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농아인을 잘 만나지 못하는 건 그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일반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에 만난 한국수화방송국의 염동문 국장은 장애인들 역시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 주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어울려 산다는 건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일반인들이 노력하는 게 농아인들이 애쓰는 것보다는 훨씬 쉬울 것이다. 이번 ‘좋은세상 기획’에서는 농아인과 진정으로 친구가 되기 위해 작지만 소중한 실천을 쌓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농아인의 친구들’ 모으는 백경천 목사
백경천 목사는 작년 이맘때쯤 만난 윤병학(36·경기도 일산시) 씨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병학 씨를 만나서 평생 할 일을 찾았다며 고마워했다. 일산에 호수교회를 세우기 전 서울 이문동의 한 교회에서 독거노인 등에게 쌀을 나눠주는 일을 하던 그가 이곳에서도 그 일을 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의뢰해 소개받은 사람이 바로 병학 씨의 어머니였다.
직접 찾아가 만난 두 모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비닐하우스로 적당히 지은 컴컴한 방안에서 칠순 노모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0대 청년 병학 씨는 친척집 일을 도와주며 근근히 생활하고 있었다.
백 목사는 그렇게 만난 병학 씨의 모습이 낮이고 밤이고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농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과 격리된 그를 어떻게든 사람들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몇몇 지인들과 이미 일산에서 ‘장애인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꾸리고 있던 장함교회 안기성 목사의 도움을 받아 작년 10월 ‘농아인의 친구들’(deafriend.pe.kr)이라는 모임을 꾸렸다.
“저희는 농아인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지는 않아요. 특히 물질적인 도움은 거의 없어요. 대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되듯 농아인과 일반인이 만나 자연스레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만듭니다. 사실 그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현재 병학 씨를 포함한 농아인 10여 명과 친구들(일반인) 20여 명은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리고 매달 한번씩은 꼭 공동식사를 한다. 이 모임에는 편견 없이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엄마들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일상에서도 틈틈이 만나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다.
작년 12월에는 ‘사랑의 음악회’를 열어 농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수화 어린이집의 설립 비용을 지원했고, 지난달에는 시각장애인과 농아인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했다. 처음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곧 즐거움으로 바뀌었고 모두들 다음날 병이 날 만큼 공도 차고 뜀박질도 했단다. 병학 씨도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을 차보았다고 한다.
백 목사는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좀더 많은 사람들이 농아인의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안에 숨어 있는 농아인들이 세상과 만나는 기회가 더 많아질 때 우리 사회가 좋은 세상으로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랑의 수화통역사 황민정 씨
벌써 10여 년째 수화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는 황민정(32) 씨에게도 수화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20대 초반, 길에서 농아인이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사람이 수화를 몰라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취미 삼아 시작한 수화는 그러나 곧 그의 생활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고 IMF를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인 수화통역사의 길로 들어섰다.
“제 스스로 농아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수화를 배우고 농아인들을 만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건 정상인이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었어요.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기보다는 내가 좀더 나으니 ‘봉사’한다는 개념이 강했던 거죠.”
현재 대구 YMCA ‘소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는 그는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하는 것은 물론, 농아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대가 없는 수화통역에 나선다.
‘농아인의 친구’로 그가 바라는 것은 관공서나 커다란 빌딩 등에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것. 현재 대부분의 농아인은 동사무소에서 필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만약 수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농아인들의 관공서 나들이는 훨씬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수화를 배우는 황지영 어린이
앞서 소개한 이들과 비교하면 시화 냉정초등학교 6학년 황지영 어린이는 이제 조금씩 수화를 통해 장애인 사랑에 눈뜨고 있는 중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수화를 처음 접해보았다는 지영이 어린이는 학교에서 실시한 극기훈련에서 기초적인 수화를 배운 이후 담임 선생님에게 수화노래를 배우면서 수화와 장애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수화방송국의 동영상과 책을 통해 틈틈이 혼자 수화를 익히고 있다. 수화를 배운 이후 장애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 지영이 어린이의 장래희망은 간호사. 그냥 작은 소아과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싶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장애인 친구도 꼭 사귀어 보고 싶다고.
이번에 만난 이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농아인을 비롯한 장애인들에게는 ‘봉사자’가 아니라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결 같은 바람은 서로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