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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주일 예배
본문; <마>18;15~17
제목; 죄와 권세
오늘은 가정의 달 두 번째로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느 에세이 작가의 자기 고백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제목이 좀 리얼한데...‘나는 도둑년이었다’입니다
그녀가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인
어린 시절에 무척이나 갖고 싶었던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아빠나 엄마에게 졸라도 그 물건을 사 주지를 않아
어느 날 몰래
아빠의 주머니를 뒤져 그 물건을 샀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빠 주머니를
몰래 뒤진 것을
들킬까봐 겁을 내며 전전긍긍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모르는 것같기에
시치미 떼고 평소처럼 착한 딸로 위장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욕심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 번에는 엄마의 가방을 뒤져 몰래 돈을 꺼내 그것을 샀는데
이 역시도
엄마는 모르고 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대범해진 그녀는 어느 날 그 동네 가게를 갔는데
평소에 친절하고
또 자기 부모와 친한 그 가게 주인의 눈을 피해
먹고 싶은 것을 슬쩍 했는데 주인 아주머니도 역시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훔칠 때는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그 짓을 했는데
횟수가 거듭될수록 담대함 마저 생기고 양심의 가책도 없어지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의식도 없이 자주 아빠 엄마의 주머니나 가방을 뒤지고
그 가게에서 물건도 훔치고
이런 일이 습관이 되던 어느 날 어머니가 부르더랍니다
따라갔더니 한 공원의 벤치였는데 그 공원의 벤치는 공교롭게도
앞에는 자기 집으로 가는 곳이고
뒤로는 경찰서 간판이 보이는 그런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와 벤치에 앉았는데 엄마가
아주 슬픈 얼굴로
나는 네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단다
그러니까 묻겠는데 네가 그 잘못을 고백하면 집으로 갈 것이고
아니면 네 등 뒤에 있는
저 경찰서로 갈 것이니 잘 생각하고 묻는 말에 답을 해라 하시더랍니다
그리고 엄마가 묻기를 너 내 가방과 아빠 주머니를 뒤졌지...
그것도 몇 번이나 라고 묻는
그 질문에는 엄마는 이미 알고 묻는 느낌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또 가게에서는 왜 물건을 훔쳤니..라고 물을 때에는
그만 자지러졌답니다
엄마는 다 알고 묻는데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며 다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 엄마는
자신을 않아 주시면서 내가 다 알고 있었는데
네가 뉘우치고 반성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었는데
이제는 가게에 가서
물건까지 훔치더구나..그래서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물었는데
네가 솔직히 대답해 주어 고맙다 하시면서
그 가게로 데리고 갔고
네가 훔친 물건을 다 들고 나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엄마는 그 가게 주인에게
당신 딸이 끼친 손해를 포함 오늘 것까지를 계산해 주고는
그 가게 주인에게는
다 알면서 잘 참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그 아주머니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사과했더니
그 아주머니도 자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잘 왔고 네 잘못을 빌었으니 용서해 주마하시면서
용서를 빈 보상으로
그날 산 과자보다 더 많은 과자를 선물로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후 지금은 그녀는 40여세가 되었고 그 어머니는 70을
훌쩍 넘으셨는데
그 때까지 한 번도 남을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로
남을 속이 거나 하는 일 없이
참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나름 노력했다는 그 글을 읽고는
잔잔함 감동과 함께 오늘 제목과 맞아 떨어지기에
여러분에게도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방금 소개해 드린 이 에세이 안에는
회개와 용서, 사랑과 구원과 죄 사함을 받은 이후의 자유와
변화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녀의 어머니는 교회로 적용이 되고
그 가게 주인은
작은 예수님으로 적용이 됩니다
또 여러분 그녀의 눈물 섞인 고백은 회개에 해당되고
그 이후의 삶은
회개에 합당한 변화의 열매로 적용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회개한 죄인이게는 더 큰 상급이
보상이
축복으로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이에게 더 많은 과자를 그의 품에 안겨 주신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예시문에서 많은 것을 교훈으로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100% 죄인입니다...
