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 이해-33. 영국의 시대
18세기가 저물어가면서 인도역사의 다음 시기는 영국에 의해서 펼쳐졌다.
세기가 바뀔 무렵 영국의 지배는 뱅갈과 마드라스, 봄베이의 영국령에서 더욱 견고해졌다.
그 다음 50년 동안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북쪽과 중앙, 북서부지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전 지역에 걸쳐 인도의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던 크고 작은 주들은 과거의 유물로 남겨졌다.
그런 지역들마다 최고의 권력(Paramount Power)을 대표하는 영국의 총독대리가 임명되었다.
1800년에 영국의 지배는 동인도회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상업조직이었으나 영국왕실에 승인되어 20년마다 갱신되는 합병된 회사로 남아있었다.
이때는 또한 영국과 미국, 다른 서구에서 현대 선교 운동이 시작된 세기의 전환점이었다.
이 선교운동은 잉글랜드국교회에서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결실들 가운데 하나였다.
영국의 경쟁 상대였던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제 18세기의 마지막 10년과 19세기 초의 20년 동안에 침례교선교회, 런던선교회, 성공회선교회, 웨슬리감리교선교회 등 많은 선교회가 선교의 신선한 자극을 주게 되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최초의 선교회는 미국 회중교회 선교부(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였다.
이 운동은 개신교의 모든 주요 교파들 가운데 확산되었으며 선교를 위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인도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고착되던 시기에 조직된 선교회들이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도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각 나라의 깃발 아래 이루어졌다.
트랑케바르에서는 덴마크의 깃발 아래, 18세기와 위대한 선교의 폭발이 이루어진 19세기 영국 선교의 거점들에서는 영국의 깃발 아래 선교가 이루어졌다.
선교의 팽창이 시작되기 위해서 그 전에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은 동인도회사의 정책이었다.
남인도에서 동인도회사는 독일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했다.
많은 수의 독일 선교사들이 그 회사의 상선에 무료로 승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겐발크에게 트랑케바르의 덴마크 당국자들보다 마드라스의 영국 당국자들이 협조적이었다.
동인도회사 당국자들은 슈바르츠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뱅갈에서도 스웨덴 선교사인 키에르난데르가 1758년 캘커타로 이동했을 때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인도의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선교사에 대해 완고해졌다.
이는 1793년 런던의 동인도회사 헌장 갱신을 위한 의회의 토론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복음주의적 사회개혁가인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제안은 격한 반대를 일으켰다.
그것은 동인도회사는 인도 국민들의 영적인 복지를 증진시킬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며, 학교 교사와 목회자들이 그들 가운데서 일할 수 있도록 파송되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인도에서의 몇 가지 사역들을 후원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였지만, 대규모의 선교사역을 준비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인도인들의 신앙에 관여하려는 이 시도는 그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영국의 지배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논쟁이 과열되며 지금까지 동인도회사의 호의는 사라져버렸고 윌버포스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는 영국과 인도 모두에서 선교사들의 출입까지도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이후 20년 동안 유지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인도회사의 영역안에서 허가 없이 유럽인들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강한 확신을 가진 이들로 인해 인도인을 향한 선교 정책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다음 헌장을 개정할 때 동인도회사는 어느 정도 이를 허용해야만 하게 되었다.
시릴 퍼스의 <인도교회사>에서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