 관계를 화폐적인 교환관계로 치환시킨다. (...) 스펙터클은 (...)은 현실사회의 비현실성의 심장이다.”
3.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본주의의 성격 또한 생산에서 소비로 중심축이 전환되었으며 ‘소비의 미덕’을 통하여 대중들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자율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자유와 주권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상품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요된다. 결국 소비와 욕구는 생산력의 조직적인 확대에 다름아니다. 소비는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훈련된다.” 대중들은 더 많은 자유를 소유하고 있고 자율적으로 활동한다고 믿지만 실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통제와 미디어의 조작을 통한 왜곡된 진실 속에서 외부에서 만들어낸 가짜 현실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과 미디어는 이러한 세계를 조작한다. 유명인물에 대한 열광 또한 대중들을 통제하는 중요한 기제로 활용된다. 유명인은 일종의 ‘살아있는 인간의 스펙터클적 표상’인 것이다.
4. 현대적인 모더니즘적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 ‘포스트모던적 시각’이다. 이들은 이성과 진보를 강조한 계몽주의적 접근의 위험성을 제기히였고 거짓된 신호를 통해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모더니즘의 교묘한 작동을 고발한 것이다. ‘소비’의 위험성을 경고하였고, 재현의 한계를 말했으며, ‘표상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진리를 부정하였으며 저자의 죽음을 외쳤고 어떤 중심과 총체성의 허구를 파헤쳤던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사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노동운동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는 중심적 사고는 ‘새로운 사회운동’(여성, 동성애, 환경, 문화 등)의 필요성을 통해 와해되었다. 한 운동이 다른 운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각각의 운동은 동등한 위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는 라클라우와 무페였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등가와 접합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운동에 서로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려 했고, 그것을 통해 각 운동이 갖고 있는 고유성과 차이를 부각시키려 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종속시키는 어떤 특권적인 어떤 중심을 제거하려고 했다.”
4. 중심을 강조한 진보의 개념은 공격받았다. 들뢰즈는 중심이 아닌 네트워크적(리좀) 삶을 강조하였으며 고정되지 않는 유목적 삶의 가치를 제시하였다. 기존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탈주와 횡단을 통한 변화를 새롭게 제기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모든 가치의 영역은 이처럼 탈영토화되고 재영토화하는 반복적인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반복이지만,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반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고 차이의 반복이다.” 변화는 인간의 자율성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의 네그리는 자율성과 다양성을 통한 인간을 억압하는 총체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요구한다. “각각의 접합적 노동자, 사회적 노동자가 자본의 포섭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집합적 주체로 스스로를 새로이 구성해야 하며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작동되는 다양한 분절을 횡단하면서 서로 접속하는 것이고 자본의 가치증식이 아니라 집합적 주체 자신의 가치증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에 의한 노동, 화폐로 변환되는 노동의 외부에서 스스로 노동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노동이기를 그친 노동이다.”
5. 자율과 탈영토의 용어적 신선함은 ‘유목적 삶’이라는 멋진 매력을 전개한다. “유목은 하나의 실험이고 실천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어떤 기계적 관계가 놓여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지식과 정보와 기술을 가치화한다. 문제는 기계 자체나 그것의 소유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용법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생명복제적 실험에서도 부정성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려고 한다. “인간의 복제가능성의 출현은 ‘신성화된 인간중심주의’에 일정한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 인간 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제도에 위협이 되고 있다. 그 균열과 위협은 지배적인 자치관 속에서 바라볼 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겠지만, 오히려 자연-인간-기계의 근본적인 연속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을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렇듯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모더니즘적 관점을 비판하고 그것의 한계 및 부정성을 지적하고 있다.
6.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그들이 말하듯이 모더니즘이 감춰져 있는 신성한 어떤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그걸 보여줄 수 없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건설보다는 현재의 위험성과 문제를 부각시켜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각은 한때 대단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장악했다. 현실은 언제나 비루하고 문제로 가득찬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학술적 힘과 시각은 포스트모던적 시각의 매력을 확장시켰다.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변화는 기존의 것을 파괴한 후에야 드러나는 모호한 세계이다. 어떤 태도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인 실천의 방법은 없다. 원래 철학과 사상은 태도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각자의 선택에 주어지는지 모른다. 포스트모던의 변혁성은 그것의 유행이 끝나자 이상한 방향에서 오히려 힘을 얻었다. 기존의 사회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자는 혁명적 이상은 극우적 행동의 지침으로 채택된 것이다. 과거 독재와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으로 활용되었던 개념들이 이제는 민주적 정부와 질서를 파괴하는 극우적 행동지침의 논거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전광훈의 ‘국민저항권’이라는 개념의 남용은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7.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계몽주의’를 극렬하게 공격한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인 이성, 진보, 과학, 휴머니즘의 약점과 오용과 남용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이성적 세계가 사라진 공간은 감정적 편향과 이기적 욕망이 난무하는 추악한 인간의 감정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변모되고 있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짓밟은 혐오와 공격성이 ‘변혁’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접근은 아이러니하게도 혁명과 변혁의 논리를 제기하면서 세계를 극단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수구적 세계를 지향하는 자들에게 포섭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태도의 문제, 행동의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인지 모른다. 방향을 상실하고 무엇이 인간에게 진정한 가치를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에 대한 고민을 제거한 것이 해방의 형식적 틀에 어떤 내용도 집어넣을 수 있는 괴이한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8. 포스트모던적 개념은 분명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변화의 중요성과 개선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부재한 태도와 행동의 지침에 국한되었다. 결국 그러한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강렬한 추동력을 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향의 수구적 행동에도 똑같은 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파괴와 변혁은 분명 더나은 세계를 향한 창조적 파괴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가치, 이성, 과학적 사실과의 연관 속에서 성찰되지 않는다면 결국 파괴의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계몽주의의 이상은 결코 헛된 망상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 속에서 다시 돌아와 인간의 더나은 삶을 향한 변화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개념인지 모른다.
첫댓글 - '원본의 아우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래 꼭 이랬다!!! 생각이 답답(?)할 때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머뭄보다 떠남이, 모방보다 창조가, 사유보다는 행동이......... '보보스'에 밑줄을 얼마나 많이 치면서 읽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