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의 역사
1. 목판인쇄 과정
목판인쇄를 위해서는 내용을 새기는데 필요한 나무판을 먼저 마련하여야 한다. 그 재료는 다양한데 가래나무를 비롯하여 박달나무·자작나무·후박나무·돌배나무·산벗나무 등 새기는데 결이 좋고 오래 견딜 수 있는 나무들이 쓰였다.
판새김은 먼저 베어낸 나무의 연판처리(鍊板處理)과정을 밟아야 한다. 적당한 크기와 부피로 나무판을 켜서 바다의 짠물에 일정한 기간 담그어 새기기 쉽게 결을 삭이는데, 만일 짠물이 없는 경우는 웅덩이와 같은 민물을 이용한다. 그리고 밀폐된 곳에서 쩌서 진을 빼고 살충한다면 더욱 좋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 뒤틀리거나 뻐개지지 않게 응달에서 충분히 건조시킨다. 그런 다음 목수가 나무판의 양쪽 표면을 대패질하여 반드럽게 하고 또한 양쪽가에 마구리를 붙이는 작업을 한다.
한편, 새기고자하는 판의 크기의 광곽·판심·계선을 갖춘 투식판(套式版)을 마련한 다음, 용지를 찍어내서 글씨 잘 쓰는이로 하여금 저작의 내용을 깨끗이 정서케 한다. 이를 판서본(板書本)이라 하고, 그것을 쓴 이를 판서자(板書者)라 일컫는다.
판서본이 마련되면 한장씩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고 비쳐 보이는 반대글자체의 글자획과 판식을 각수(刻手)가 그대로 새겨낸다. 그런데 이미 간인된 책을 바탕으로 할 경우는 판서본의 준비가 필요치 않다. 그 간인본 한장씩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고 비쳐 보이는 글자획을 그대로 새겨내면 된다. 이를 번각본(번刻本)이라 한다.
이와 같이 책을 판각할 때, 판서본을 새로 마련하든, 이미 간인된 책을 해책하여 번각하든, 그 새김이 다 끝나면 애벌을 찍어 본문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잘못 새김이 있다면 그곳을 도려내고 고쳐 새겨 상감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판각된 것을 목판, 각판, 책판 등으로 일컫고 있다.
책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인쇄용 먹물, 종이, 용구의 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해 온 먹에는 송연묵(松煙墨, 숯먹)과 유연묵(油煙墨, 기름먹)이 있다.
송연묵은 소나무를 태워 만든 그을음과 아교를 녹여 섞어 찧어 만든 것이며, 먹색이 진하고 선명하여 목판인쇄에 주로 사용해 왔다. 유연묵은 각종 기름을 태워 만든 그을음과 아교를 녹여 섞어 찧어 만든 것이며 먹색이 희미하나 걸지 않아 필사용에 좋으며, 또 기름은 번지지 않고 응고력이 좋아 쇠붙이 활자에 아주 적합하다.
인쇄용 먹물은 먹을 분쇄하여 물에 담그어 풀어지게 한 다음 먹물 그릇에 담아 두고 인쇄할 때 술 또는 알콜성 물질을 섞어 사용한다. 술 또는 알콜성 물질을 섞는 것은 먹물이 골고루 침투하면서도 증발이 빨라 번지지 않고 아교의 응결을 촉진시켜 윤기를 내게 하기 위함이다.
종이는 닥으로 만든 저지가 으뜸이었다. 닥껍질을 원료로 하여 먼저 삶고 고아 찧은 다음 표백하여 풀닥을 섞어 치밀한 대발로 떠서 만드는데, 장지와 같은 상품의 질이 되면 두껍게 떠서 풀까지 먹여 다듬이질하므로 반드럽고 빳빳하고 희고 윤이 나며, 사뭇 질겨서 오랜 보존에 능히 견딜 수 있었다. 이를 백추지(白추紙)라 일컬었다.
목판인쇄 용구로는 먹솔 또는 먹비와 말총 또는 긴 모발을 뭉쳐 만든 인체를 비롯하여 밀랍, 먹판 , 먹물그릇 등을 준비한다. 책판에서 찍어내는 방법은 그 판의 글자를 위로 향하도록 판판하게 놓고 먹솔 또는 먹비로 먹물을 균일하게 칠한 다음 종이를 놓고 그 위를 인체에 밀랍 또는 기름을 칠하여 위아래로 고루 가볍게 비벼서 박아낸다.
2. 목판인쇄의 역사
목판인쇄가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 서기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 2층 탑신에서 발견됨으로써 8세기 경에는 우리 나라 목판인쇄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불경(佛經)은 신라 경덕왕 10년(서기751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목판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갖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일본의 최고(最古) 인쇄물은 서기 770년에 찍은 『배만탑다라니 경』이고, 중국의 최고(最古)인쇄물은 서기 868년에 왕개가 찍어낸 『금강반야바라밀경』 으로 현재 영국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되어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인쇄술이 더욱 발달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고려시대 책 가운데 서기 1007년(목종 10년)에 개경(고려왕조의 수도) 총지사(摠持寺) 에서 찍어낸 『보협인다라니경』이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받자 야만족에 대한 문화적인 대응으로 1011∼1031년에 『초조대장경』을 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장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인 『속장경』은 문종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수집한 것을 1091∼1101년에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간행하였다.
