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意識)
선(禪)은 논리를 초월한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부정한다. 그리고 다음단계는 의식의 통제이다. 선이란 논리가 중심이 되는 의식의 존재를 쉬게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의식의 바탕으로 삶을 지탱한다. ‘나’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뇌한다.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현대적 풀이는 자아에서 의식이 피어나고, 의식에서 생각이 떠오름을 뜻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산상수훈)
수행이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생각의 끝이 마음이라면 어찌 보면 마음은 생각의 잔류현상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상태,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의식의 통제를 말하며 내가 가지는 욕망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된다. 성경의 구절이나 불경의 법문이나 성인들의 말씀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육신이 가진 식색(食色)의 동물적 본능인 자발적 욕망과 그것을 즐기려는 쾌락적인 ‘나’를 단순히 긍정하는 대신에, 선(禪)수행자는 ‘나’와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의식의 작용’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기 위하여 원대하고도 지난한 작업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번은 흑씨범지(黑氏梵志)가 부처님을 찾아뵈었다. 그는 두 손에 뿌리째 뽑힌 활짝 꽃이 핀 오동나무를 한 그루씩 들고 있었다. 흑씨범지는 수행을 통하여 이미 오신통(五神通)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놓아라.”
흑씨범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꽃을 땅에 놓았다.
부처님은 또 “놓아라.”라고 하셨다.
흑씨범지는 이번에는 왼손에 들고 있던 꽃을 놓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또 “놓아라.”라고 하셨다.
어리둥절한 흑씨범지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사온데 무엇을 또 놓으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인(仙人)아, 내가 놓으라고 한 것은 그대의 손에 들려 있는 꽃을 놓으라고 함이 아니다.
그대가 안으로 육근(六根)을 놓고,
밖으로 육진(六塵)을 놓으며,
중간에 육식(六識)을 놓아
가히 놓을 게 없는 데 이르게 되면
그때가 그대가 생사(生死)에서 벗어나는 때이니라.”
부처께서 ‘놓아라하는 것’은 물질이나 육신의 욕망이 아닌 욕망의 근원인 의식(意識)을 내려놓는 것을 말함이다.
그럼 의식이란 무엇일까? 다른 동물들에게는 의식이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결국 두뇌의 작용과 의식의 흐름에 대한 고찰만이 우리의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인간은 지구에서 털 없는 원숭이로 20만 년을 살아오면서 지구를 정복한 유일한 존재다. 인간이 중심인 인본주의가 아닌 자연주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지구의 무자비한 정복자일 뿐이다. 그럼 인간의 어디에서 그런 능력이 나타났을까? 그 비결은 생각하는 능력인 의식(意識)에 있다.
생명의 시작은 물질의 구성과 마찬가지로 원자와 원자의 결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물질은 의식이 없지만 생명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의식에 대한 과학적 소견은 세포에서 시작된다. 세포분자가 점점 복잡한 구조를 획득함에 따라 외부 자극에 점점 능률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따라서 복잡성이 점점 증대되면서 경우에 따라 의식과 다르지 않은 신경계통에 도달하기도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 의식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물질은 물질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듯이 의식은 의식적인 것에서부터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에 이어서 17세기 고전주의 철학자들이 똑같이 주장한 견해다. 그들 중 데카르트는 “오직 원인 안에 있는 것만이 결과 안에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의식이 무생물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다. ‘현재 의식의 순간’은 ‘과거 의식의 순간’에 의해 가동된 것으로서 나아가 ‘미래 의식의 순간’을 가동시킨다. 현실의 세계에 진정한 시간적 시초가 없는 것처럼 의식 역시도 시간적 시초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수태의 순간에 그 새로운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은 의식의 불꽃은 매우 원시적이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원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의식적인 사건만을 원인으로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과학에서는 상당히 유효하고 주목할 만한 실험과 관찰을 근거로 이를 반박하였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자크 모노드(Jacques Monod)는 자신의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생물은 물질에서 생겼으며 의식은 생물에서 생겼다.
그러므로 물질로부터 생명체가 탄생한 후 종(種)의 진화를 거쳐 차차 의식과 언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라며 의식의 근원이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하여 시작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현대과학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식이다.
현대물리학의 불확정성원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인 세포를 분할해 나갈 때 분자와 원자는 분명히 입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물질의 최종 입자인 원자나 미립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장임을 현대물리학은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생물과 무생물의 구조 현상인 동일원소가 같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의식의 발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의식의 존재는 성질상 물리적 과학의 탐구 양식에서 벗어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유치한 논쟁과 같아진다. 결국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증명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 해답이다.
데카르트의 망언
동물에게 심리현상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것을 부정한 사람은 오직 데카르트뿐이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두뇌 속에 해마가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의식의 존재를 밝히는 듯 했다. 하지만 동물에게도 해마가 있다는 사실에 학계의 당황함은 끝이 났다. 오늘날에는 동물심리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그래서 동물에게도 해마가 있듯이 동물에게도 의식이 존재하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원시적인 형태의 생명체나 동물에 관해서라면 자의식이 문제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성적 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은 현재의 본능적 상황 외에는 자의식이 없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결과에 대하여 전혀 자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직 인간만이 지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어째서일까? 이는 동물의 지각이 뇌의 크기에 비례하여 발달하기 때문이며, 인간의 지각의식은 직립보행으로 인한 손의 활용도 때문이다.
불의 발견과 함께 손으로 연장을 만들면서부터 먹을거리는 풍요해졌다. 인간의 잡식성은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고 특히 육식의 포만감은 결과적으로 두뇌의 크기와 용량을 증폭시켰음을 인류학자들은 밝혀내고 있다.
한편 서양의 다수 신경학자들은 의식이나 정신을 두뇌조직과는 분리된 요소로 간주했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은 ‘두뇌의 신경세포망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과 전기현상 및 신경세포망의 구조와 기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생각과 의식’은 신경뇌수체계에 덧붙여진 일종의 미광(微光)으로, 인간은 물리, 화학, 생물학적인 반응의 총체로서 의식은 이러한 과정들의 반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 이후 현대과학과 신경생리학은 훨씬 더 명확하게 발전되어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의 총체로 구성되는 ‘신경세포로서의 인간’이라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정신현상은 다름 아닌 그러한 메커니즘 자체이며 기껏해야 그 총체에 참가할 뿐, 그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이처럼 보통 의식은 어떤 대상의 지각과 결부되어 있고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 의식은 우리 가까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의식의 대상 -견물생심에 의해 규정될 때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육체와 의식의 관계에서는 한발 물러나 교(敎)와 선(禪)으로 분리하면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이론은 이론으로 정립하고 선(禪)은 ‘선의 체험’으로 확립하고 ‘응당 머무름 없이 내는 마음’을 수행의 이정표로 삼는다.
-계속-
한 국 선 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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