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 꽃늪에 서생원 경덕이 스스로 도를 통했다며 속세 일과 멀리하며 지내고 있었다. 진이는 은근히 화담의 학문보다도 진실한 인간을 만나려고 늦가을 오후에 혼자 화담의 집을 찾았다. 이때 화담의 나이는 쉰한 살, 수수한 차림에 표정이 온화하여 관후한 촌늙은이로 보였지만 말투가 침착했고 준수한 행동거지에는 은근한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진이는 자신이 불쑥 찾아온 구실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천한 기생 신분으로 외람되오나 옛 글을 읽으며 품었던 의문을 배우고자 왔다고 했다. 서경덕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데 남녀의 구별이 없고 귀천의 구분이 없다며 진이가 묻는 대로 알기 쉽게 대답해주었다. 두 사람은 저녁도 먹지 않고 묻고 답을 하다가 밤이 깊은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단칸방에 이부자리라고는 한 채뿐이었다. 서경덕은 아랫목에 이불과 베개를 놓고 진이더러 누우라 하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자기 몫으로 요와 목침을 놓았다.
어느덧 밤은 야반삼경을 넘어섰다. 산에서 불어내리는 마가을의 한산한 밤바람이 우수수 가랑잎을 몰고 골 밖으로 빠져나갔다. 멀리 귀법사 사당촌 쪽에서 첫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이는 모로 누워서 얼굴을 가리운 손가락 틈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경덕을 훔쳐보았다. 그가 지촉불 밑에 들고 있는 책은 『주역』의 뒷부분인 ‘역전편’인 모양인데 책을 읽으며 률동적으로 흥겹게 몸을 앞뒤로 움직이는 것은 그의 버릇인 듯하고 잔뜩 찌프린 눈썹 밑에 생각에 잠긴 눈을 들어 이따금 천정을 쳐다보는 것은 책 내용에 심취되여 그 여운을 머리속에서 곱씹어보는 감동적인 고뇌의 빛인 듯했다.
깊은 밤, 깊은 산, 깊은 골, 외딴집, 단칸방에 남녀 단 두 사람이 갇혀 있으니 진이조차 어딘가 마음이 야릇해지는데 경덕은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었다. 50이면 로년이라고 하더라도 사내의 그 나이가 녀색에 무관할 때는 아니다. 그런데 꽃 같은 젊은 녀인을 한 방에, 그것도 자기 곁에 나란히 누우라고 권하면서 저리도 태연할 수가 있을가. 얼마쯤 있노라니 그도 주섬주섬 책을 거두고 불을 끈 다음 조심스럽게 진이 옆 자기 자리에 와서 누웠다.
진이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한 번의 유혹으로 그의 허울을 벗겨낼 수 있을 것인지. 그는 어둠속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