『초조대장경』,『속장』을 새긴 목판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다가 서기 1232년(고종 19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불경간행을 위한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6년간에 걸쳐 서기 1248년(고종 35년)에 완성한 것이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다. 경판(經板)이 무려 팔만 개나 되어 팔만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이라고 한다. 이 대장경은 내용과 새김이 정말한 서각 예술품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현재 목판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그 외에도 사찰을 중심오로 경전(經典)이나 고승(高僧)의 시·문집 및 저술의 간행이 성행하면서 목판 인쇄의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목판인쇄물이 그대로 전래되어 판각(板刻)이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사찰보다는 관청에서 목판을 새겨 많은 책을 찍어냈다. 중앙관서에서는 유교경전 등의 책을 찍어냈고, 지방관서에서 책판을 새겨 중앙에 보내면, 중앙관서에는 이 관목으로 책을 찍어냈다.
조선초기에는 왕실 불교의 성행과 불교경전의 간행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세조(1455∼1468)때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불교 경전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글과 한문으로 간행하였다.
서원(書院)에서도 강의용(강의용)의 책을 찍어냈다. 개인도 책판을 새겨 조상의 문집 등을 찍어냈다. 16세기부터는 민간에서 상업용 목적으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하였다. 목판 인쇄는 간행 량에 제한을 받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인쇄가 가능하므로 조선시대 말까지 매우 성행하였다.
1. 활판인쇄의 기원
목판인쇄는 나무를 베어서 오랜 시일에 걸쳐 연판과정을 밟는 한편, 판서본을 마련하여 붙이고 글자 하나하나를 정성껏 새겨내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걸리면서도 오직 한 문헌의 출판으로 국한되는 것이 큰 폐단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궁리해낸 것이 활자인쇄였다. 한벌의 활자를 만들어 놓는다면 오래 잘 간직하면서 필요한 책을 수시로 손쉽게 찍어 이용할 수 있어 출판비용과 시간이 아주 경제적인 인쇄방법이었다.
활자인쇄에 대한 최초의 창안시도는 북송의 11세기 전기에 필승(畢昇)이란 평민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교니활자(膠泥活字)라는 찰흙으로 만든 활자의 인쇄였기 때문에 내구성이 없어 자주 일그러지고 또 접착성물질의 응고력이 약하여 인쇄도중 활자가 자주 떨어지거나 동요가 생겨 실용화되지 못했지만, 활자인쇄의 이로운 점을 일깨워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활자인쇄의 이로운 점이 그뒤 목활자와 금속활자 인쇄에서 고안 발전되었는데, 그 중 금속활자인쇄는 바로 고려에서 우리 조상들의 창안에 의해 보급 발전되었다. 이렇듯 활자인쇄는 찰흙활자, 나무활자, 금속활자 등이 다양하게 만들어져 보급되면서 발달하였는데, 그 중 주종을 이룬 것이 금속활자인쇄이고 그 다음이 목활자인쇄이다.
2. 활판인쇄의 역사
금속활자 인쇄는 서기 120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나, 기록만 전할 뿐 활자로 찍은 책이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기 1377년(고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우왕 3년)에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상·하로 찍어 것으로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하권 1책이 소장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 ; 1397∼1468) 에 의해 1450년경부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첫번째로 활자를 부어낸 것이 1403년이다.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계미자(癸未字)라 일컫는데, 고려의 흥덕사 글자보다는 그 기술이 나은 편이나 아직도 치졸한 편이다. 세종이 즉위하여 1420년에 부어낸 경자자(庚子字)에서 주조와 조판술이 크게 개량되었고, 1434년에 세번째로 개주한 갑인자(甲寅字)에 이르러 그 인쇄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세종은 천문기기를 제작하는 일류기술자를 총동원하여 크고 작은 활자를 한결같이 꼭 같게, 그리고 활자의 네모를 사뭇 평정하게 만들고 인판틀도 완고하면서도 정교하게 만들어 완전 조립식으로 판을 짜서 인쇄하였다. 하루의 인쇄량도 경자자의 배인 40여지를 찍어낼 수 있었다. 금속활자인쇄의 우아정교도가 여기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 때 한글활자가 아울러 만들어져 국한문본의 인쇄에 이용되었다.
세종조에서 고도로 발달한 활자인쇄술은 그 뒤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더욱 발전하면서 숱한 종류의 활자를 다양하게 생산하여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활자인쇄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게 하였다.
이러한 활자 인쇄는 주로 중앙정부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활자의 이름도 대 부분 제작 년도의 간지(干支)를 따서 붙였다. 그 외에도 활자를 만드는 관청, 글자의 모양(字體), 혹은 글자(字本)를 쓴 사람의 이름, 그 용도 등에 따라서 붙이기도 했다. 서원과 민간에서도 나무활자를 만들어 시문집, 족보 등을 찍어냈고, 사찰에서도 불경을 찍어냈다.
한편 한자 외에 한글을 나무와 금속 등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세종대왕이 1447년에 동으로 한글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월인 천강지곡』 이며, 이것이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이다. 조선시대 한글 활자는 약 30여종이 만들었다. 한글활자는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한문과 함께 썼다.
출처: http://user.chollian.net
*사진이 뜨지않아서 파일첨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