세상에서 지은 죄는
법의 심판으로 교도소에 가서 그 죄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고
영과 마음으로 지은 죄는 교회에 나와 치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내가 지은 죄가 다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른 찬송의 가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일도
큰 죄악에서 건지신 것도
이제껏 내가 산 것도 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라 고백합니다//
결국은 죄의 문제는 주님의 은혜요
죄를 용서하시고
죄 씻음을 허락한 것도 보혈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충 넘어가니 죄 지은 자가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치고
윤리와 도덕과 인성은 땅에 떨어진 그런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1;18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여러분 죄의 변론은 회개이고
이 회개를 받으시고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반성도 없고 성찰도 없으며 회개도 안하며
죄도 생각나지 않고
그 죄에 대해 무디어져 있습니까? 양심에 화인 맞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개로 돌이키면 구원과 영생 천국이 기다리고 에덴이 회복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지옥과 함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무조건
율법의 잣대로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참아 주고 그 가게 주인 아주머니처럼
용서하고 받아 주라는 것..이것이 복음입니다
좌 사함의 권세는
예수님께 있고 그 권세를 유임 받은 기관이 교회입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집행 유예 기간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멍에로 죄의식 속에 빠져 살지 말고
십자가의 구속과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상에서 하신 이 말씀
눅23:34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러분..이 말씀을 기억하며 나에게 해악을 끼치는 그 누군가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 맘에 안 드는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자녀를 골육치친과 내 이웃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를 할 줄 알아야
예수님 사랑을 알게 되고 십자가 사랑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예수님으로 하는 공동체의 모임이 곧 교회입니다
주의 성전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예배하는 곳이
건물로, 성전으로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기뻐받으시는 신앙 공동체인데
그곳에 주님은
권고를 잘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15절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여러분 권고는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완곡한 어조로
권면하며 사랑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형제의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권고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죄를 모른 체하고 죄에 대해 권고하지 아니하면 죄가 자라게 됩니다.
여러분 악이 자라면 죄가 되고 오만해지기까지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복을 받고 싶으면 악인의 꾀를 버리고
죄인의 길에 서 있지도 말고 오만한 자리의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권고는 죄를 정죄함이 아니라 죄에 대해 깨닫게 하고고
돌이키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요즈음은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은
교회의 기능은 살아 있습니다
교회가 권고하는 권세를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사명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요즘에는 교회에서 설교 중에 죄를 지적하며 말하면
나를 공격한다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죄를 공격한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이런 죄의 찔림이 싫어서
교회를 떠나니
목사는 그 성도들을 붙잡기 위해 타협한 것이
죄는 말하지 않고 축복만 해 줍니다..그러나 여러분
죄는 지적하지 않고
축복만 말하니 믿음도 사라지고 신앙의 절개도 무너지고
영성은 땅에 떨어지고 묵은 닭들만 대거 양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권세를 잃어버린 사회는
부패하게 돼 있으며 죄를 권고하지 못하는 교회는
기복에 휘둘림으로 건강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목자인 예수님께 붙들려 있게 하려면
말씀으로 잘 가르치며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하는데
그 중심이
죄를 지적하여 잘 못을 되돌리게 하는 권세입니다
말씀에 붙들리면 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가르쳐야 합니다.
회개를 잘 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심 삼일을
안하는 것보다 작심삼일을 자주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자꾸만 작심심일 하다보면 본인도 양심의 찔림을 받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내가 내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들리고
드린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분이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가 더 크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공개된 죄에 대해서 교회는 권고를 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여 깨닫게 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권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책무중 하나입니다.
권고는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권고하지 않는 것은
죄를 방치하는 것이요
그리고 권고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지옥에 가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권고는 죄를 노출시키고 회개하게 하려는 것이지
죄를 지적하여 상처를 주거나 정죄하려 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상담해야 합니다.
뒤에서 하면
구설수요 유언비어요 가짜 뉴스가 될 수 있습니다.
