遼東요동과 遼西요서의 기준. 遼요, 遼河요하(랴오허강)에 대하여
대요(大遼, 916년 ~ 1125년)는 거란족 이 중국 화북지역을 정복하고 세운 왕조이다. 생활은 주로 정주 농경과 목축을 하였다. 야율아보기 가 거란족과 기타 이민족들을 모아 화북을 점령하고 칭제하였다. 916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 에 대요로 바꾸고, 1125년 에 금나라 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보통 약칭 요(遼)라고 한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자 질라부(迭剌部)야율씨 의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카간이 되었으며 916년 스스로를 천황제라 부르면서 거란국을 건국했다. 그 이후 탕구트와 위구르 등의 부족들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925년 발해 (渤海)의 영토였던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정복하기에 이른다.(위키백과에서 퍼옴)
그러니까 947년부터 1125년까지는 요하가 될 수 있어도 그 이전이나 이후에는 요하가 존재할 수가 없는게 역사 상식이다. 요나라가 망하고 1125년 금나라가 건국되면 금하가 되고, 다시 1234년 몽골이 금나라를 정복하면 몽골하 또는 원하가 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7년 이전의 고구리 백제 신라시대부터 쭉 요하가 있었고 요동 요서의 기준이 되었다고 친일 반민족 역사학자놈들이 우리에게 강제입식시켜온 사실이 명백하다.
諸侯제후의 역사에서 帝제 작위와 侯후 작위가 속해 있는데, 帝제는 자손들에게 세습이 가능한 작위이고 侯후는 세습이 안되고 당대에 그치는 작위라고 설명을 했었다.
遼요 멀요, 遼東요동과 遼西요서의 기준이 되는 遼요땅은 947년 이전과 1125년(178년 사이) 이후에는 지금의 랴오허강이라 불리는 遼河요하를 기준으로 설명을 하면 안된다.
공조판서였고 집현전 대제학이며 성균관 대사성으로 겸직했던 정인지가 고려사를 지으면서 궁예가 869년 태어나서 901년 태봉국을 세우고 918년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궁예가 태봉국을 세울 때 공을 세운 홍유가 말하길, 궁예가 요좌삼분지계로 태봉국을 세웠다는데, 이때 요좌삼분지계의 遼요땅은 지금 랴오허강이라고 부르는 遼河요하의 좌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홍유가 말한 요좌삼분지계의 요땅은 태항산 가운데 산서성 진중시 遼요와 평요고성이 있는 곳밖에 없다.
이해 안되거나 질문 있는 사람!