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작가론 2012년 학보특강입니다.
<역사소설로 본 이광수와 김동인>
역사소설로 본 이광수와 김동인
이상진(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교수)
1. 영원한 라이벌, 춘원과 동인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었던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은
열다섯 살에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스무 살에 이미 〈창조〉를 창간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유한 환경과 타고난 재능, 예술에 대한 남다른 생각으로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계몽적 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었던 그는 이광수와 더불어
우리 근대 소설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작가이다.
문학의 사회적 의미를 중시했던 이광수는 문학작품 창작을
여기(餘技)로 여기고, 민족의 개조와 계몽에 앞장섰으며 마침내는 친일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김동인은 철저히 예술로서의 문학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생각을 작품 창작뿐 아니라 동인지 창간 등의 문학 활동으로 풀어 나갔다.
『춘원 연구』에는 이광수에 대한 김동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이광수의 작품에 대해 냉정한 분석과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저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이며, 그 당시 계몽 문학에
가장 반대하던 입장에서 이루어진 비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적 의미를 갖는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무정』과 『재생』, 『흙』 등 여러 작품을 분석했는데,
특히 『단종 애사』는 역사적인 사실의 재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런 평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단종 애사』에 대해서는
『대수양』을, 이광수의 또 다른 역사 소설 『마의 태자』에 대해서는
『견훤』을 창작하여 비판 의식을 작품화하였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더라도 역사와 문학적 상상력의 결합에 따라 작품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 했으며, 이 점에서 『대수양』은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수양은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세력을 몰아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계유정난’을 수양을 중심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즉, 수양의 영웅으로 보고, 그의 행위를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어린 단종의 일대기를 연민을 가지고 서술한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대립되고 있어, 그의 역사의식과 문학적 관점을
춘원과 비교하며 읽을 수 있게 한다.
2. 『대수양』과 『단종 애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 시대의 왕들을 차례로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 하고 외워 댄다.
첫 글자만 따서 간명하게 순서를 외우지만 사실 그 속에는 왕권 다툼으로 얼룩진 비극적인 역사가 숨어 있다.
『대수양』과 『단종 애사』의 내용은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이요,
한글 창제 등 훌륭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에서 출발한다.
세종문종단종세조에 이르는 비극적인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계보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수양 대군(진평 대군)
안평 대군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고, 문종은 맏아들로서 장차 왕위를 이어갈 동궁(東宮, 왕세자)이었다
병약하고 섬세했던 문종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고,
뒤를 이어 단종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였다.
병약한 왕을 이어 어린 왕이 등극하자 조정은 시끄럽기만 했는데,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이 모든 혼란을 정리하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세조였다.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두 소설은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광수의 『단종 애사』는 단종의 슬픈 역사〔哀史〕를 연민을 가지고 그려 낸 작품이고,
김동인의 『대수양』은 수양 대군의 영웅적인 면을 부각시켜 강자 지향의 의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단종 애사』는 세종 23년에서 세조 2년까지 15년에 걸친 이야기로,
단종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역사, 곧 단종의 일대기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광수는 역사 기록자의 입장을 철저히 따르고 있으며, 이 소설을 통해
그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수양을 일제에, 단종의 폐위를 국권 상실에 비유하여
선하지만 강자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작가의 그런 의도보다는 불행한 왕에 대한 연민이 훨씬 강조되어 있다.
여기에 비해 『대수양』은 사건의 줄거리 면에서는
비교적 충실히 사료를 따르고 있지만,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역사 해석에 반박, 새로운 해석을 보여 주고 있다.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김동인의 시각이 어떠한지 줄거리를 통해 살펴보자.
세종은 항상 동궁(문종)이 나약하고 투기심이 많아
걸출한 아우 수양 대군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을 걱정하다가 죽었다.
뒤이어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수양 대군을 부당하게 물리치기만 하다가
재위 2년 만에 죽고 어린 단종이 등극하였다.
단종은 대범하고 충성스러우며 국가를 걱정하는 숙부 수양 대군을
점차 신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종서가 안평 대군을 떠받들어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것을 알아차린 수양 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역신을 숙청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국가의 안위에 힘쓴다.
정인지, 권람 등은 나라를 걱정하는 수양 대군의 참뜻을 모르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고, 단종은 벅찬 정사에 지쳐
왕위를 수양 대군에게 맡기고 상왕(上王, 자리를 물려준, 생존하는 전왕)이 되기를 간청한다.
그리하여 수양이 왕위에 오르니 곧 세조였다.
이 작품은 세종 30년경에서 세조 원년까지 약 8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단종 애사』와는 정반대로 수양을 혼란스런 조정을 수습하고
굳센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고 있다.
『대수양』은 이광수의 역사의식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내용의 차이 외에 소설적 기법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난 작품이 아니다.