뒤에서 하면 뒷담화요 험담이요 흉보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권고는
그 사람을 품고 사랑할 자신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 에세이를 쓴 그녀의 어머니가 매로 다스렸다면
반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주는 지혜와 사랑으로 잘 참고 기다렸다가
좋은 말로 완곡하게 지적하고 그 죄를 다스려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권세입니다
예수님 권세..내 권세라는 말은 내가 그 권세를 위임 받았다는 말이지
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나에게 죄를 묻고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면 그가 이단입니다
사랑 없이 하게 되면 정죄요 비판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형제를 얻는 다는 것은
형제의 죄를 고백으로 받아 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권면했을 때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열정이 너무 지나쳐
정죄를 함으로
비판하게 되는 실수로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권면도, 상담도,
그와 상대하여
1;1로 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말을 안 듣고 고쳐질 기미가 전혀 없습니까?
성경은 이를 두고
2~3의 증인의 권고로 조금씩 늘려야 한다고 증거 합니다.
16절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오픈은 1;1로 하는 것보다 공동체 앞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권고는 중보와 함께 사랑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사람은
공동체를 말하기도 하고 교회에 덕망 있는 직분자를 말합니다.
또 성경은 말합니다. 두 세 사람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라 합니다.
확증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말하며
사건의 공정성을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헛된 소문이 나가는 것을 막게 됩니다.
그래야만 가짜 뉴스를 막고
괴담이 흘러 나가는 것을 막게 됩니다.
참으로 SNS나 트윗이 발달한 요즘 시대에
익명을 요구한
인터넷상의 막말 풍조를 감안한 지혜임을 알게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격 좋고 성품이 좋다거나
사람이 너무 좋아 법 없이도 살만하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 안합니다.
자기 ‘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가 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에 대해 말하려면 건성으로 흘려듣거나 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더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법 없이도 살만한 성격이라고요..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법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소견대로 고집대로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 중에 무법자가 오히려 더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 다닌다고 핍박하는 내 옆 사람보다
교회를 다니는 것도 좋고 종교를 갖는 것도
다 좋게 생각하는
내 옆 사람이 더 복음이 심겨지기가 힘들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핍박하는 그 사람에게 복음이 심겨지기가
훨씬 쉽다는 말입니다.
법 없이도 살만큼 성품이 좋은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이방인입니다.
죄에 대해 방관자요
죄를 합리화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 집니다.
죄에 대한 자기 합리화는
적용이 안 된
[내가 복음]으로 흐르게 됩니다.
본질이 들리지 않음으로 비본질인 것에 자랑하게 되고
가식에 놓여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참은 하나님 편이고
거짓말은 하나님의 반대입니다.
내가 내 뜻대로 대충하게 되면 의인인척 가면을 쓰게 되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가장 큰 배신은 거짓말을 하며 비밀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안하는 게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러한 자를 방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실한 증거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해야 합니다.
17절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공개적으로 말해서 판단하게 해야 하는 데
이 말은 세상에 말하여 소문내라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처럼 여기고
듣지 않거든 세리 이방인으로 여기라 합니다.
어떤 종교 단체가 교회에 말하라고 하는 오늘 본문을 따라 만든 제도가
고해성사인데
이 역시 사제도 사람인지라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가 성도의 고해성사를 듣고
약점으로 삼아
못된 짓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개신교 목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참으로 조심하며 다루어야 할 것이 바로 개인이나 다수의 앞에서 고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시는 주님은 오늘 17절 본문에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뿐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요12:47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그렇습니다...예수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세상을, 또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러 오신 것처럼
우리네 십자가 여정도 오직 구원이 초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영혼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잃은 양도 잃어버린 드라크마도
아직 안 돌아온 탕자도
교회 안에 있는 탕자의 형도 많기 때문입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경험되지 않고서는
도무지 말씀이 들려지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는 회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에
평강이 찾아오고 안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회개를 아니 하면 안식이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 죄를 보지 못하면 안식이 없습니다.
교회의 권고에
순종으로 복종하지 아니하면 교회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수없이 오픈하면서도 끊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속을 끊으라는 말은
세상에는 살되 세속에는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하면서 내 안의 죄의 문제를 끊어 내겠다고
반복하지만
여전히 지금 끊어내지 못하는 것은
그 만큼 집착하고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구원과 영생 천국의 축복을 비교하여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이 달린 문제이고 우리는 결단코 지옥문 앞에
서 있어서는 안 되고
지금 그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회개로 돌이켜
주님 손부여 잡고 천국을 향해 할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