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의 위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근본사상을 근거로 하여, 인간과 자연은 모두 이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과 인간에게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가르쳐 준 창세기 1장 20-28절에 대한 바른 해석문제를 요구한다. 생태계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성경본문에 대한 재해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인간의 지배권과 관련된 두 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불가피하다.
첫 번째 본문은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다스리다”(radah)는 구약에서 사람, 지역, 민족, 힘, 생물 등을 “주관하다,” “관리하다,” “다스린다” 등으로 25회 등장한다.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고대 왕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사람들의 안녕과 번영에 대해 인격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피조물들을 “경작하며 지키라”(창 2:15)고 한 최종명령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경작하다”(abad)는 “섬기며 일한다”는 의미로(289회, 동사), “주인을 섬기는 종이나 봉사자”의 뜻으로(799회, 명사)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섬기며 봉사하는 존재로 세우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것이 동시에 섬기는 것을 내포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영어 minister가 장관과 목회자를 모두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도 이런 맥락을 반영한 것이다.
재고해야 할 두 번째 본문은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구절이다. 과연 히브리어 “정복하라”(kabash)가 파괴하고 짓밟아도 좋다는 군사적 의미로 이해되고, 생태계 파괴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해석이 있다. 우선 노르만 하벨(Norman Habel)에 따르면, “정복하라”는 뜻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에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증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잔인한 통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정복하라는 명령은 상대를 부숴버리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을 “유연하게 설명할 방도”는 없다. 또한 그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고 하는 본문(시 8:5-6)이 문자적으로 볼 때 성경을 친환경적으로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문맥적으로 볼 때 땅을 충만하게 하고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해석도 있다. 그래야만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2:15) 하나님의 뜻과 잘 조화되기 때문이다.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이런 청지기 개념은 “이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에서 나온 “필연적 관심”이며 결과다. 인간은 결코 땅의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성경에서 읽히는 이런 청지기직 사상은 “환경문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이다.
성경의 교훈을 이해할 때는 어떤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어떤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특정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본 정신을 먼저 읽어내고, 그것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조화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은 자연에 대한 창조신앙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접근 가능하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온 우주의 화해, 곧 구원의 사건은 이러한 창조신앙을 더욱 자리매김해주는 복음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죄 용서, 마음의 평화를 넘어서서 온 우주의 평화, 자연과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26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