자리만 바뀌었을 뿐 역사의 인물을 또 다른 선악 대비로만 그리고 있으며,
역사적 지식의 단편적 나열에만 그쳐 새로운 문학적 형상화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김동인이 수양 대군을 영웅으로 그려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3. 역사의 뒤안길, 무엇이 진실인가
『대수양』은 전체 50장으로 짜여져 있는데, 대부분이 수양의 영웅화로 일관하고 있다.
김동인은 제1장부터 수양의 왕자다움을 문종과 대비하여 보여 주고 있다.
맏아드님 동궁은 그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약하고 부족하였다.
동궁이라면 장래의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둘째 아드님 진평(후의 수양)은 또 그 사람됨이 너무 과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그 성격이 억세고 커 가서,
그것은 재상감이 아니요, 오히려 왕자의 감이었다.
뒤이어 전개되는 내용은 세종 자신이 맏아들이 아닌데도 태조에게 발탁되어
왕위에 오른 사실에서 생겨난 번민이 주류를 이룬다.
세종은 자신이 아니었으면 자연스럽게 왕이 되었을 양녕 대군이
겪는 고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수양의 왕자다운 기상을
간파했으면서도 세종은 과거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하였다.
김동인은 바로 여기에서 현실을 무시하고 제도나 습관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세종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문종과 단종, 안평 대군에 이르는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세조는 분명 역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그의 왕좌는 찬탈이라는 오명과 신하들의 피로 얼룩져 있다.
그는 강한 왕이었지만 선한 왕은 아니었고,
이 점에서 그를 둘러싼 역사적 기록은 결코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김동인은 역사를 재해석하여 수양을 긍정적 인물로 탄생시켰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이미 역사에서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 아니라,
혼란기의 역사 속에서 썩 훌륭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영웅들을 새롭게 찾아내었다.
『운현궁의 봄』과 『젊은 그들』에서 보여 준 흥선 대원군의 영웅화가 그렇고,
『견훤』에서 견훤을 영웅으로 우뚝 세운 사실이 또한 그렇다.
김동인은 역사 속의 새로운 강자들을 통해 강자 중심의 국권 회복 의식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요컨대 이광수가 수양을 일제에 비유하여 우리의 역사를 비련의 역사로만 보는
소극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김동인은 충분한 능력을 지녔는데도
잘못된 운명으로 시련을 겪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수양을 통해
우리의 잠재된 힘을 끌어내려는 적극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현실로 끌어 오는 방식에 있어서 그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취한 것이다.
문학에서 역사를 수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광수의 『단종 애사』는 역사의 재생에 불과하다는
부끄러운 평가를 받았으며,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이 문제가 되었다.
역사가 아닌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기록의 수용보다
작가가 능동적으로 역사에서 취하는 진실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약자의 입장에서, 또 왕통의 올바른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왕조의 기록에 동의하고 있었으니 안이한 역사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김동인은 이광수와는 달리 역사적 기록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왜곡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사실상 『대수양』은 세조가 등극하면서 작품이 끝나고 있어서
왕조의 정의를 위해 죽어 간 사육신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외면하고 있다.
만일 김동인이 수양의 영웅화에 투철했고, 역사 해석에도 철저했다면
사육신에 대한 수양의 처사에 관해서도 합당한 해석을 내렸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같은 사건을 주제로 한 박종화(朴鍾和, 1901~1981)의 단편
「목 메이는 女子」는 좋은 비교가 된다. 이 작품은 단종 폐위를 둘러싼
신숙주의 변절과 그 부인의 자살을 주요 내용으로 한 소설로서,
심리적인 갈등을 가족사를 중심으로 잘 서술하고 있다.
선악의 구분이나 역사에 대한 어떤 평가에서 벗어나 개인의 심리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 개연성을 얻고 있는 점은 두 작품에 비해 분명 뛰어난 점이다.
4. 역사는 사실(史實)의 기록이고 문학은 진실의 탐색이다
역사학자 카(E. H. Carr, 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계속적인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또 다른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녕 알 수 없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다.
지나간 역사의 기록만으로는 무수한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간 역사는 쉽게 변형될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소설은 현실적인 인간의 삶에 바탕을 둔 개연성 있는 허구이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연성이 역사보다도 철학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역사보다도 철학적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있음직한 재현이
철저한 검증을 통한 과학적 추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삶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역사를 상상력을 통해 재현하는 역사 소설은 아무리 과거의 역사적 기록에서
줄거리를 취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인간 삶에 대한 탐색이고 진실의 구현이어야 한다.
현재와 상호 작용하는 살아 있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동인의 『대수양』은 역사를 현재적 맥락에서 재구성한 의미 있는 작품으로,
역사 소설의 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